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말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딱히 그에게 흥미를 끄는 소재도 없었다. 자신의 주변에서 괜찮은 소재를 발견하고자 노력했지만, 딱히 남들과 다른 특별한 소재로 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여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가의 자격이 없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직업을 찾아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장사를 하면 이보다 더 잘할 것 같았다. 더불어 먹고사는 문제도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도 가능하리라.
결혼 적령기가 넘어선 자신이,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무엇보다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이 없기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누군가를 만나지 말자고까지 생각하는 부정적인 생각의 꼬리가 그의 자존감을 바닥 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겉으로는 명랑하고 힘이 넘쳐서 누구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도 사랑의 구걸 따윈 포기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며, 그냥 있는 싸가지대로 살자고 마음먹은 이후에는 사라졌지만.
여기서 어리석은 글쟁이가 된 최초의 동기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지금까지 썼던 것보다 좀 더 앞 장의 이야기이다. 어리석은 글쟁이가 어떻게 멍청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떤 환각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는가? 현실적이지 못하며 재능조차 없어 보이는 수많은 이들이 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머무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굶주려가면서도 왜 그 일을 놓지 못하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어떤 감격과 환희를 맛보았기에 내일이라도 꺼져버릴 불씨 따위에 희망을 걸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부디 그와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서이다. 혹은 그와 같은 사람이 혹시라도 또 있다면, '비슷한 희열을 겪어서 이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었구나!'라며 위안을 얻기를 바라서이다.
그도 사실은 평범한 직장인을 꿈꾸던 학생이었다. 그는 자기 일에 자신감이 넘쳤고 가까운 이들은 그가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그는 줄곧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다. ‘이것이 과연 나의 인생인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래 나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도 받고 자신의 삶에도 만족은 했지만 공허함은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우연히 누군가로부터 원고를 청탁받아 글을 쓰게 되었다. 독자 오피니언 같은 것이었다. 그는 다른 일 때문에 바빴지만, 그럼에도 저녁에 시간을 내어 글을 썼다. 그는 그때의 글이 무엇인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의 느낌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타이핑을 하는 중에 마치 환각과 같이 하늘은 나는 기분을 느꼈다. 어떤 작가들은 이따금 글을 쓸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낀다고 하는데, 바로 그가 그랬다. 온몸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나는 기분이 들고 오로지 자신의 손과 모니터 앞의 자판만이 지면에 붙어 이어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골똘히 생각하고 그 생각이 손으로 전달되어 자판을 누르는 여러 과정이라기보다 두뇌에서 키보드로 데이터가 바로 전송되는 느낌이었다. 육체를 이탈해서 영혼이 하늘을 떠 있는 느낌은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그 글은 많은 이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받는 글이 되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그의 손에 주어진 원고료는 지금까지 그가 받은 그 어떤 돈보다도 값지게 느껴졌다. 글을 쓰면 돈까지 생긴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순간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는 기분이었다. 작가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기분만 생각하면 미칠듯하게 짜릿했다. 이러한 순간을 한 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운동을 다녀온 어느 날 저녁, 그는 문득 나이 마흔 즈음에 대중 앞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을 앞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어떤 멋진 글을 써서 상을 받고 대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 자신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마치 이룰 것 같은 환상, 실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가시밭길을 조금 걷고 나면 장밋빛 미래가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문제였다. 그 뒤에 있을 고독과 숙고 그리고 늘 자신의 재능에 의심을 품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막연히 잘 될 것이며 제법 소질이 있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느낌만으로 되지 않으며 꿈 뒤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해야 하고 실현 가능한 일들을 계획해야 했다.
돈, 돈! 어떤 작가는 돈은 그다지 필요치 않으며 그저 노트북과 편히 글을 쓸만한 자기만의 공간과 그리고 머리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어쨌거나 지속 가능한 글쓰기를 위한 동기 부여 수단은 많을수록 좋다. 돈도 그중에 하나다. 글을 쓰는 데 돈은 그다지 필요치 않지만, 원고를 청탁받고 글을 쓰고서 받은 그 돈, 그 값진 돈이 주는 느낌이 그를 고무시켰듯 돈은 글을 계속 쓰게 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돈을 따라선 안 된다는 말에는 그도 나도 동의한다. 부자는 돈을 좇기보다 돈이 자신을 쫓게 해야 한다는 말처럼 글쟁이도 돈을 좇기보다 인정받는 글을 씀으로써 돈이 자신을 쫓게 해야 한다. 삶의 활력과 계속된 글을 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는 돈! 그 돈을 계속 받는 글쟁이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그는 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마감 시간이 있고 글에 대한 보상이 있었더라면 그는 어떻게든 썼을 것이다. 사실 글을 쓰기 전에 그런 환경을 먼저 조성했어야 했다. 어떻게든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어야 했다. 스스로 그 어디로도 도피하지 못하게 내 발을 묶어 두었어야 했다. 책임도 의무도 없는 자유는 방종이며 게으름의 다른 이름이다.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았기에 적어도 게을러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유! 그 이름 아래에서 글이 잘 안 써지면 쉽게 도피를 해댔다. 자유가 진정 자유로서 기능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따금 도피의 유혹에서 흔들려야만 했다. 도피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기에 도피는 비교적 쉬웠으며 두 번째는 더 쉬웠다. 책임, 의무, 도피의 제동 장치가 필요했다. 글을 써야 하는 책임, 그것을 매일 써야 하는 의무,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만드는 제동 장치. 작가가 되기로 한 이후 자유로워진 내 삶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와 관련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이 글을 본 독자는 아시겠지만, 글을 쓰는 의무에 대한 도피로 선택한 것이 독서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글쓰기와 아예 상관이 없는 도피처가 아니라 독서라는 글쓰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도피처를 택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것도 그 전과 다르게 고전을 중심으로 보았고 작가적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내가 이 글을 쓴 작가라면 어떻게 썼을 것인가? 어떤 관점이나 마음을 가지고 이런 결말을 지었는가? 시대 정신과 문화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 등등. 마치 기존에는 축구를 시청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축구 선수나 감독의 관점에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독자와 평론가, 그리고 작가를 오가는 일이었다. 책을 그저 즐기고 재미를 느끼는 것에 관해서는 독자적 관점이, 내용이나 형식, 구성을 보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때에는 평론가적 입장에서, 내용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였느냐, 이렇게 쓴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 내용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에는 작가적 태도를 보였다. 마치 형사가 범죄자의 행동을 따라 해보고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거나 혹은 그 자신이 범죄자가 되어 같은 상황에서 형사에게 잡히지 않을 다른 전개를 그려보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상황을 그려보면서 그와 나 역시 글을 쓴다는 범죄(?)를 다시 공모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글을 쓰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려던 행동은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어떠한 압박감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도 여겨진다. 머리를 싸매며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심한 압박감이 결국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좋은 글, 즉 고전과 같은 책들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 돌아서 노력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었다랄까? 자유로운 시간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서 노력한다기보다 매일 즐긴다는 느낌으로 접근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노력에 대한 관점이 차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즐긴다는 말에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운동을 하는 사람이 무거운 물체를 가까스로 들었을 때, 혹은 그러한 과정을 위해 매일 헬스장을 방문할 때, 그는 자신이 고된 운동을 하는 상황이나 그로 인해 몸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즐기기도 하지만, 이는 그만큼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결과이다. 말하자면, 글쓰기에 대하여 노력에 따른 스트레스를 생각하기보다 충분히 즐기기 위한, 혹은 즐거워지기 위한 노력을 기꺼이 감내한다는 말이다. 읽기에 고통스러운 책을 매일 읽으면서도 이렇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매일 상기하거나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이러한 책을 읽고 지적인 즐거움을 느끼거나 혹은 누군가와 독서 모임에서 토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즐거움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 최고도의 몰입은 기진맥진하여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그 희열과 성취, 그리고 즐거움을 못 이겨 기진맥진할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시작하게 한다. 글쓰기의 도피처로 선택한,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독서와 독서 모임이 내게 알려준 것이다.
비록 어리석은 글쟁이일 따름이지만, 끊임없이 글을 쓰는 이 행위를 노력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지적인 자극을 주고 창조를 위한 즐거움의 과정일 따름이다. 비록 그렇게 어리석은 글을 탄생시킨다고 할지라도. 이 어리석음이 끝나면 언젠가 현명한 글이 나오겠지. 그가 바보라면 10번을, 멍청이라면 100번을, 머저리라면 1000번을 즐기면서 두드리면 된다고 나는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를 노력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라고 왠지 한계를 정하는 것 같다.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해 즐길 뿐이다. 즐기는 데에는 그다지 한계가 없다. 단지, 글이 아니라 장편 소설을 쓰기가 어려울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소설 쓰기를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노력이라 생각하면 지금의 나로서는 머리를 쥐어 뜯다가 도망쳐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골똘히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는 것으로, 언젠가는 길을 찾아낼만한 수수께끼와 같은 것, 그것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즐거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은 도저히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찾아낼……. 물론 욕짓거리가 나오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