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을 쓰기로 한 어리석은 글쟁이는 한동안 영감에 따라 떠오르는 글을 계속 썼다. 그 자신이 가장 편안히 쓸 수 있는 공간에 아침 일찍 가서 휴대폰과 컴퓨터, 그리고 때로는 종이와 연필을 활용하여 글을 작성해나갔다. 특히 휴대폰은 글을 쓰기에 적합한 도구였는데, 무엇보다 너무 빠르지 않은 타자 속도로 충분한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매번 틀리는 맞춤법을 고쳐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노트북으로 글을 쓸 때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타자를 먼저 치는 때도 있었으며 연필과 지우개를 사용할 때에는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혹은 번쩍 떠오른 순간의 기억이 멍청한 기억력 때문에 사라져 버려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분량을 고려한 것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일정이 없으면 무조건 글을 썼으며 때로는 책을 읽기 위해 할애한 시간마저도 글을 쓰느라 어쩔 수 없이 미뤄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이것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것은 그 자신이 다시 글을 쓰는데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일 글을 쓰는 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습관화되어버린 한계를 넘어설 필요도 있었다. 시간과 분량을 정해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은 익숙한 습관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매일 꾸준히 어느 시간에 어느 분량만큼의 글을 쓰겠다고 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태엽을 돌려놓은 장난감이 어느 시점에 움직임을 멈추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그도 태엽 장난감처럼 그 시간과 분량에 이르면 더 이상 글 쓸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쉬기를 원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생각이 남아 있음에도 그가 이미 만든 습관과 의지는 남은 일을 내일로 미루었다.
습관으로서의 글쓰기가 익숙해지자 그 고리를 조금은 끊어내야 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의도한 것이기도 하나, 더 많이 쓰고 싶은 욕구의 자연스러운 발현 과정이기도 했다. 글을 쓰다 보니 무한으로 뻗어 나가는 생각을 정리하여 더 많이 쓰고 싶었고 그것을 지면에 담아내려면 이따금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일로부터 시작하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써 내려갔다. 그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실재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연상들, 그 연상이 주는 어떠한 기호와 상징들, 그리고 그 상징이 나와 주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혹은 이러한 상징의 다른 실재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감각기관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그렇게 되자 쓰는 장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집, 커피숍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도 휴대폰 하나로 글을 썼다. 그렇게 쓴 글은 저녁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혔고 묵혀졌다가 다시 수정되어 블로그에 올려졌다.
읽었을 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문맥상 오류는 없는가? 소리 내 읽었을 때 매끄럽게 읽히는가? 인적 하나 없고 그저 수많은 차만 복잡하게 지나가는 어두운 길 위에서 끊임없이 소리 내어 읽고 수정했다. 아르바이트까지 걸어서 가는 거리는 약 1시간가량이었는데, 그곳은 내게 고쳐 쓰는 장소이며 수많은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장소였다. 오가는 2시간 동안 적어둔 글감을 수정했으며, 그날 학습한 것들을 복습했으며, 그리운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으며, 우울할 때 누구 신경 쓸 필요 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고독의 장소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나를 다시 살게 한 장소였다.
가장 개인적인 글들을 그렇게 적었댔지만, 이것으로 그가 풋내기 글쟁이 이상의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뭐, 몽테뉴의 시대였더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겁쟁이였고 자신의 현재 상태와 그와 관련된 미래를 두려워했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그 자신이 먹고살만한 글을 쓰지 못하고 인생을 초라하게 마감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결국 초라한 뒷방 늙은이로 남을 것 같은 기분에,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의 노력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말 것 같은 기분에 두려웠다. 위대한 글이 아니더라도 조금의 재능이라도 있다면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두려움은 노력한다고 하여 완전히 씻기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선택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악화하거나 완화될 뿐이며, 심할 때는 그냥 도망쳐버릴 뿐이다. 두려움은 마주하는 것이다. 글쟁이로서의 두려움은 인정받는 좋은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이걸로는 먹고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이 선택으로 다른 선택에 따른 기회와 행복을 놓쳐버렸다는 후회였다. 그는 어쩌면 글쓰기를 위한 지적 자극이라는 명분 뒤에 만들어진 독서 모임이나 '열심히' 했던 수많은 일들이 어쩌면 그저 '글을 쓰지 못하는 글쟁이'라는 두려움에서 그저 도피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고 몰두할 무엇인가가 필요했기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매일 글을 쓰던 이 시기는 그렇게 도피했던 삶의 방향을 가까스로 틀어, 멀어져 버린 글쓰기에 대한 원대한 꿈을 다시 마주하는 노력의 시기였다. 그러나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그 목표에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났고 머리는 하얘졌다. 가장 개인적인 글을 쓸 때는 상관이 없었으나 그 개인적인 글을 소설 일부에 녹아들게 하거나 괜찮은 소재를 찾아내 긴 소설은 쓴다는 것은 이따금 머리를 쥐어뜯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첫 소설을 쓸 때는 좀 더 철저한 구상이 필요했고 전략이 필요했다. 의식의 흐름에만 맡기면 실험 소설이나 단편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산을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느낌대로 오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 여정은 초심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때의 공포가 트라우마가 되어 다시는 산에 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던 것이었다. 큰 산을 오르려면 큰 방향성이나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의식과 경험, 그리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결합이 되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옳았다. 그 과정 중에 이따금 수풀을 헤쳐야 하고 모기떼의 습격에서 달아나 우회하거나 벼랑을 건너야 하는 모험을 시도하되 결국 발걸음은 산 정상을 향하는 것이 옳았다.
어리석은 글쟁이의 소설은 어떠했는가? 첫 소설을 쓰면서 완성도 못 하고 결국 몇 년간 도망쳤던 까닭은 고백하건대, 나침반도 없이 무작정 산을 오르다가 산 중턱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길을 잃고 망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망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씨발 정말 망했다!' 단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차라리 그것을 인정하고 그때라도 누군가에게 구조 요청을 해야 했는데, 멍청한 자존심 때문에 그저 그 자신을 거기에 가둬놓고 다른 도피처를 찾아 살아왔던 것이다. 그것을 가리려고 현실 세계에서는 '나는 제법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로 눈물의 똥꼬쇼를 해왔던 것이다. 그 와중에 내 부모는 산 아래에서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도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다른 산 꼭대기에서 내가 보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도 즐겁습니다. 나는 삶을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한 친구는 돈을 벌고 다른 친구는 결혼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애를 낳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폭삭 늙어버렸다.
온갖 어리석음은 무엇보다 잘못된 자존심에서 나온다. 자존심에는 생산적인 자존심과 파괴적인 자존심이 있는데, 직감적으로 '망했다!' 싶은데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은 파괴적 자존심이었다. 결국, 망할 것을 아는 자존심, 브레이크 없이 결국 낭떠러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도 소리 지르지 않는, 죽음을 자초하게 되는 어리석은 자존심이다. 이 멍청하고도 어리석은 글쟁이가 그러했다. 하하!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 멘토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고만 여겼던 것……. 자기 자신을 고립으로 만들게 한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덜떨어진 지능 때문일 것이다. 에고(ego)가 문제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나친 자의식 과잉이 문제였을 것이고 열등감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과한 자의식은 태도로, 행동으로, 그리고 말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 앞에서는 그저 '잘 될 거야!'라고 말했겠지만, 그를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와의 술자리에서 그의 과한 에고(ego)를 안줏거리 삼아 웃음거리로 삼거나 혹은 안타까움을 말할 것이다. 결국, 이 고독하고 길을 잃은 상황은 어리석은 글쟁이가 어리석은 에고로 만든 것이었다.
이 어리석은 글쟁이는 자신의 글을 드러내기로 했다. 잘 쓰든 못 쓰든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은 쓰고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가난을, 그리고 수많은 콤플렉스를 숨기는 것 없이 드러내기로 했다. 가혹한 현실은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다. 고통, 고통, 고통! 살을 찢기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살을 메우면서 생기는 고통이 있다. 고통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며 나는 면역과 치유에 따른 고통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더는 나의 자존심과 에고(ego)로 현실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 글을 쓰자, 망하면 또 쓰자, 머저리가 되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쓰자,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무시하지 말자, 나는 낮은 자이며 모두가 스승이다. 몇 번을 되뇌었다.
차라리 내가 술을 잘 마셨다면, 그래서 찰랑거리는 술잔에 눈물을 함께 녹여 말할 수 없던 고뇌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워,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자존심을 놓아두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 내 말을 좀 들어달라고 요구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어깨를 기댈만한 이성이 존재했더라면? 혹은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생겼더라면?
모든 것은 단지 가정일 뿐이다. 아마 이러한 것이 있었던들,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세상의 어떤 알 수 없는 운명의 고리들이 나를 결국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운명 따윈 믿고 싶지 않지만, 우물쭈물하던 그 태도와 행동이 결국 나를 여기로 이끌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내 운명을 이끈 것이 그 무엇이었든, 그로 인해 나라는 작은 세상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지금으로선 끊임없이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비록 위대한 글은 아닐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그러한 글이 탄생하는 운명의 길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노력일지도 모르니.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당신이 떠나기 전에 그대가 보고 웃을 찬란한 꽃이 피어나기를. 그대가 평생을 지지한 당신의 아들이 참말로 옳은 선택을 했다고 기뻐할 수 있기를! 그대는 그전까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나시면 안 됩니다. 그대가 그전에 떠나버리면 나는 눈물로 글을 짓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의 아들은 평생 죄인처럼 당신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하며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을 끈을 쥐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 끈을 조금만 잡아당기어 어리석은 글쟁이가 도달할 수 있는 불멸의 길을 조금만 당겨 주시길! 적어도 내 아비의 끝보다는 먼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기를! 젠장할, 그는 신을 믿지 않는데, 기도 따위를 또다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