교환의 본래 목적?/무엇으로 내 가치를 설명할 것인가?

나의 일상 여행기. (19)

by Chris
사진: Photo by Lina Trochez on Unsplash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엄격하게 정하지 않으니 아침을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것이다. 아침의 적막과 어지러운 방안의 불쾌함이 눈 뜨기를 거부한다. 아침에 누군가를 볼 사람도, 해야 할 것도 명확한 것이 없는 흐리멍덩함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다. 분명한 경계를 지어야 한다. 흐릿한 아침과 새벽의 경계를 새롭게 짓고 아침에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계속된 외침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루를 잘 시작하고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서라도 하루의 의무를 만들어야 한다. 좀 더 나은 하루를 위하여 방을 청소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더불어 나의 목표와 계획을 적은 만다라트도 실천 가능하도록 수정할 때가 왔다.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8시가 이미 지나버렸다. 어떤 이에게는 이 시간도 이른 시간이라 하겠지만, 아침의 시작을 평균 7시 이전에 했던 나로서는 조금은 아쉬운 시간이다. 저기에 아침밥과 씻는 것을 추가하면 금세 9시가 되어버려 10시 모임까지의 그 시간이 무언가를 하기 모호한 시간이 된다. 그래도 더 늦게 혹은 폐인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해주는데 감사하며 음식을 만들었다. 만들었다기보다는 갖은 고기와 야채, 과일 그리고 두유를 넣고 갈아서 마시는 것이 전부이지만, 식사 대용으로는 제법 맛있다.

아침을 먹고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환경미화를 담당하는 이모가 자기 동료 딸의 돌 기념 떡을 아침에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백설기를 건네주셨다. 나는 감사함에 가져온 커피를 종이컵에 타서 드리고 몇 봉을 그분의 주머니에 억지로 밀어 넣는다. 이런 광경이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사소한 정을 당연하게 받을 때도 된 거 같은데, 매번 그러하듯 한사코 만류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행위 자체를 누군가는 조금의 의무적으로 혹은 조금은 형식적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형식이 존재하는 까닭은 이를 당연시하게 될 경우, 그 마음조차 당연시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남자 화장실에 있는 파리 스티커를 보면서 실제 파리가 아님에도, 그리고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스티커를 보고 그것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마음의 고마움을 스스로 일깨우는 일종의 ‘넛지’인 것이다. 그래서 예는 그 형식이 지나쳐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형식이 아예 없어서도 안 된다. 그 형식은 지나지지는 않더라도 예와 무례를 구분할 만큼의 기준은 필요하며 거기에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마음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지만, 반면에 쉬운 일일 수도 있다. 서로 믿는 사회, 통념과 도덕이 합의된 사회에서의 관계에서는 대체로 그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자연스레 습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믿음을 깨뜨리고 사기를 치려는 인간이 있다면 마음의 진위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사기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인간에게서나 다분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접근하는 사이에서 발생하겠지만, 나와 이모 사이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이모를 선의로써 대하고 이모 역시 그러하다. 그러한 선의의 믿음 가운데 일종의 친목과 예의 장치로서 선물의 교환과 그 교환에 있어서 일정의 형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물물교환이 서로의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 중에 나타났다는 고전 경제학적 사고는 그 기원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어제 언급한 칼 폴라니의 두꺼운 책, '거대한 전환'에서는 경제 활동의 기원을 마을 경제와 대외 경제로 나눠 서술한다. 그리고 원시 부족 사회에서 벌어지는 상호 간의 친목을 위한 교환 활동의 사례를 들어 교환의 본래 목적이 이익 추구가 아니라 '이모와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친목과 유대'임을 주장한다.

거래활동이 아닌 지역 간 우정과 친목을 쌓는 행위가 교환의 본래 목적이라는 게 중요한 까닭은 현재 시장 경제 시스템의 기원인 「물물교환에 따른 이익의 극대화가 원시사회로부터 이어져 온 합리적-이기적 인간이라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발현된 근본 제도」라는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인간 본성의 심리학적 전제를 다룬다면, 폴라니의 주장은 그 전제로부터 발생한 기원 자체가 오류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비합리적이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초기 경제의 기원이 물물교환으로 말미암은 상호 이득 추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중요한 까닭은 실제 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고전 경제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부분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경제는 단순히 고전 물리학처럼 그 현상의 외부에서 관찰과 실험, 검증을 통해 법칙을 도출하는 과학이 아니다. 경제를 공부하는 까닭은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구성원 다수가 만족할 '가능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경제 현상의 원리는 현재 상태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여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는 고전 물리학적 사고보다 양자역학적 사고가 필요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닐스 보어가 언급한 ‘상보적 원리’가 경제에서도 작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의 주류 이론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 상보적 원리로서 행동 경제학을 비롯한 다양한 경제이론을 함께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마치고 간만에 영철과 지현 누나를 만나 점심을 함께했다. 누나는 시간이 안된다고 했었는데, 일정이 바뀌어 다행히 볼 수 있었다. 밥을 먹으며 어떻게 지냈는지, 그간의 근황을 물어봤다. 누나는 현재 퍼스널 트레이닝 중이라는데 마음 같아서는 내가 붙잡고 해주고 싶었다. 먹는 사진을 찍어 올리고 30분 P.T를 받는데 2만 5천 원이었다.

P.T를 하는 것이나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배운다면 그것 또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상 사람들을 가르쳐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도에만 의존하는 경우,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서 동시에 운동도 접게 되는 경우를 자주 봐 왔다. 차라리 그보다 운동법을 습득하고 나면 스스로 어떻게든 매일 발 도장을 찍겠다고 생각하고 헬스장에 가는 게 좋다. 초기에는 특정 시간을 정해두는 것보다 무조건 일 순위로 두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계속 하다 보면 대체로 시간은 특정 시간대로 정해지게 된다. 퍼스널 트레이닝은 시간과 의지를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의지가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 주도적이 되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영철은 수업에, 누나는 일이 있어 밥 먹고 바로 헤어졌다. 나는 다시 월천 라운지로 가서 자리하고 일기를 썼다. 요즘에는 보통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점심 이후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한번 쓰기 시작하면 2시간 이상 가량 걸리는 듯했다.

글을 쓰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 최대의 꿈이라면 지금의 이 행위는 그러한 길을 걷는 내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또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 의식의 흐름대로 써가는 이 글은 나중에 나를 알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처럼 될지 누가 어찌 알겠는가? 물론 그의 작품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까닭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문장이 그림을 그리는 듯 아름답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마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떠오른다. 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 준 작가 중 하나이다. 그에 반해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감정과 연관된 단어를 주로 쓴다기보다 현재 내가 보는 책들의 성격과 문체와 연관되는 듯하다. 그래서 미술적이거나 정서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부분보다도 어쩌면 학문적이고 사변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것 같다. 여하튼 나는 이러한 습관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끊임없이 써 내려갈 것이다. 나는 글쓰기의 새로운 공간을 찾은 듯하며 이 고요하고 작은 공간에서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어느덧 4시를 넘어섰다. 어제 정현 씨로부터 아르바이트 자리를 연락받고 5시에 뵙기로 해서 부리나케 집에 들러 이력서를 뽑았다. 최근 몇 년간 나의 이력에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던가 싶어 고민하다가, 내가 해왔던 일들을 이력에 적기로 했다. 근 5년간의 세월 동안 나는 절대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비록 돈을 벌거나 직업적 경력은 없을지언정, 누구보다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간 해왔던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경력을 적어나갔다. 우선 업무와 관련된 경력 사항으로는 학교에서 조교로 일한 것, 빌딩을 관리하는 총무로 꽤 오랫동안 일했던 것, 모 박사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녹취록 전사 작업을 한 것, 그리고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까지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동아리 및 모임으로는 2년 이상 매일 2시간씩 진행했던 영어 모임, 운동 코치로 있었던 아침 7시 운동모임, 강의 및 프로그램 진행을 도맡았던 서양 미술사 모임, 그리고 작가가 되기로 한 이후부터 만들고 또 헌신했던 독서 동아리 등등….

면접을 보면서 이력서를 본 사장님께서 이력이 화려하다며 내 경력을 알아봐 주셨다. 문득 내가 결코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직장 생활은 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탁월해지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왔다. 과거에는 내 나이에 비해 가진 게 거의 없다시피 하고 직업으로서 쓸만한 게 없다고 생각하여 내 이력을 누구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나 자신은 열심히 살아왔다고 하나, 그것을 어찌 이력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이력을 수정하면서 ‘내 이력이 결코 무가치한 게 아니고 다만 아직 알아봐 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들춰내 알리거나 또는 자신을 PR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갑자기 솟구쳤다.

‘나는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오로지 나이며 나는 누구 앞에서도 주인으로서 당당히 나 자신을 보일 것이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나의 완전한 자유다. 나는 온전한 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면접을 보면서 문득 지난번에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면접관이 나를 평가하는 것처럼 나 역시 상대방을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대화를 훨씬 원활히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갑을 관계가 아니었고 동등한 자격을 가진 관계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만, 면접의 대화는 좋았으나 내가 생각하던 일이 아니었다. 바이럴 마케팅이었으며 그녀는 내 능력을 바탕으로 신사업에 대해 기획까지도 하기를 바라는 듯싶었다.

마케팅 업무를 조금이나마 해본 입장으로는 그 일들이 단지 조금의 시간을 투자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과 생각보다도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블로그 등을 이용한 바이럴 마케팅, 말이 좋아서 마케팅이지 그저 일반 사용자처럼 써서 올리는 상품평일 따름이라는 게 해당 아르바이트에 대한 나의 관심을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이제 막 벤처 인큐베이팅 단계를 진행하는 업체였기에 행여 있을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앞으로, 어쩌면 근 미래에 어떠한 사업을 하게 될지도 모를 내가 그 과정을 알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하여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시 라운지로 들어와 정현 씨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는 마음이 돌아선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 아르바이트에 시간과 관심을 빼앗겨서는 지금 책을 보고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고사를 하려던 찰나에 사장님이 다른 신사업을 구상 중인데 그것은 어떠냐고 제안이 왔다. 책을 읽고 질문을 만드는 것이며 하루에 한두 시간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사업 내용은 둘째치고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어찌 괜찮을 것 같아 우선 수락했다. 일의 강도는 해보면 알겠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다 읽고서, 오로지 하이젠베르크의 책만을 보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책만을 읽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두 권 내지 세 권 정도의 서로 다른 책을 함께 정독하여 읽는데, 까닭은 더디게 읽다가 느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디게 읽어도 정독하면서 집중할 수만 있다면 한 권의 책만을 파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지루함을 느끼면 아무리 정독을 하려 해도 생각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집중이 안 될 때에는 다른 책을 펼치는 게 낫다. 조금 읽기 수월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책일수록 좋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내가 ‘뽀모도로’ 방식으로 인터벌 독서를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인 시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다. ‘뽀모도로’와 이 방식을 결합하면 여러 책을 집중해서 보기 수월하다.

하이젠베르크의 책인 '부분과 전체'가 챕터 마다 다루는 논의가 광범위하고 각각의 논의 대상은 한 권의 책으로 엮을만한 주제인지라 흥미는 있으나 그만큼 깊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래서 책 자체는 재미있으나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워, 자칫하면 시간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 점을 피하고자, 구매해둔 전자책 목록에서 볼만한 책을 몇 권 살펴보았다. 최근에 산 책들 가운데에서 몇 권을 내려받았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아마도 아르바이트 갈 때까지 남은 시간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모호한 시간이라는 점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마치 내 방의 난잡해진 공간처럼 시간도 뒤죽박죽이 되어 결국 아무것도 손을 못대고 포기해버리는 상태가 된 것이다. 어느 책에선 정리를 잘하려면 첫째로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시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간의 정리를 위해 우선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 중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 것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그 구분을 하는 법을 잊었더니 버려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포기 상태가 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속에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들을 파묻히도록 내버려 둔 것은 아닐까? 결국, 모든 책을 다 덮고 그저 눈을 감았다. 피곤함이 계속 몰려오고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몰려왔다.

9시가 다 되어, 짐을 두고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가는 길에 올랐다. 그제야 나는 할 일이 떠올라 휴대폰을 들고 영어 패턴 학습을 했다. 그 일은 그 시간과 그 장소에 묶여 있었다. 그 한정된 시간과 정해진 공간은 내게 할 일을 부여하고 서로를 강하게 묶어주었다.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서 일할 것인가? 일을 완수하려면 이 둘을 적절히 묶어 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 때 탁월함을 이룩한다. 적어도 탁월함이라는 영역에서는 한 번의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탁월함은 습관과도 같은 반복된 일에서 이룩되며 매일 똑같은 시간과 공간은 탁월함을 이룩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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