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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03. 2020

'다음, 이 시간에…'라는 말

나의 주짓수 도전기 15.

'다음, 이 시간에…'라는 말


‘나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운동하리라. 롤링(대련)에 관심을 두기보다 기술 연습에 초점을 맞춰 완벽해질 수 있게 노력하리라.’

한 주가 지나고 다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무렵, 주짓수에 관한 방향도 다시 다잡고 그 순간에 좀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내자고 마음을 먹을 무렵이었다. 무언가 마음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기분마저 드는 때였다. 그 다짐이 스스로 대견스럽고 즐거워 한시라도 빨리 오후 5시가 되어 주짓수에 달려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도장에서 연락이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국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특수학교 등 전 학교의 개학을 연기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체육관도 교육부 지침에 따라 일주일간 휴관합니다. 휴관된 기간은 자동으로 연기됩니다. 관원분들과 가족 구성원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며, 휴관기간 동안 체육관 재정비 및 소독작업을 철저히 하여 수업 재개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략> 갑작스럽게 연락드렸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점 알아주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설마 했지만, 역시였다. 최근 확진자 수가 급격하게 높아짐에 따라 국가에서도 ‘심각’ 상태로 격상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보았다. 다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사랑해야지, 좀 더 잘해야지 마음을 먹은 그 순간에 받은 문자라 더욱더 아쉬웠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 우물쭈물하다간 이렇게 된다.’라며 삶의 아이러니를 맛보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내일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당장 해라.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하라던 어떤 이의 명언이 귓전을 울렸다. 헬스장도 폐쇄한 터라, 어쩔 수 없이 남은 시간 동안 집에서 개인 운동과 연습을 병행하기로 했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딱지 만한 집에서 운동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기존에 장소와 상황 그리고 시간에 묶어버린 계획의 빈 공간을 다시 채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이 집 안이라니…….

홈트레이닝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사실 집에도 상당히 많은 운동 기구들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사한 집이 대단히 작다는 것과 함께 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는 운동 의욕을 자극하는 데 있어서 꽤 필요한 부분이었는데, 함께 하는 분위기는 혼자 하는 것보다 언제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밖에 없는 집안에는 게으름을 피울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사실 날 게으르게 만드는 집구석에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실은 게으름을 너무 좋아해서 도망치듯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한다.

삶은 계속된다. 죽지만 않으면,


지금으로서는 가장 몰입하던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처럼 주짓수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뭔가 잠깐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삶은 그것이 없어도 계속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운동에 몰입하던 그 시간을 다른 일로 채워나갔다.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그 아쉬움 속에는 일상이 되어버린 어떤 것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느끼는 감정도 있었다. 일상 속에 어떤 것, 일상 속의 어떤 일, 일상 속에 어떤 사람….

어린 시절 보았던 텔레비전에는 매번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다음, 이 시간에….’ 또는 ‘내일 또 만나요!’ 그러나 이따금 그것만을 기다려 텔레비전을 켰는데, 즐겨 보던 것은 나오지 않고 다른 영상이 나오거나 특별 편성 프로그램 나올 때, 그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또 만나자고 했는데, 다음, 이 시간이라고 했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 나이 든 정치인 할아버지들뿐이었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허무함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라고 매번 다짐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다음, 이 시간 만날 그 무언가를 기대할 때면, 불현듯 그때 그 시절의 만화 영화를 못 봐서 한숨짓던 어린 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무뎌져 버린 줄 알았던 그 시절과 같은 한숨이 조금 입에서 배어 나온다. 소중하다 싶은 어떤 것, 어떤 일, 어떤 사람이 다음, 이 시간에 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을 때, 그냥 그 시절의 한숨만 쉬고 만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할 수 있는 것은 그 공백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는 것뿐이다.


나는 윤동주가 싫다


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종종 떠오르는 시가 있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참고로 나는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를 보면 체념하는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 이 시간’에도 볼 수 있을 거라 여기던, 어릴 때 동무는 죄다 잃어버리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조금 버둥거리다가 결국 체념하는 나 자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홀로 침전하여 들여다보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그런 나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육사나, 이후 세대의 신동엽처럼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의 슬픈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물론 태양이 가득한 한낮 동안에는, ‘다음, 이 시간에’를 지키지 못한,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며 체념해야 하던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며, 나는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 찾을 것이라고 속으로 부르짖는다. 그러나 등불의 기름이 언젠가 다 타버리면 결국 불이 사그라지고 어둠 다시 묻히듯, 그렇게 나의 의지가 사그라질 때면 불현듯 체념하는 나 자신을 또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감상에 젖다가 결국 공사장 인부들의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쪽잠이 들고 만다.

이따금 어떤 우연과 필연이 겹쳐 ‘다음에 또 만나요!’라는 말이 거짓이 되어버렸을 때, 그것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때에도 나는 그 일이 마치 '내가 바르지 못해서, 내가 못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느껴버리고 그냥 살아간다. 그리고는 다시금 깨닫는다.

‘아! 실로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지도 못하는구나. 실로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사실 무슨 죄 가운데 있는지도 모르기에, 아니 수많은 죄가 얽기고 설켜 실타래를 이루고 있기에 무엇을 용서받아야 할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묻어버리고 유쾌한 듯 그냥 살아가는 것뿐이다. 다음, 이 시간에 만나지 못한 수많은 것들에 미안해하며 그리고 이런 나를 다음 시간에도 만나주었던 이들에고마워하지만, 대신 이렇게

하며 살아간다.

‘미안합니다.’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닿을 수도 없는 이 말을 속으로 건네고, 코로나 시대에도 할 줄 아는 거라곤 글을 쓰는 거니 먹먹한 마음을 여기에 잔뜩 풀어헤쳐 버리고 만다.

그저 작은 손으로 흰 도복의 깃을 붙잡고 있다 보면 시간이 흘러 ‘다음, 이 시간’이 되어도 더는 만나지 못하는 것들에 무뎌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당연히 올 줄 알았던 도복의 시간이 기약이 없어지자 가슴을 아리게 하던 것들이 다시 폭포수처럼 쏟아져, 그 비어버린 공간에 들어온다.

‘다시 채워야 한다. 정말 무뎌질 때까지. 또 다른 의미 있는 것으로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이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체념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며, 아직은 나를 용서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전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의지라는 등불에 때로는 억지로, 또 때로는 강박적으로 기름을 붓는다. 비록 그것이 거창한 것은 아닐지언정 더는 우물쭈물하다가 체념만으로는 끝내고 싶지 않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도 위안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악수 대신에 옷깃을 붙잡고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아등바등할 것이다. 다음 언젠가, 정말 기약 없던 시간이 끝나고 우연히 라도 다시 만나게 될 그때에, 내가 이렇게 노력했노라고 웃으면서 말하고 싶으니까.


나는 실로 윤동주가 싫다. 그러면서 동시에 불을 밝혀, 그에게 다시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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