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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02. 2020

어느 게시판의 취업 글을 보다가

어느 게시판의 취업 글을 보다가 그냥 끄적 댄다.

취업 컨설턴트라는 사람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경험을 회사의 비전에 맞춰 써라.'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최선봉의 집단인 회사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비전을 추구하고 그에 따른 존재 목적을 찾았는지는 의문이다.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회사가 부정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자신의 부를 물려주고 아들의 아들은 미국 원정 출산으로 미국 시민권을 따는 세상에서 기업의 비전은 단지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회사는 총수나 일부 몇몇 재벌 일가로 구성된 곳이 아닌 집단의 가치를 함께 공유하는 곳이라고. 그러나 그 집단의 구성원 대다수는 그저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것뿐이지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을 보고 감동하고 일의 가치로 추구하진 않는다. 아니 많은 수의 구성원들은 기업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그 목적에 맞추게 된다.

바로 돈. 이윤이 그것이다.

결국, 기업의 비전은 자신에겐 거짓이 되고 그저 기업 밖의 사회 구성원들을 현혹하는 연기가 된다. 또한, 사회조차도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와 실제의 삶이 다른 것처럼 기업이 추구하는 것들이 그것이 전형적인 드라마라는 것은 알면서 너무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만 않다면 그것을 묵인해준다. 그러니 드라마 속의 구성원들도 드라마에 따라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직장과 직업이라는 드라마의 작은 자리라도 얻으려고 많은 이들은 채용 과정부터 연기를 배우고 몰입한다.

연기의 최고봉은 아마도 메쏘드 연기가 아닐까 싶다. 현실의 나와 드라마 속 가상의 내가 구분되지 않는 경지. 취업자들은 드라마의 이상을 좇아 자신의 삶과 경험을 가상과 뒤섞어 메쏘드 연기를 한다. 그리고선 드라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부터 낙찰! 물론 여기서도 낙하산이나 아이돌은 있다.

취업 과정 속에서의 나라는 존재의 연속적 경험을 기업의 비전에 맞춰 재해석해내는 일은 그나마 괜찮다. 드라마가 어떤 연기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재해석의 묘미는 역설적으로 드라마를 통해 현실의 나를 재해석하는 상호 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이다. 연기 연습과 캐스팅 과정 속에서 존재하던 멋진 작품을 그는 채용 이후에도 기대하지만 실상 촬영하는 건 싸구려 삼류 드라마의 볼품없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이기 때문이다.(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문제가 아니다. 사실 꿈과 희망을 심어준 삼류 드라마 그 자체가 문제다.) 처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왔던 이들도 계속된 삼류 드라마의 무명 생활에 지치고 타성에 젖어 과거의 꿈과 비전은 어느새 잃어버리고 만다.

취업 과정의 기본 전제는 자신이 연기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뽑히기 위해 주어진 시나리오에 맞춰 열정적 메쏘드 연기를 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나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생각해보면, 메쏘드 연기를 하는 내가 진실하지 않다고 말한 인간은 또 누가 있을까?) 채용 담당자는 연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는다. 나에 대한 진실이 곧 연기가 되든, 진실이 사라지고 연기만 남든지 상관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취업을 하고 나면 앞으로 평생을 연기할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싸구려 삼류 드라마든, 명품 드라마든지 간에 당신 삶의 삼분의 일은 기업이라는 드라마 속의 연기자로서 활동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자신이라는 존재를 알아가고 생각하는 순수한 고민을 많은 부분 버려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기업 안에서도 하겠지만, 대개는 지금만큼 순수하진 않을 것이다.)

물 반 컵을 보고서도 물이 반 밖에 남아 있는 않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이가 있지만, 반대로 반이나 남았어라고 긍정하는 인간도 있다고 한다. 같은 현상 안에서도 긍정과 부정은 항상 존재한다.

나는 그대가 설령 '연기가 미치도록 하고 싶다.'라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절망감이나 무력감을 느끼기보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조금 더 늘었어!'라고 긍정을 가지고 살았으면 싶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이유는, 머지않아 떠나갈 이에게 보내는 지금의 위로와 미래의 아쉬움 때문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헤어질 존재들이라는 인식은 현재 눈앞에 있는 이들의 행동을 마치 초당 30 프레임의 연속적 영상에 담긴 순간의 몇몇 프레임 만을 개별적으로 끄집어내어 기억 깊숙이 자동 저장토록 한다.

누군가에 대한 추억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 부분에 담긴 것들은 당신이 내가 소유한 그물 공간 밖으로 떠나지 못했을 때, 아직은 더 저장될 여지가 많아지게 되고 언제까지나 그대의 가까이에서 추억을 저장하길 바라는 이기적 욕망은 그것을 부추긴다.

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보내야 한다는 축복의 천사와 이러한 이기적인 악마가 함께 있다. 그래서 난, 그대들의 취업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다. 기쁨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슬픔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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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세월호를 추모하며,「눈먼 자들의 국가 中 진은영 님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를 패러디함.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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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글을 이따금 살펴볼 때면, 참 여러 주제로 많이 썼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그 시절의 상념들이 아련히 떠오르고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옅어진 감정들이 뒤이어 따라온다.

그땐 그랬지.

그 시절, 그곳에 두고 온 그때의 그 감정을 잠시 떠올리고 이내 현실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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