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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28. 2020

무도(武道)와 아도(我道)

나의 주짓수 도전기 14.

이 이야기는 이제 막 주짓수에 등록하고 운동을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기록을 시작한 까닭은 첫째, 내가 배운 지식과 기술에 대해 잊지 않기 위함이며 훗날 어느 정도 성장을 했을 때 나 자신을 뒤돌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둘째, 나와 같은 초심자들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찾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은 그 과정 중에 만나고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주짓수와 같이 시작한 이 이야기는 시작은 있지만, 언제 끝날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어떤 사정에 의해 도중에 수련을 그만둘 수도 있고 혹은 바쁜 나날이 이어져서 기록을 중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써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경험, 그 당시의 생각이나 느낌과 지금 시점에서의 생각, 그리고 그 당시에 배운 기술이나 알게 된 용어의 정리 등이 중심이 될 것이다. 참고로 주짓수에 관한 여러 기술과 관련된 용어는 간단히 정리하되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한 이들이나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될 수 있으면 출처를 기재할 것이니, 관심 있는 사람은 확인하기 바란다.

알다시피, 이야기의 힘은 세다.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사회를 바꾸기까지 한다. 내 글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릴지 모를 이 주짓수를 보면서 누군가 그 어떤 영감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 참고로 글은 완성본이 아니므로, 틈틈이 수정될 수 있다.




몸은 지치지만 따뜻해지는 감정


“저랑 한판 하시죠.”

마우스피스를 착용하고 있으니 선배들이 와서 롤링하자고 제안을 했다.  

“혹시 제가 무리하게 힘을 쓰는 기분이 들거든, 끝나고 꼭 말씀해 주세요.”  

그들은 흔쾌하게 알았다고 했다. 대화를 하듯, 깃을 잡고 다리를 막고 때로는 내가 알고 있지만, 도무지 걸리지 않는 기술을 걸어가며 계속 롤링을 했다. 그들은 이따금 삼각 조르기로 나를 조르거나 천천히 암바를 걸었고 그럴 때마다 탭을 치고 웃으며 일어나 다시 하자고 했다. 그렇게 게임을 하니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롤링을 하기에 앞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 두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하나는 힘을 빼고 되도록 부드럽게, 다른 하나는 오늘 배운 기술이 걸리지는 않더라도 시도라도 할 것. 그러나 번번이 조금 더 힘이 들어갔고 배운 기술은 세세한 것들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몇 번이고 훈련 때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 걸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부족하다. 그래서 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끝나고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악수를 할 때였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서로 웃으면서 악수를 건넬 때, 만족감을 넘어서 감동 같은 게 있었다. 이런 감정을 이야기하니, 같이 운동하다가 조금은 가까워진 한 사람이 “변태가 맞았어….” 라며 웃었다. 지치는 감정이 아주 좋았다. 단순히 허무함으로 지쳐버리는 게 아니라, 뭔가 몸은 지치지만 따뜻해지는 감정이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진심을 담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부르짖기라고 하고 싶은 감정이었다. 나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이들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나는 이 거짓이 없는 하얀 매트가 너무나 좋았다. 마음 같으면 매일 모든 시간에 와서 주짓수를 하고 싶었다. 이 열정이 이내 사그라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만, 나는 일상의 수많은 일과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그러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효율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궁리했다.


무도(武道)와 아도(我道)


무도(武道) ‘굳셀 무’에 ‘길 도’를 쓰는 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체력의 향상이나 기술이나 스포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굳셀 무’는 戈(창 과)와 止(그칠 지, 발 지)의 결합인 武는 무엇일까? 나는 이 글자를 볼 때, 창을 등에 지고 자신의 길을 초연히 홀로 걷는 한 무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아마 홀로 여행을 떠나며 위험에 처한 이를 돕고 다시 홀로 외로이 웃으면서 길을 떠나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길은 단순히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는 길이 아닐 것이다. 그 길게 뻗은 길 위에서 홀로 걷다가 때로는 만나게 되는 이들을 자신의 창으로 최선을 다해 돕고 다시 웃으며 길을 떠나는 그런 길 아닐까? 말하자면, 그 길은 마치 산티아고에 있는 순례자의 길처럼 무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수양하는 길이다. 무도가 스포츠와 달리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까닭도 바로 그러한 연유일 것이다. 그렇기에 굳세다는 의미는 육체적인 강함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단단히 무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 길 위에서 만날 이들을 통해 기술 이상의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 그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 무도가가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바로 내공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하는 운동은 스포츠로 각색된 주짓수이지만, 그 시대의 빛바랜 흔적 위에서도 무도의 의미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 새삼 기뻤다. 또한, 내가 아마도 감동한 부분이 바로 그러한 지점 아니었을까? 체력과 스포츠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어떤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문화적 정신이 나에게도 이어져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나의 길은 무엇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추구하는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이 길은 정말 고독하기만 한 길일까?'

주짓수의 길이 아닌 무의 길은 좀 더 길고 먼 길일 것이다. 그리고 주짓수의 우승 혹은 검은 벨트처럼 확고하게 한 길만 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보다 좀 더 넓고 두루뭉술한 길일 것이다. 어쩌면 마치 몽골의 드넓은 초원처럼 따로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며 그저 내가 밟는 곳이 길이 되는 그런 곳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러한 길을 하나 더 알고 있다. 바로 생이라는 거대한 대지 위에 한가운데 있는 삶이라는 길이다. 나는 지금 길이며, 길이 아닌 그런 곳 위에서 서 있다. 그곳에서 나는 방향을 설정해야 하며 그곳으로 가다 보면 결국 내가 닿을 목적지가 있을 거라고 믿을 뿐이다. 너무 멀어서 희미한, 혹은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그래서 때로는 그 길이 정말 맞는지 의심하기도 하고 그 길이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내 믿음을 확인시켜줄 어떤 흔적이라도 발견하기라도 하면 기뻐하며 광활한 이 길을 좀 더 걷게 되는 것이다.  

이 길은, 길이 아니며, 또한 길이다. 사실 목적지가 없을 수도 있다. 그냥 이 길이라는 거대한 대지의 영역 위에서 발걸음이 닿고 잠시 머무는 곳이 그거 목적지가 될지 모른다. 무도의 길 위에 주짓수가 있는 것처럼, 我道 라는 길이 아닌 길 위에서 삶이라는 시간 위에 수많은 목적지가 있는 것이다. 그 시간 위에서 최종 목적지는 죽음뿐이다. 신을 믿지 않는 나는, 그것이 천국이나 환생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저 그 광활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지금 온 힘을 다할 뿐이다. 내일은 오늘을 대신해 주지 못하기에.  

다시 묻는다. 나의 길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그 길 위에서 좀 더 나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불어 잠시라도 그 길 위에서 만난 누군가가 나로 말미암아 그 자신도 좀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한다면 바랄 게 없겠지.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언제나 바라는 일이다. ‘당신 덕분에 조금 더 나은 자신을 발견했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 기쁜 게 또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말해주는 이를 보면서 나도 다시 힘을 얻을 것이다.  

이어 묻는다. 내가 추구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 주관식 질문에 나는 어떤 답변을 해야 할까? 해답을 찾는 과정 자체가 내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빈칸 안에 써질 단어와 문장이 보석처럼 예쁘고 값진 말이 되기를. 꾹꾹 눌러써서, 지워지고 바래져도 그 흔적이 남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과정 자체가 두렵고 힘들고 또한 외로워도, 그것이 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도전할 수 있기를 언제나 바란다.  

그러면 그다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길은 정말 고독하기만 한 것일까?  

각각의 존재가 추구하는 길은 결국 혼자 걸을 수밖에 없으니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정하자. 동료나 가족 혹은 애인이 있더라도 때로는 고독하다고. 그러나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고립과 고독의 구분이다. 고립된 인간은 고독하지만, 고독한 인간이라고 해서 마냥 고립된 존재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독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고립은 육체적인 것이다. 고독하다고 해서 고립될 필요는 없다. 아니, 사실 우리가 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고독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속성은 고립을 이끈다. 숨고 싶고 혼자 있고 싶고 그리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가려 하는 충동에서 벗어나려면, 이성이 가지고 있는 의지로 이러한 고립을 이겨내야 한다. 내가 만든 고독한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의 존재로부터 어떤 의미를 배워갈 때 결코 나는 고독하나 고립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아니, 나는 결코 고립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내 의지가 발휘되어야 할 곳이 바로 이러한 고독의 충동으로 발생하는 고립 욕구를 벗어나야 할 지점이다.


고립 충동에 관하여.


고립 충동이 너무나 강해서 내 의지로는 도무지 어떻게 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장 안에서 몸을 부딪치는 것은 나를 결코 고립된 인간으로 만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립되지 않게 내 의지를 보이지 않더라도 주변인에 의해서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상황과 장소는 내가 고독하더라도 고립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안에 의지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공간은 내 주변에 선한 이들이 고립의 충동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그것이 매트 위가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우리의 삶 속에 고립 충동을 없애버릴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요는 의지와 상황이 중요하다. 그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이 매트 위에 발을 처음 디뎠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 매트 위의 선한 천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등진 채, 그저 나를 고립시켜 머릿속에 있는 잡념들을 다 씻어버리고 싶었다. 미친 듯이 홀로 운동하고 나면 한동안 괜찮아졌다. 어쩌면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그렇게 했다. 매트 위의 천사들은 그저 나를 바라만 보았고 기다렸다. 적이 아닌 동료로서.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내 주변에는 나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그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때로는 그 존재가 하나의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내가 잘하나 못하나를 바라보는 하나의 고마운 감시원으로 여길 때도 있었다. 그 감시원이 그곳에 있기에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과 대화를 하거나 토론을 하지 않아도 그들로부터 부여받은 어떠한 삶의 에너지와 열정이 내게도 전달될 때면 나 역시 태도를 고치게 되고 그들이 힘들어하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매무시를 고쳐갔다. 나로 말미암아 그들이 도움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들 덕분에 언제나 내가 불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나를 위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여길 때에도, 허무함에 콧등까지 올라와 시린 기분을 참을 수 없을 때에도 모든 것이 다 무가치하다고 여겨 사람을 멀리할 때에도, 그때에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지탱해주는 이가 주변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 존재 중에는 그 사람처럼 존재의 의미가 너무나 커져 버려 눈을 감아도 형체가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눈을 감고 생각하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존재도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어떠한 일이나 행위의 이름 속에 묶여 있었다. 주짓수를 생각하면 크게 떠오르는 존재의 이름이 있고, 가족을 생각하면 크게 떠오르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떠오르는 존재도 그만큼 없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시간에 이르면 나는 세상에 홀로 남은 고독한 존재이며, 나를 생각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외로움과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것은 복 받은 것이다.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다는 말일 테니까. 물론 마음에 계속 담아둔 미워하는 이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보다 낫다. 아니, 어쩌면 그 시간은 누군가에겐 슬픔과 절망 속에서 우울로 남는 시간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겐  성숙함을 빚어가는 시간이리라.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 고독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으로 그 검은 공간을 메워가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 바로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의식과 무의식의 필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검은색의 빈 필름 공간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채워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을 보며 앞으로 이어질 삶의 필름들에 좀 더 깊이 있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

앞으로도 다가올 시간의 필름 속에서 누군가는 계속 나의 프레임 속에 들어와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나의 프레임 안에 있을 때, 나 역시 그들의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그렇게 서로 하나의 장면에 의미가 될 때, 그들의 프레임 안에서 출현하는 내가 절대 무가치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것만큼 기쁜 일은 없으니까.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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