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리석은 글쟁이를 위한 변명 6.

by Chris

6.


꾸준히 글을 쓰도록 하는 모임을 만든 후 이 어리석은 글쟁이는 지금까지 살면서 갖지 못한 것들을 내버려 두고 바닥부터 무언가를 써 내려갈 준비를 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는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돌아갈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불행해질 거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보다도 그냥 매일 꾸준히 운동하듯 일단은 꾸준히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 어리석은 글쟁이는 어떠한 기교나 배움도 없이 그저 글을 쓰고 싶었기에 처음에는 무작정 글을 썼다. 그 때문에 생기는 여러 문제점도 적지 않았으며,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나의 기법 없는 글솜씨이나 깊이 있는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는 생각들을 보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내가 스스로 작가라 칭하지 못하고 그저 글쟁이일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부끄러움에서 기인한다. 그런데도 내 마음 한쪽에는 그 누구보다도 글에 대한 커다란 열정과 함께 내 글이 언젠가는 온 천지를 개벽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이참에 그의 성향에 대해서 좀 더 말하겠다. 그의 취미는 독서와 노래 부르기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음악을 선호했다. 또한, 노래 부르기를 즐기며 이따금 기타를 치며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따금 이러한 음악을 듣거나 부를 때에는 현실 세계 밖으로 항상 자신을 인도하고 이따금 기억과 본능 속에 존재하는 이면의 세계를 탐구했다.

또한, 모든 고전을 쓴 작가들을 존경하며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정신을 계승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같은 시간 안에 좀 더 가치 있는 것들과 의미 있는 것들로 채울 수 있도록 채찍질했다. 적어도 내가 이룰 것에 관하여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은 언제나 나를 발전시켜왔다. 이것이 어떤 확고한 목적을 갖지 않는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탁월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지향은 언제나 나를 발전시켰기에 이러한 태도와 원칙에 확신이 있으며 힘들 때조차도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수많은 지식을 숭고하게 생각하고 그 지식을 습득하려고 꽤 많은 책을 진지하게 탐색했다. 책도 음식과 마찬가지여서 편식을 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겼기에 좋은 책이라 여긴다면 분야에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 혹시나 자신이 지적 편식을 하거나 좋은 책들을 읽는 것을 게을리할까 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몇 년간 이어나가기도 했다.

한 번은 그런 그에게 누군가 “책을 왜 읽으세요? 그리고 꾸준히 독서 모임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 어리석은 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우리는 세월호 침몰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은 이후였고 졸업하고도 머물고 있던 학교에서는 이런 시기에 ‘축제를 개최해야 하는가?’에 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책을 왜 읽을까요? 혹자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우리가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 없으므로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하기도 합니다. 밥을 먹는 것과 같이 그저 삶의 일부라고 하는 분도 계시죠.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어린 시절을 잠깐 회상해 보았습니다. 당시에 책을 접하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재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고 남들이 안 읽는 책을 읽었다는 우월감에 따른 재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유가 되어 점점 습관처럼 책을 읽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 시절 동안, 책 읽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재미가 있었고 그 안에서 삶에 대한 나름의 의미를 찾았다 싶기도 했죠.

졸업 이후 독서 모임을 진행하면서부터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방향이 이전과 비교하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책 자체에 집중하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책과 사회의 여러 현상 등을 함께 고려해보게 되었죠. 물론 전에도 그런 경험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빈번하진 않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현상들이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죠.

가령, 얼마 전에 이슈화되던 ‘세월호 참사와 축제 개최 여부’와 관련한 논란을 보자면 제가 보는 본질은 ‘공동체 안에의 개인의 행복 추구권’과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연대의식’ 사이에서 무엇을 더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축제를 개최하자는 견해는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연대의식보다 더 높게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었고 반대 관점은 다른 공동체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행복이나 즐거움보다 공동체 간 연대의식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었죠. 다시 말해 두 개의 가치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느냐에 대한 집단 간의 작은 갈등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사회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죠.

사회와 공동체 그리고 도덕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위의 갈등의 본질과 책에 나오는 내용이 같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미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의사 결정권자였던 총학생회를 바라볼 때는 ‘손자병법’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생각나더군요. 영토를 차지하고 다스려야 했던 군주와 학교의 총학생회장과는 같을 수 없겠지만 여러모로 군주의 자질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총학생회에서 딱딱한 글을 보면서는 근래에 읽은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에서 문체나 특수한 용어가 어떠한 목적을 가졌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자주 쓰는 말 중에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게 있습니다. 잘 아시는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는 이 사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더 잘 알고 싶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그래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좀 더 알게 되고 보일 것 같아서요. 그리고 좀 더 알고 나서 보이는 것이 분명 전과 같지 않은 것을 차츰 느끼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 사람은 정말 열심히 독서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앎의 기쁨을 느끼고 사회를 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책 읽기가 지루하거나 공허할 때가 많습니다. 날씨도 무척이나 좋은 날, 혼자 궁상맞게 책을 보고 있다 보면 외롭기도 하네요. 책이 외로움을 채워 주진 않나 봅니다. 법정 스님은 고독이란 ‘옆구리에 스치는 시장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시던데 이래저래 책을 볼수록 시장기는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앎에 대한 시장기도 더 커지는 것 같고 마음에 대한 시장기도 더 커집니다. 알면 알수록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알면 알수록 더 모른다던 여자의 마음과 같네요) 요즘같이 제 머리가 똑똑하고 현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기억력이 전보다 감퇴한 것 같아 치매가 빨리 오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하네요.

사회의 본질 파악, 앎의 기쁨 등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책을 읽는 이유는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읽을 때도 있고 단순히 지식을 얻고 활용하거나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읽기도 합니다. 때로는 단순히 심심해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제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위해서 책을 봅니다. 그러니 어찌 한 가지 이유만 있을까요?

이와 더불어 독서 모임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드릴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다양한 이유에도 책이 마냥 재미있거나 읽을 의욕이 샘솟는 것은 아닙니다. 두껍고 지루한 책을 보면 하품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어떤 경우에는 온종일 책을 잡고 있어도 100쪽 이상을 나가는 게 어려울 때가 있죠. 이게 분명 원서도 아닌 번역본인데 한글인가 싶을 정도의 책들도 있습니다. 번역이 어려운 것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지는 두 번 이상 같은 책을 읽게 되면 알게 되더군요.

‘입에 쓴 약에 몸에는 좋다’고 문제는 이러한 책 중에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가까운 ‘명저’라고 불리는 책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런 책을 대개 우리는 고전이라고 합니다. 그런 책을 본다는 것은 대학 생활 내내 힘든 일이었습니다. 졸업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방법을 깨닫고 독서 모임을 할 수 있었죠.

모임이 주는 장점 중 하나는 어떻게든 책을 읽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발췌와 발제를 하면서 다양한 사례나 같은 의견이나 상반된 의견을 가진 책을 함께 조사하며 읽을 수 있었죠. 덕분에 책을 보다 심층적으로 읽을 수 있었고 다양한 토론을 통해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독서도 마치 운동과 같아서 꾸준히 해야만 차츰 힘이 생긴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혼자 운동을 할 수 있지만 보다 효율적이고 재밌게 하려고 헬스장이 존재하듯 독서 모임을 통해 함께 책을 읽음으로써 책 읽는 재미를 좀 더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제가 독서를 하고 더불어 독서 모임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는 지적 희열감으로 몇 년 동안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이끌어갔지만, 모임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글을 쓰는 시간을 방해하자, 모임을 계속 주도하여 운영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해진 독서 모임이 이제는 어리석은 글쟁이가 해야만 하는 일인 자신의 글을 짓는 일의 회피처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는 진정한 예술에 이르는 길은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달리 말하면 일종의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한번이라도 예술적 글을 쓰고 싶었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외로움을 상대하면서 고군분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독서 모임의 준비와 운영은 나의 지적 자극에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글쓰기를 위한 고독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 '독서와 독서 모임이 체력 운동이었다면, 어느 한 분야의 글쓰기는 스포츠이다. 체력 운동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한 분야의 스포츠에서 성공할 수는 없다. 이는 그저 필요조건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시기에 이르자 자신의 분신같던 모임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고 고독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이 있던 그는 점차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모든 것에 무심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무심해지자 그제야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가장 개인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닥부터 무언가를 써 내려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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