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리석은 글쟁이를 위한 변명 10.

by Chris

너에게 오는 사람을 막은 네 잘못이지. 전화기 너머에서 친구는 혀를 차며 글쟁이에게 말했다. 사랑을 알고 성애에 관한 경험이 있어야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거 아냐? 네 글에 진정한 경험이 묻어 나오기 위해서라도 사랑을 어떻게든 해봐야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한 여성의 호의에 대해서 거절했다고 말하니 친구는 안타까운 듯 계속 말을 했다.

적어도 네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너의 사정을 모두 이해하고도 좋아하는 애일 텐데, 너는 왜 그런 기회를 마다하는 거야?

그녀는 외모적으로도 괜찮았고 말도 잘 통하는 편이었다. 이 친구랑 미술관에 가거나 혹은 교양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았고 주관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내게 고백을 했다. 분명히 이 순간을 거절하면 나는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런데도 내 마음은 그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먼저 이야기하건대, 외모적으로 뛰어나진 않았으나 호감이 가는 외모였다. 그럼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아니 여러 이유를 대고 있었다. 그중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고 합리화하는 이유도 있었다. 금전적 부담, 시간적 여유 없음은 현실적이면서 또한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적당한 이유였다. 다른 이유로는 더는 머릿속을 싸매며 혼탁한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마음에서 나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이 주는 환희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경험 역시 해보았기에 가슴을 아리는 그 맛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그토록 갈구하고 외로워하던 폭풍 같은 어느 시기가 지나가고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따위 호감과 사랑의 감정 때문에 내가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 받기를 바라는 사랑을 기대하지 말고 그냥 줘 버리자. 누군가를 의지하려 들지 말자. 그냥 하나가 아닌 모두를 사랑하자. 사랑하자. 사랑하자.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누구를 위하여 꾸미지도 않을 거고 호감을 사기 위해 거짓된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살 거다. 젠장 사랑이 다 무어냐. 갑을 관계, 권력 관계로 종속되어버리는 사랑이라면 개똥이다. 나는 나로서 자유롭게 살 거다. 폭풍이 지나가고 공허해진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던 것이 바로 이러한 마음이었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글을 위해서 사랑에 관한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는 친구의 생각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은 어떤 소재일 뿐이며 그 소재에 관하여 접할 수 있는 것은 비단 경험으로 종속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사랑을 해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랑에 관한 어떠한 경험들을 나도 또한 해보았으며,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때, 그 고사리 같은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나 그 사람의 냄새, 숨결 등은 그 사람의 이미지 일부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따금 연인의 얼굴보다도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이 된다.

그것은 그를 다시 살아가게도 무너뜨리게 하기도 했다. 나도 저 눈앞의 연인들처럼 저렇게 알콩달콩하게 웃음을 짓던 날이 있었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옛 추억에 젖어 들 때도 있는가 하면, 비가 주룩주룩 오는 어느 날 저녁이 되면 외로움에 사무쳐 그 감촉과 숨결이 그리워 못내 슬퍼지다가 술 한잔 두잔 거나하게 하고 새우잠을 청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그 감정을 뒤로하고 이것 또한 지날 것이라고 또한 생각하지만, 반복되는 그 감정의 기복을 생각하다 보면, 눈앞에 만약 그것을 조절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칼을 들어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오로지 흔들리지 않는 이성과 이성이 조절 가능한 감정의 일부만이 그것으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립은 개뿔, 모든 걸 공자님 기준으로 보시면 안 된다니까요. 나이 서른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공자님이나 되시니까 할 수 있는 거고요. 우리 같은 범인은 나이 서른이 넘어도 바람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이고 불혹 같은 소리 하시네요. 그게 한편으로는 얼마나 슬픈 거냐면요. 충동에서 벗어난다는 거, 철이 들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나를 자극하는 그 신선한 모든 것들이 익숙해졌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무감각해진다는 것이기도 하죠. 공자님 저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립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지금도 나의 기초를 세우려는 데 계속 무너지네요.

어리석은 글쟁이는 잠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며 쓸데없는 말로 만나본 적도 없는 이에게 징징거렸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리고 공자님이 말한 기준이 지금 상태 인간의 상이라기보다 추구해야 할 인간의 상태임을 인정하면서도 나 자신이 그 기준에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 같아 서글펐다.

사실, 그는 심지가 굵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따금 자신의 굵은 심지로 인하여 자기 옆으로 다가온 누군가에게 기대기를 어색해했다. 아주 가끔은 기대고 싶은 마음에 기대다가도 상대의 사소한 반응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전보다 더 거리를 뒀다. 거리를 두는 동안 잠깐의 고통은 있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지나갈 일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사랑만이 영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몇 번이고 안도했다. 물론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는 젊은 날에 포기했던 사랑에 대해 아쉬움을 갖거나 혹은 사랑의 환희에 관하여 반드시 써야 할 묘사를 못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리얼리즘 따위는 어느 정도 타협하면 될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저 달이 예쁘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유치한 사랑 타령 따위는 그만하자. 바로 서기 위해서는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어차피 평생 이렇게 지내온 거 어떤 극적인 사랑이 눈앞에 올 것을 기대하고 살지 말자.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네 모습에 구애받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너의 하루가 너 자신으로 가득 찰 수 있게 살아. 너는 행복할 수 있어. 다른 이성이 없더라도 너 자신으로 인해, 너 자신의 내면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로 인해, 네가 뿜어낼 뿐 받을 것 따윈 기대하지 않는 그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저 눈앞에 흔들리는 푸르고도 찬란한 은행나무 잎들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너의 그 에너지로 인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너를 무한히 사랑해.

어리석은 글쟁이는 갑자기 환희에 차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한적한 어느 오전의 커피숍이었지만, 그에게 차마 그만큼의 대담함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고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힘껏 껴안아 주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의 감정이 전달이라도 될 듯이.

그대는 내 사랑이었습니다. 그대 앞에 있으면 눈이 번쩍 뜨이고 그대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내 이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의 웃는 표정에는 나도 행복해했고 그대의 찡그린 표정에는 나 또한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대를 쫓고 있었고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나 자신보다 더 궁금해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그대의 모습을 닮은 누군가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심장이 두근거렸고 혹시나 그대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정신을 차리자고 마음을 먹을수록 정신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안될 거라는 생각, 아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이내 슬픔이 되었습니다. 나의 마음 장치는 내가 조절하지 못하는 신경계처럼 제멋대로 작동하고 있었고 나는 무너져가는 마음을 복구하기 위하여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끊어내야 한다. 나는 다시 내 마음의 주도권을 빼앗아야 한다. 섬세하지 못했던, 혹은 당신을 배려하지 못한 방식의 일방적인 고백은 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함도 아니었고 그저 내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바이러스에 걸린 마음을 부수어버리고 나자, 복구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나 자신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는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라는 긴 이름의 백신을 조금 더 주입하여 작동시켰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백신이 잘 작동하네요. 이번에는 좀 강력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글쟁이로만 남기에는 적당한 양의 백신입죠. 껄껄껄.

그대에게 더는 바라는 것이 없고 미래에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얼굴조차 잊어버려 남은 것은 그저 그대의 희미한 미소, 눈빛, 그리고 햇살! 그것이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그대를 인상주의 미술가의 작품처럼 남겨둘 것입니다. 누군지도 모르게, 그대조차도 모르도록. 다만 어느 추억 속에 남아 있던 그리움의 흔적으로만 남길 수 있겠죠.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 흔적과도 같은 그림까지는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망령이 나타나 나를 미치게 만들지 않는 한, 영원히 그대의 흔적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겠죠. 얼굴을 잊어 보려고 이윽고 이름마저 기억에서 사라지더라도 얼룩의 일부, 그 일부의 일부만 남더라도 그것이 어느 시기에 존재하던 그대의 흔적이었음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시절의 그대는 그토록 강렬한 햇살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에라이! 이렇게 살 바에는 절이나 들어가서 승려나 되거나 교회로 들어가 신부가 되지 그랬어? 그러면 먹고 살만은 했을 거 아냐? 친구는 글쟁이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에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글쟁이지 결코 종교인이 될 수 없었다.그것은 어떤 미련, 모든 것을 다 내다 버려도 쓰레기통 밑바닥에 끈적이는 얼룩처럼 남아 있는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사랑할 것이라는 미련,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서 그래도 남아 있는 헛된 희망. 그 희망을 끝내 버릴 수는 없었다. 그 희망은 그 밑바닥에서 잠복기를 거쳐 백신의 효능이 다하는 날, 다시 마음을 잠식해 들어갈 것이다. 그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기대한다. 카악! 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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