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여행기. (20)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단어 책을 보았다. 전날 자기 전에 15개 정도 되는 단어를 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문을 소리 내 읽었다.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매일 연습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 같았다.
원래는 단어 학습 모임을 모집하여 진행하고자 했으나 학생들은 토익이 아니어서 그런지 별로 인기가 없었다. 모임 시간을 아침 8시로 정해 이른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다만, 프린트물을 비롯하여 과정 중 모든 것을 다 준비한다고 했음에도 연락이 없는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쓸 때 조금 부드럽게 쓸 걸 그랬나? 다른 스터디 모집 글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딱딱하게 기술하여 내가 봐도 부담스럽기는 했다. 다만, 그렇게 한 까닭은 모임의 성격에 대해 명확히 밝히고 의지를 갖추고 열심히 할 사람만을 받기 위해서였다.
어떤 모임을 시작할 때마다 매번 그렇게 글을 올렸는데, 인제 와서 말랑말랑하게 글을 쓰는 것도 별로였다. 여하튼 매번 그렇게 진지함이 엿보이는 안내부터 사람을 모집한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그 모임들이 지금의 날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모임 중 아쉬움이 남는 것은 학습 이외의 부수적인 인적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전엔 모임을 만들면 자주 했고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좋은 친구가 되어 연락을 유지하곤 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만든 모임들은 대체로 그 목적 이외의 사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따로 친목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학습 커리큘럼이 정밀하게 짜여 있어 정말 공부를 위한 이들이 찾아오며, 모임을 준비하다 보면 친목 모임까지 생각이 쉽게 미치지 않는 등의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 차라리 그런 것들을 주도해 줬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었다.
대체로 많은 이들은 모임을 함께 하는 스터디나 소모임이라기보다 학원이나 학교처럼 스승과 제자 관계는 아니더라도 단지 수강생 또는 멘티의 위치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 같아 그 이상의 관계를 요구하는 것도 우스웠다. 이 친구들과 나와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가장 큰 이유는 나이 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래가 필요한 까닭이 바로 이런 이유일까?
이따금 허물없이 만나고 어느 때 만나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을 나눌 수 있던 이들이 그립다. 과거 만들었던 독서 동아리 친구들이 그러했다. 물론 그때도 서로 나이 차는 꽤 있었다. 그럼에도,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오랫동안 함께 했던 점이나 자유로운 토론이 아무 때나 그 공간 안에서 이뤄지곤 했었다.
그때 그 친구들이 요즘 들어 더 그리워진다. 물론 지금도 다시 그러한 모임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 시작이 마음에 걸리는 까닭은 나이 때문이며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전처럼 온 힘을 그곳에 쏟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모든 게 핑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성 없는 나라도 새로운 모임을 생각할 때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일깨우는 언어가 걸림돌이 되어 분명하게 눈앞을 가로막을 때, 실체가 없는 마음은 번번이 흔들리거나 지고 만다. 나이나 통념이 그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행동 반경에 있는 '공간을 점유하는 다수의 평균 나이와 통념'이겠지. 그 인식을 깨부수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공간 안에 나와 같은 세대가 존재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영어 모임이 끝날 무렵 정민이에게 영화 보자는 연락이 왔다. 어제부터 계속 노래를 부르기에 마지못해 수락하고 함께 보러 갔다. 생각해보면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딱히 극장에 가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그 시간에 책 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잘 안 가게 된다. 아니면 우리 아버지 말마따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보면 된다.' 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게 딱히 볼 게 없으면 스터디룸을 빌려서 대형 모니터로 보면 어떻겠냐고 설득하려다가 간만에 바람도 쐴 겸 영화 나들이를 나섰다.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미성년'을 봤다. 두 집안의 미성년인 딸들이 부모의 불륜과 임신 사실을 알고 대응해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건데, 데뷔작치고는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미성년이 성년처럼 책임 있게 행동하고 성년인 어른들이 아이처럼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데 주제 의식은 비교적 명확한 편이었다. 나로서는 조금 의아하던 부분이 카니발리즘이 느껴지는 어느 부분이었는데, 심하게 거부감이 들거나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느끼긴 어려웠다. 연기자들의 연기도 좋고 특히 남편과 내연녀의 불륜을 보고 흔들리면서도 딸 앞에서 의연하게 대하려는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 또한, 이들이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그녀가 내연녀나 남편에게 보이는 감정 연기가 일품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니 피곤이 밀려와 한숨 잔다는 게 5시 넘어서까지 잤다. 일어나고 시계를 보니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으나 한편으로는 몸이 많이 피곤했구나 싶어서, 나쁜 생각을 접고 가볍게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일기를 썼다. 저녁에 쓰는 전날 일기라! 그러나 글을 쓰는 게 나의 본질, 하고 싶은 바를 하게 하는 것이라 결코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본질은 책을 읽는 것도 아닌 내 생각이 담긴 글을 쓰는 것이었고 이것을 쓰는 약 2시간 동안 나는 그 일을 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눈도 필요 없고 잘 써야 한다고 압박을 느낄 필요도 없이 그저 내 마음과 이성이 시키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됐다.
이때가 바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며 내 목표는 모든 순간이 이런 행복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온종일, 1년 365일을 글을 써도 가치 있는 생각이 샘솟기를! 몇 년간 책을 읽은 까닭은 바로 그 생각의 분수를 위함이었으며 그것이 나의 글을 통해 반영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일기는 그 소정의 성과 중 일부이며 내 소망의 반응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방이 아니며 오로지 이 작은 휴대폰 하나와 생각할 수 있고 문자를 타이핑할 수 있으며 그것을 볼 수 있는 나 자신만으로 충분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뿐이다. 나는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