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장의「비추천」과 어느 권력자 / 민주화와 노무현.
나의 일상 여행기. (23)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주를 시작하고자 했으나 확고한 마음가짐이 없어서인지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정말 아침 운동을 다시 모집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특히 연구실 일 때문에 오늘 영어 모임에 참여가 어렵다던 정현 씨의 문자 탓에 더 아침에 움직이기가 싫어졌다. 오늘은 영어 모임 참여자가 정현 씨뿐인데, 그마저 없다면 스터디룸으로 가서 공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집에서 공부한다면, 분명히 몇 분하다가 포기할 게 뻔하기에 억지스레 몸을 움직여 집을 나셨다. 관인엄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다짐이 요즘 들어 자주 깨지는 것 같다.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질서를 부여하지 않으면 금세 삶에 금이 갔다. 그러한 금들이 점차 넓어질수록 마음에는 조바심이 더 커졌다.
자신의 신체에 엄격할수록 마음의 관대함은 커질 수밖에 없다. 미리 준비되어 있는데 타인에게 관대해지지 않을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관대함은 사라지고 조바심이 앞선다. 아침의 상쾌함보다는 스스로 약속을 저버렸다는 불쾌함이 마음에 남는다. 요즘의 아침은 내 옆에 아무도 없이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는 서글픔과 당장 미뤄도 누구 하나 아쉬워하지 않을 거라는 허무함과 매일 아침 떠오르는 그리운 시절의 옛사람들로 지금의 백수와 같은 선택에 후회감이 밀려온다. 아무리 당당한 걸음에, 또렷한 목소리에, 환한 웃음에 자신감을 부여해도 결국 모든 것이 차분해지는 아침에는 벌거벗겨진 초라한 나의 신체만큼이나 씁쓸한 감정이 전신을 휘감는다.
괜히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전신을 둥글게 말아본다. 몸이 조금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전신의 온기가 얼굴을 통해 전해진다. 그 온기가 조금은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한두 번의 뒤척임을 하고 나서, 꺼놨던 휴대폰의 알람이 한두 번 더 울리기 시작할 때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욕실로 향했다.
스터디룸으로 와서 영어 공부를 할까 하다가 요즘 나에게 가장 우선순위라고 할 수 있는 일기를 작성했다. 글을 쓸 때의 감동은 결코 영어 공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임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이득이 없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온전히 글을 쓰는 데 활용했을 것이다. 그 어떤 시간보다도 내가 온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시간이다.
나의 시간 가운데 진짜 살아있다고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살아있음의 감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하고 그 상층부에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두었다. 이는 생리적인 욕구나 안전에 관한 욕구보다도 상층부에 존재하며 한 인간의 성장을 위한 욕구이다.
지금 사회에서 내가 느끼는 살아있음에 관한 감정은 바로 이런 상층부의 욕구일까? 나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욕구,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는 욕구, 스스로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욕구가 바로 글을 쓰면서 발휘되는 것일까? 혹은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온전히 느끼는 가시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그 두 자아가 서로 다른 하루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이 기록을 통해 깨닫는다. 세상은 다를 바 없으나 나는 매일 다른 생각과 다른 성찰을 한다. 그래서 글은 살아있음을 기록하는 나의 흔적이다.
혼자서 그렇게 글을 썼지만, 다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두고 상윤을 만나 점심을 했다. 오래간만에 먹는 국밥과 순대가 맛있었다. 특히 이곳은 각 지역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고려해 다양한 소스를 제공했다. 전라도의 초장, 경상도의 쌈장, 그리고 소금과 새우젓까지. 인천에서 순대를 먹을 때 초장을 주는 곳은 처음 봤다. 맛도 괜찮았지만, 초장을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밥을 먹고 상윤은 BOGO쿠폰이 있다고 하여 스타벅스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콜드 브루를 시키고 못다 쓴 일기를 써 내려갔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스타벅스처럼 편안하게 있을 커피숍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텀블러와 스타벅스 카드를 활용하면 3,000원쯤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요즘에는 학교 주변에 무료로 이용 가능한 좋은 공간이 있어서 어쩌다 한번 스타벅스를 가지만, 스타벅스만큼의 만족도를 주는 곳은 없었다. '나쁘지 않은 커피와 작업 효율을 높여주는 장소를 3,000~4,000원 정도에 주는 거라면 오히려 그곳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내 인생에 좀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면 약 10만 원가량이긴 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해낼 수 있는 게 많다면 충분히 투자할 만했다.
실제 작업 효율을 높여 줄 수 있는지 스타벅스에 자주 가는 것을 고민해봐야겠다. 돈이 아까운 만큼 더 간절한 마음으로 뭔가를 이룰 수도 있겠지.
일기를 끝내고 '부분과 전체'를 꺼냈다. 책도 이제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디게 읽고 있지만, 적어도 '사유한다.'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으로 읽고 있다. 발췌에 따른 '생각 적기'를 의무화한 것이 주요했던 것 같다. 저번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절대 게으르게 생각하거나 생각하기를 포기할 수 없고 마치 저자와 또는 또 다른 나와 토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전 독서 토론 모임에서 했던 수많은 토론을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이다. 참조를 만들어 다른 책을 찾아보면 다른 저자를 그 책의 토론에 참여시킬 수도 있다. 천재들 사이에서 토론하는 기분은 제법 나를 즐겁게 한다.
이러한 책과 다른 책 사이에서의 토론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과의 토론에서도 내 생각을 자신감 있게 말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미 수많은 천재적인 저자의 책을 보고 함께 생각을 공유하며 토론을 마쳤는데, 이들이 뭐가 무서울까?
내가 고전을 좋아하는 까닭은 현존하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들과 이들의 생각을 무시할 사람은 절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대체로 고전은 최소 한 세대 전의 것이 많아서 때로는 고리타분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의 주요 내용이 아닐지라도 그 생각을 전개하기까지의 생각의 접근법과 과정은 현세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대체로 정교하거나 탁월하다.
고전이 가치 있는 다른 까닭 하나는 넓은 세계에 걸쳐 다수의 사람에게 두루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책의 권위를 만드는 것인데, 수많은 전문가와 사람들과 이미 합의된 권위를 사용하는 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확장된 자기 생각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전은 우리 인류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생각과 질문을 담고 있다. 어떠한 실체나 생각을 저자의 경험과 사유, 그리고 수많은 토론을 통해 자신이 밝힐 수 있는 극단까지 끌고 가고 그 경계 지점에 존재하는 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는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책의 도움을 받아 그다음의 경계까지 확대한다. 그래서 고전은 나의 지성을 시험하는 토론 친구이며 동시에 지적 성장을 위한 선생님이기도 하다.
고전이라고 합의되지 않은 책에도 이런 성격을 가진 책이 존재하나 고전은 대체로 이러한 성격을 가진 책들의 집합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고전은 그저 '오래된 책'이라기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인류가 널리 존속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의미에서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다.
4시가 되어 일전에 면접을 보았던 곳으로 갔다. 그러나 오늘부터 나오라던 현정 씨의 말과는 달리 사장님은 오늘부터인지 모르셨고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현재로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기에, 준비되면 연락 달라고 했다. 이번 주 안으로 다시 연락해준다고는 뱄으나 왠지 느낌은 그 사업을 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창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 작업 공간은 내가 생각한 스타트업답지 않게 도서관에 온 것처럼 조용했다. 스타트업이라고 북적댈 필요는 없을 테고 아무래도 다른 창업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 분위기는 고리타분한 관료제 집단의 조용한 사무실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창조적 생각을 일깨워주려면 작업 환경의 분위기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을 감도는 적막감은 창조적 사고보다도 반복적 업무나 일상적 업무에나 적당할 것 같았다.
다시 돌아와 전에 읽던 책을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에 못 한 영어 공부를 하려고 이북을 켰다. 10분간 그날 단어를 암기하고 20분 동안 영어 방송을 들었다. 공부하는 중에 고혹적인 여성 한 명이 내 앞에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남자 한 명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친구나 동료 사이인 것 같았다. 서로 시험공부를 하는 것 같았고 남자가 여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정면의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측면의 얼굴은 연예인을 해도 될 법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저런 친구와 연애를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얼굴을 가진 사람과 연애를 한다면 내 하루하루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을 감사할 수 있을까?
문득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농담을 잘하던 링컨에 대한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한 숙녀가 숲에서 못생긴 링컨을 만났다. 그가 곰인 줄 알고 놀란 숙녀에게 링컨은 "놀라지 마십시오. 못생긴 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숙녀는 "못생긴 건 당신 탓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얼굴로 돌아다니는 건 당신 탓이죠."라고 나무랐다는 자조 섞인 유머이다.
공부에 집중할 내 신경을 분산하는 저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저런 얼굴을 가지고 집에나 있을 것이지, 이런 데 나와서 다른 사람 힘들게 만들게 뭐람?'이라는 유머러스한 생각이 떠올랐다. '공공장소에 나오지 말고 얼굴을 좀 아껴서 썼으면 좋겠다.'라는 링컨다운 우스개를 잠깐이나마 생각하며 다시 책에 집중했다. 8시가 넘어 커피를 대접해준 윤석이를 위해 컵 밥집으로 향했다. 간단히 제육 덮밥과 치킨 마요를 먹고 나서 헤어지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가려는 길에 영어 복습을 하려 했지만 영진이가 버스 시간이 남는다며 따라왔다. 그와 걷는 동안 학교 게시판의 비추천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비추천 기능은 순기능보다 악기능이 더 많은 장치이다. 어떤 생각에 관한 비판적인 댓글은 그 생각을 적은 당사자나 혹은 글을 보는 제삼자로 하여금 함께 토론하고 생각해 볼 생각을 제공한다. 그러나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받았는지도 모르는 비추천의 기능은 게시판에 자기 생각이 담긴 글을 쓰는 것을 꺼리게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학생들의 전공과 졸업 여부까지도 모두 공개된 경우에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쉽게 표적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추천은 그 글에 대한 판단을 통해 누르지만 비추는 순전히 개인적 감정에 의해 손쉽게 눌러지는 것이다. 비방은 칭찬보다 쉬우며 자신의 정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더더욱 쉽다. 지금의 게시판은 전에 비하여 지나친 개인 정보의 공개와 더불어 비추천 기능 탓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치 있는 글, 자기 생각이 담긴 글, 비판적으로 토론해볼 수 있는 글, 공론장의 기능을 보여줄 수 있는 글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그저 광고와 홍보만 남게 되었다. 논객은 사라지고 그저 무책임한 장사꾼들만 남았다.
비추는 소리 없이 학생을 괴롭히는 폭군 교사나 다를 바 없다. 그 폭군 앞에서 학생들은 몸을 사리고 욕을 먹거나 혼나기 싫어 자기 생각을 거둔다. 전 총장이 행했던 일들 가운데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자유로운 토론의 환경을 부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을 만하다.
영진이와 함께 이러한 전 총장의 여러 업적(?)에 대해 비판을 했지만, 그녀에게 또한 연민도 느낀다. 그녀와 직접 만나보거나 또는 서신으로 그러한 그녀의 외골수적 생각을 비판하고 토론했지만, 어쩌다 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의 말이나 학교의 환경 개선을 위한 여러 실천적인 행동 속에서 또한 얼마나 학교와 학생들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나쁘게 평가하자면 재단과 정부에 '자발적 굴종'을 한 것이고 좋게 평가를 하자면 '실용주의' 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재단이나 교육부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한 행동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재단과 교육부와 싸워서 학교에 도움이 되기보다 차라리 그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학교가 얻을 수 있는 자원을 얻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장에라도 망할지 모르는 최하 등급의 채권에 백억이 넘는 재단 전입금을 투자한 것과 재단 이사장이 10여 년 만에 졸업식 연사로 방문한 것, 그리고 교육부의 핵심 지원 사업을 위해 교육부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고 학교를 수술대 위에 세워 소위 취업이 잘 안 되는 과들을 잘라버리려고 한 것을, 바로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그녀가 학생을 생각하는 것은 그 어떤 총장보다도 나았다. 다만, 방법이 잘못되었고 시기가 잘못되었고 자기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않으려던 태도가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그녀가 사태를 이렇게까지 만든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며 동시에 학생들의 공론장을 파괴했다는 측면에서는 화가 나고 미워하고픈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민의 감정이 드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분명히 그녀는 권력욕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의 동문으로서 학교와 학생들을 진심으로 생각한다고 여겨지는 진정성 또한 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영화 '미성년'에서 염정화의 기도처럼 한 사람을 평가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우리 사회에서는 순수한 악인도, 순수한 선인도 좀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내게는 총장 역시 그렇다.
영진이는 '1987년'이라는 영화를 보고 내게 그 영화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싸운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주나, 우리 아버지와 같은 그 시대를 살던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했다. 아무래도 그 영화 자체가 87년 서울 항쟁에서 이한열 열사와 서울대와 연세대를 필두로 한 서울역 진군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야기하고픈 바에 대해서는 이해를 했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민주화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엘리트로서의 학생들과 그 반대편에서 또한 우리 사회의 산업화에 기여한 노동자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와 정확하게 대치되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천만 영화인 국제시장이다. 천체 인구의 1/5 가량이 본 영화들의 경우, 그 영화가 사회 현상을 반영한다고 하여 평론가들도 조금은 특별하게 다루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한집안의 장남이고 가장이며 아버지인 인물이 6.25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살아온 고된 과정을 다룬다. 이러한 영화를 통해 감독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다루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를 관통하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민주화 운동과 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는 산업화에 기여한 아버지를 다룰 뿐이지 민주화에 이바지한 아버지와 학생운동에 가담한 자녀와의 통합을 보여주지 않는다. 민주화, 엘리트로 귀결되는 젊은 세대의 학생과 산업화, 비엘리트로 귀결되는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은 자식이 성장한 90년대 이후에 티격태격하는 모습과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여 자신의 그리운 아버지를 회상하는 모습에서 잠시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겪는 세대 간 갈등, 산업화에 노력한 이들이 뒷방 늙은이로만 전락하고 민주화에 기여한 엘리트 학생들이 그 산업화의 달콤한 열매마저 차지했다는 서러운 한탄이나 반지성주의 시각일 수도 있다.
가장 천한 죄수이며 노동자이며 노인이었던 장발장이 지성인이며 젊은 ABC의 벗들과 민중을 위하여 함께 싸우던 장면과 같은 것을 영진이는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에서 레미제라블과 같은 모든 통합과 화해를 기대할 수 없으며 그 책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책이 그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두껍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그러한 인물들이 존재하며, 이들로 하여금 진정한 한국식(?) 촛불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어쩌면 빅토르 위고나 프랑스 대혁명을 우리가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바로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인물이 우리의 역사에 실존하기 때문이며 그들을 계승하는 민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이 여러 지역에서 학생과 시민이 뭉쳐 싸운 이들이며 그들을 계승한 전태일이며, 또한 노무현이다. 지금 사회의 주류 세대의 민주주의가 광주와 전태일에게 빚을 졌다면, 그 세대를 포함한 우리 대한민국의 거의 전 세대는 노무현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영진이의 말처럼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고 노동자였으면서 자력으로 판사가 되고 이후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한 노무현은 산업화 세대를 대변하면서 동시에 지식인을 통합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시민이 말하는 노무현이라는 영상을 보면, 그가 지지하고 나선 까닭에 대하여 영진이가 영화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을 정확히 꼬집는다. "재야의 운동권 선배들조차 노무현을 고졸이라며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나도 서울대 출신이고 잘났다는 말을 듣던 사람인데, 노무현 밑에서 확실히 들어가서 그 사람을 위해 일할 의사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노무현은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췄고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라는 내용이다. 그가 볼 때, 노무현은 ABC의 벗들과 함께 민중을 위해 함께 싸우고 자신을 희생한 장발장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그 이후 세대의 사람들에게 군부 독재의 독재와 폭력에 항거하는 힘을 실어 줬다면 그는 우리가 단합하여 더 좋은 민주 사회를 만들어갈 힘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단합된 힘!"이라던 그의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얻은 민주주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화문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나는 촛불로 세운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랑스러우며 이 민주주의를 세우기까지 희생한 수많은 이들을 기릴 것이며 다음 세대에게 더욱더 값진 민주주의를 전달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