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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13. 2020

미망 (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음)

죽음은 불시에 우리를 기습하며 그 소식은 언제나 슬픔보다 빠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상상해보기도 전에 그것을 보고 어찌할지 모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핏기 하나 없는 죽은 친구의 얼굴에 손을 가만히 대어 보았다. 차가운 기분과 동시에 죽은 이의 물렁한 살 뒤편으로 딱딱한 광대뼈가 느껴졌다. 대학 시절, 함께 새벽까지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코딱지만한 작은 방 한 구석에서 이불도 없이 잠들었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도 지금도 그녀석은 온기가 없었고 한번 잤다하면 만져도 반응을 하지 하지 않았다. 그때처럼 한 손으로 좀 더 얼굴을 만지고 흔들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의 모습은 편안히 잠든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이었고 그를 언제라도 흔들어 깨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영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하기 바로 직전이 아니었다면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 장소가 친구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만 같았다. 이 추운 장소가 아닌 내 방에서 혹은 술 먹고 뻗은 그 어느 날의 어느 따뜻한 친구의 방에 있다면 그는 언제 자신이 술을 마셨냐는 듯 아침에 일어나 우리에게 우스갯소리를 건넸을 것이다.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개구리가 실수로 따뜻한 햇살을 받고 긴 잠에서 깨어나듯 그 따스한 분위기만 있다면 그는 다시 깨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을 보며 울음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했고 생소했다. 죽음이 잠과 같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통곡을 했다. 친구를 수의로 싸매면서 통곡의 소리도 더 켜졌다. 나 역시 울었다. 그러나 그 울음이 진짜 슬퍼서 우는 것인지, 마치 전염처럼 모든 사람이 울기에 나도 우는 것인지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울음을 터뜨릴 때면 이것이 정말 슬퍼서 우는 것인지, 울면서도 잘 모를 때가 많았다. 울고 있으면서도 울음은 단지 그 타이밍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손바닥을 치면 ‘탁!’ 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그저 그 타이밍에 그런 소리가 나와야 적절한 것이기에 우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와 싸우다가 울 때도 머릿속에서는 ‘왜 지금 소리 내 울고 있지?’라는 궁금증이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아픈 것도 이내 가셨지만, 울음을 멈추진 않았다. 반대로 사람들이 즐겁게 떠들며 웃을 때, 혹은 부모님이 보내는 미소 가운데에서 나는 따라서 반응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전혀 그것들은 웃기지도 미소를 지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른 표정을 지어주길 원한다면 웃다가 언제라도 표정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날이 감정에 대해 이처럼 의심이 쌓였지만,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정을 속여야 했다. 아니 사실 내 감정을 속이는 것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도 ‘울다가 갑자기 웃으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문득 눈앞의 사람들이 우니까 나도 울어야 한다는 것이 조금 짜증이 났다.

죽음은 사실 그리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친구가 버젓이 누워있는 순간에 뭐가 그리 슬픈가? 오히려 전개가 빠른 신파극에서 나는 눈물을 더 많이 흘렸고 더 슬퍼했다. 극적으로 죽어가는 이들, 헤어짐을 겪고 아파하다가 운명처럼 재회하는 연인들의 모습에서 슬픔과 감동을 발견했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은 그리 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시간 누워있었을 뿐이었다. 죽음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보여주는 2시간 남짓의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교적 지루한 일이었고 이따금 억지로 지루함을 숨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울음이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나의 울음은 그의 죽음 앞에서 터트리게 되었다기보다 그의 죽음을 보며 비통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 터져 나왔다. 검은 상복을 입은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흰 머리는 이내 저곳에 누워있는 친구를 나로 변신시키며 그의 어머니의 얼굴은 내 어머니의 얼굴로 바꿔버렸다. 가슴을 두드리는 그의 어머니의 몸짓을 보면서 나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내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그 순간 이 모든 것이 내 어머니를 떠올리기 위해 마련된 무대였고 그 무대에서 나는 관객이 되어 울고 있었다. 누구보다 큰 소리로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통곡하는 나를 보면서 누군가 따스한 손길로 등 뒤에서 어깨를 꼭 잡아주었다. 나는 내 거짓이 들통날까 더 크게 소리를 내 울었다. 그렇게 울다 보니 이제는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에 찬 울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은 우는 척하는 내 행동 이후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그러했다. 재미있지 않아도 재미있는 척 행동을 하면 재미있어졌고 슬프지 않아도 슬픈 척하면 시간이 지나고 슬픔의 감정이 들었다. 그 감정이 들고서는 '내가 즐거워하는 건가? 내가 정말 슬픈 건가?' 라는 질문이 그 뒤를 따랐다. 어떤 경우에는 슬픔의 감정에 앞서서 지금이 슬퍼해야 할 타이밍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입력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적절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해지기도 했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강하게 감정을 어필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 정말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을 때조차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그 일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이건 잊지 못할 일이 되겠구나!' 친구가 누워있을 때 친구의 차가운 볼을 만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울음을 터뜨리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사실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극적인 순간 자체는 내가 피하고자 어떻게든 몸부림치더라도 잊지 못할 단 하나의 기억으로 남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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