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리석은 글쟁이를 위한 변명 7.

by Chris

7.


그렇게 한때 전부였던 독서 모임을 빠져나온 그는 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모임을 빠져나온 뒤에도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애당초 어떤 계획을 갖고 빠져나온 것도 아니고 더는 안 된다는 두려움과 막연한 기대로 시작했던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모임을 빠져나온 채, 한동안 길을 잃은 그는 계속 혼자서 독서를 했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했다. 공간이 바뀌었고 만나던 과거 어느 공간에서 지속해서 만나던 이들을 더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뿐이지 삶은 다를 바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충분한 시간이 생겨버렸기에 읽는 책이 더 두꺼워졌다는 점이었다. 그는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토록 말해놓고서는 그때까지도 살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어쩌면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실로 그러했다. 한참을 글을 쓰지 않음으로써 긴 호흡으로 쓰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글을 쓰자. 매일 쓰고 또 쓰자.’ 마음이 공허해져 모든 다짐을 놓고 싶을 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게을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과거에는 일어나는 시간이 처음에는 아침 7시였다가, 9시를 넘어서더니 어느새 10시를 돌파했고 이따금 오전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는 해가 중천에 뜬 날이면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글을 쓰겠다고 다짐해놓고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버린 것 같아 자신이 한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싶었고 그는 언제나 그렇듯 겉보기에는 글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어리석은 글쟁이의 성장 방법은 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독서도 그러했고 운동도 그러했다. (유일하게 앞서 이야기한 글쓰기 모임만을 실패했는데, 사실 그건 어떠한 강제성도 없었기에 모임이라고 할 수 없었다.)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모임을 만들어 함께 했다. 그는 아침 기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본 적이 있으므로 다시 모임을 조직하고 자신에게 모임에 참여한 사람 모두에게 모닝콜을 보내는 책임을 택했다. ‘그렇게 책임을 지면 깨워주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거기에 더불어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했는데, 그것은 100일간의 인생 계획 프로젝트를 세우는 것이었고 매일 하루를 점검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목표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매일 글을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어쩌면 이것이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르는 지금의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는 그렇게 매일 글을 써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휴대폰 자판을 눌러가며 하루에 떠오른 생각들을 꾸준히 적어갔다. 처음에는 700자, 800자 하던 것이 1,000자를 넘어서고, 2,000자, 3,000자를 넘어서더니 5,000자가 되고 때로는 1만 자를 넘어서기도 했다. 몇 자 쓰지 않을 때는 글에 ‘꽃을 보았다’라고 하는 하나의 문장을 남겼다면, 수천 자 이상을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될 무렵에는 그 꽃에 대한 여러 상념과 추억을 함께 적어나가고 있었다. 5천 자를 넘어설 때는 글쓰기에 다시 자신감이 생겼고 1만 자를 넘어서면서부터는 긴 호흡의 글을 써 내려갈 수 있겠다 싶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부터는 5,000자, 1만 자 쓰기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어떤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한계를 뛰어넘으니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쉬웠다.

그는 자신이 글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이냐를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써서 단톡방의 게시물의 댓글로 올렸다. 한 게시글의 댓글로 긴 글을 붙여 넣다 보니 펼치면 꽤 많은 양이 되었다. 그는 빠르게 스크롤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양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따금 일부러 마치 게임처럼 게시글을 스크롤하며 그 분량을 점검하곤 했고 그러한 사소한 행위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100일 프로젝트가 끝났을 무렵, 그는 매일 아침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글을 하나씩 퇴고하고 정리하여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모임이 끝나고도 자신이 다시 글을 쓰지 않았던 시기로 돌아가지 않게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그는 어떻게든 글쓰기를 놓치지 않도록, 그리고 예전에 내가 이만큼 꾸준히 써왔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계속 글을 정리했고 매일 글을 썼고 블로그에 글을 남겼다. 물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글쟁이가 소설을 쓰도록 만든 요인은 아니었다. 그렇게 써 놓은 글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시답잖은 소설 하나를 써 내려갔다.

소설은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이었는데, 소설적 상황을 구상하며 써 내려간 것이 아니었기에 실재적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혼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두렵기도 했다. 내 삶의 전부를 이 소설에 투영해 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반대로 소설적 삶을 내 삶에 투영해 버릴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일기인지 소설인지 모를 글은 집어치우고, 차라리 살인 사건이 발생하거나 악마가 등장하고 그에게 영혼을 파는 소설이 어떤가? 몰개성적이고 우유부단하며 어떤 소설적 광기도 없는 이 소설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계속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빌어먹을 콘래드(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의 말처럼 예술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가?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엇을 그리고 어떤 진실을 밝히고 있는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글을 내 두 팔은 주문이라도 걸린 양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리석은 글쟁이의 분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소설의 인물은 다른 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나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소설적 그는 내가 창조한 시점부터는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우리 지구 속에 사는 나라는 존재에 영향을 받게 될 다른 차원의 분신이었다. 물론 그 분신 역시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했다. 소설가는 그렇게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사는 자신을 글로써 창조하는 법이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자신의 글로 만들어낸 세계를 진짜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기까지 한다. 필립 K. 딕과 같이 말년에 신비주의적 망상에 빠진 이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한 신비주의적 관념은 필립 K. 딕에게 오로지 의식의 흐름으로만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다소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글들은 뭔가 계시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우습지도 않은 소설에 약간의 면죄부를 주게 되었다. 내가 쓰는 글이 나의 의지와 계획, 구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가 내 오른팔을 들어 글을 쓰게 하셨다!’라는 것이니까. 나는 지금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그림처럼 천사가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하나에서 열까지 다 알려주는 것처럼 그 역시 어떠한 영감이나 계시로 글을 쓴 거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내 손으로 만든 존재이지만, 내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 분신인 존재이다. 마치 마리아의 아들이 오로지 그녀로부터 육신을 얻었을지언정 그녀가 아닌 다른 존재인 것처럼, 내가 그를 낳았지만 그의 정신과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기록으로 그의 자취를 만들어가는 것인가, 그의 자취를 살피고 그것을 기록으로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위에 내가 존재하고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그가 가상의 존재인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실재하는 존재인지도 관심 없었다. 그저 내가 글 속에서 나를 드러냈을 때부터 나 자신 역시 소설의 한 부분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라는 생각을 버렸고 또한 내 소설이 가상인지 실재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일단 쓰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엇도 쓰지 못할 테니까,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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