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어떤 조건에서 가장 잘 배양되는가? 그는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매일 손에 놓지 않던 글쓰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하루, 그다음에는 이틀, 그리고 삼일……. 글을 쓰지 않는 기간도 점점 늘어났지만,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횟수 또한 잦아졌다. 글을 쓴다고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내 부모가 내게 하던 말은 현실이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고, 나 또한 이따금 이 말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가지 않는 길은 발을 들여놓으면 어떻게든 그 길을 걷지만, 그 끝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는 주저앉는 법이다. 그리고선 생각하겠지. 나는 무얼 위하여 이 꼴사나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글이 밥을 먹여줄 거라고, 돈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면 돈이 될만한 글을 써. 이따위 꼴사나운 글을 쓰지 말고. 지금의 네 글은 취미 그 이상도 아니야. 내 글은 무가치한 것인가? 어떤 의미나 가치조차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산아가 될 뿐인가? 아니다, 아니야. 너는 노력하고 있고 비록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의 노력이 분명 어느 시기에 꽃 피우게 될 거야. 악마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말고 네 일을 해.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은 성실함이잖아.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솔직해지자. 거짓 없이 고백하거니와 나는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일시적으로는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삶을 꾸려 가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지만, 그 누구, 그 무엇도 한없이 부럽지 않았다. 그저 가지지 못한 것을 일시적으로나마 동경할 뿐이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저 뒤돌아서서 내 길을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마치 주성치의 영화 '서유기'의 마지막 장면처럼 성곽 위에서 사랑싸움하는 연인을 지켜보다가 미소짓고는 고개를 돌려 제 갈 길을 청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지금 삶이 행복한가? 글쎄,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으로선 내 갈 길을 갈 뿐이며 그 안에서 즐거움도 슬픔도 있을 뿐이다.
그는 며칠 동안 글을 쓰지 않으면서 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길이 서역 구만리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곳에 이르기 위해 수없이 여정을 떠나야 했다. 글은 길이었다. 그것도 험난하고 굽은 길이었다. 목적지는 언젠가는 닿을 기약없는 곳이며 어쩌면 내 생애 동안에는 이르지 못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야 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모른다. 그냥 걷자. 그런다고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모른다. 그냥 걷자. 네 글은 취미 그 이상도 아니야. 그래도 걸어야 한다. 네 글은 무가치해. 상관없다. 언젠가는 꽃피우게 될 거야. 피우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그냥 걷자. 외롭지만 그는 그렇게 글로 다시 발자국을 남기기로 했다.
너의 가는 길에 축복 있으리! 나는 왜 신을 믿지 않았던가? 만약 믿었더라면 이 길이 조금 더 수월했을 텐데……. 누군가 높은 곳에서 나의 길을 예언하고 살피고 지켜봐 준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너는 누군가를 만나 경전을 찾기 위하여 서역으로 긴 여정을 떠날 것이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좀 수월했을 것이다. 네 이놈!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이 길에 이르기까지 내가 상징과 은유와 꿈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이 선택을 한 과정이 비단 너 자신만의 우연한 선택이었더냐?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지켜볼 것이며 너의 앞길을 비추리라. 너는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을 감당할 뿐이며 그것이 너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더냐? 네가 힘이 들어 죽고 싶을 때, 돈이 없어 굶을 때, 그때마다 내가 무언가를 통해 너를 돕지 않았더냐? 너는 나를 믿지 않지만 나는 너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너의 부모이며 친구이며 지나가던 행인이며 길가에 핀 들꽃이니라. 너는 나를 믿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오, 주여! 그대시나이까? 그대가 늘 제 곁에 계셨나이까? 나의 부모를 사랑하고 친구를 존중하며 지나가던 행인에게 친절을 베풀며 길가에 핀 들꽃에 미소를 보냈는데, 모두 당신이었나이까? 내가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준 게 바로 그대나이까? 당신은 죽어 정신으로만 남았나이까? 우리의 정신이 정신을 원하듯, 우리의 육신은 육신을 원하나이다. 그대가 한 여성의 목걸이에, 교회당 위에 걸린 십자가로만 남아 있을 때, 나는 그것을 보며 그대가 행했던 사랑의 정신만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거기까지이며 그것이 그대의 존재를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제게 관념일 뿐입니다. 나는 이 길을 결국 홀로 걸어야 하며 관념인 그대가 실재한다고 믿으며 걷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길 위에서 누군가가 건네는 작은 미소나 호의를 그대가 건넨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겠습니다. 나는 그대의 실체는 절대 믿지 않으나 그래도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대를 존재를 믿지는 않으나 그대를 사랑한다니.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이따금 실재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그 무엇인가도 될 수 있으니 모순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마음조차 없이 산다면 삶은 정말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찰 것이었다. 나의 사랑의 범주 속에는 실재하지 않고 또한 있다고 믿지도 않지만, 그 이름과 상징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이 글쟁이는 애당초 어리석은 자였기에 증명할 수 없는 것에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도 없었고 멍청하다 싶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게 흠이 되지는 않았다. '~같이', '~처럼'같이 은유와 상징의 언어는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나는 그 안에서 실제보다 더 자유로웠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믿지 않는 신의 얼굴을 그려 넣고 친구의 호의에 신의 입을, 행인에 미소에 신의 미소를, 길가에 핀 들꽃에 신의 눈과 향기를 그려 넣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믿지도 않는 신은 그곳에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게 된다. 언어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가 글쟁이가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언어로 자신만의 세상을 무한히 창조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에 그 자신이 태초를 규정하고 또한 머리를 쥐어짜다가 결국 멸망시킬 수도 있었다! 그는 시작과 끝을 반복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을 이따금 걱정했고 자신의 고독함을 저주하기도 했지만, 이 길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신과 같은' 존재들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뭐 실제는 아니더라도 그렇게라도 발버둥 칠 수밖에. 아니면 분명 뫼르소처럼 회개하라는 저 교회당에 사는 목사의 목을 붙잡고 소리라도 지를 테니까. 아니면 난 제법 도덕적이니 제 목을 붙잡았겠지. 하하!
그는 어떻게든 길을 걸어야 했고 그 길 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다시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원칙을 정해 쓰기로 정했다. 첫 번째는 매일 한 걸음이라도 글을 쓸 것, 두 번째는 첫 번째 원칙을 절대 지킬 것. 개똥 같은 글이라도 상관없다. 두 가지만 지켜라. 쉬운 일이잖아? 그렇지? 그는 워런 버핏의 말에서 돈을 글로만 바꾼 다음 제법 똑똑하다며 껄껄댔다. 어리석은 글쟁이라 그런지 그는 이따금 유치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도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이야. 첫걸음부터 위대한 것은 없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때에 비로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모든 노력이 위대한 거야. 그러니 너는 처음부터 위대해지고 싶어서 혈안이 되지 말고 눈앞의 한계를 계속 뛰어넘어. 그러면 어느 순간 네가 걸어온 피 묻은 발자국을 보면서 누군가는 너를 위대하다 인정할 테니. 설령 위대하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네가 기억되지 않더라도 슬퍼하지 마. 너의 노력 속에 완성된 스타일과 그 글은 세상에 계속 존재하게 될 테니까. 너 역시 육신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게 되는 거지. 그게 네가 영원히 사는 방법이야.
위대한 조이스 씨는 후배가 되는 어리석은 글쟁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나셨네요, 나도 알고 있거든요? 흥! 이제 막 대단한 원칙을 정했다고 생각하여 우쭐해진 글쟁이는 이미 위대해진 한 선배의 말을 귀담아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장 삶이 배고픈데 이름을 남겨서 뭐하겠어요? 안 그래요, 고흐 형님? 참, 귀때기 고기는 맛있답니까? 왜 귀를 잘라버리고 그래요? 다시 인생을 살라고 하면 그렇게 사시겠어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요? 어차피 짧은 인생, 글 말고 그냥 돈 벌고 잘 먹고 잘살면 안 되었답니까? 오, 주여! 왜 나더러 글을 쓰게 하셨어요? 제기랄! 글쟁이는 반쯤 미치광이가 된 조이스와 피를 철철 흘리는 고흐를 보며 말했다. 붙잡을 건 주님밖에 없었다. 심정으로는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 은혜를 받고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모두 지워버렸다.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불행하다고 생각진 않잖아? 오히려 행복한 편이지. 그래도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으니까 말이야. 비록 먹고는 살아야 하니 조금 타협은 했지만, 그래도 굶진 않잖아? 배고프지도 않고 따뜻한 방도 있잖아? 구걸하지도 않잖아? 그럼 행복한 거지.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통 안에 편히 누워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디오게네스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했다. 너는 지금 글을 쓰기 위한 최상의 조건에 있어. 네가 게으르지만 않다면 글을 계속 쓸 거야. 게으르면 또 어때, 잠시 쉬었다가 다시 쓰면 되는 거지. 돈 벌려고 글을 썼던 거 아니잖아? 그냥 써 그럼. 배고프면 밥을 먹고 또 쓰고 쉬었다고 쓰고 싶으면 또 쓰고. 너는 누구보다 최고의 삶을 사는 거 아니냐? 어차피 묶여 살지 않으려고 선택한 삶! 네가 선택한 길 외에는 다 무가치하게 살아. 미치거나 미련하게 귀때기나 자르지 말고.
그에게 우리 예술가 형님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은 저 사람도 미쳤으니까. 그는 문득 미친 사람들이 부러웠다. 자기도 조금만 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리슬쩍 책상 밑의 좁은 공간에 들어가 디오게네스처럼 몸을 웅크리고 책상 아랫면을 바라보았다. 등에 닿는 시원한 느낌과 웅크리면 몸이 딱 맞는 느낌, 그리고 조금 습한, 합판에서 나는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좁은 공간에 들어가길 좋아하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졸음이 와 그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디오게네스는 개 선생 학파라고 할 게 아니라 고양이 선생 학파라고 했어야 옳다. 좁은 구석을 좋아하는 도도한 고양이야말로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지 않은가? 안 그렇소? 소세끼 선생? 말해보시오. 그대가 옳다고 인정해주면, 내 일본 작가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대는 좋아해 보리다. 내 말에 동의하면, 내 일본어를 못하니 그냥 꿈에서 한번 나타나 '야옹'하고 한번 짖어만 주시면 되오. 제발, 발정 난 고양이처럼 울부짖지 말고 고상한 철학자처럼 체통을 지켜 "야옹"하고 울어주시오.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