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를 계속 글을 쓰도록 하는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도 왜 그는 꾸준히 써나가는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친다고 하더라도 수명은 줄어갈 뿐이며 그럴수록 한계만 직면할 뿐인데도 왜 쓰고 있는가?
어쩌면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아마 한 번이라도 돈의 기가 막힌 맛을 알았더라면, 돈을 벌었을 것이다. 이성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했더라면 많은 시간을 여자에 쏟았을 것이다. 종교적 환희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종교를 따랐을 것이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서번트를 가진 바보처럼 어느 한 분야에만 몰두하고 다른 것들에는 등한시했기 때문에 다른 건 어떻게 할지 몰라 글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규칙적으로 밥을 먹는 것처럼 때가 되면 글을 쓰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계속 글을 쓰고 있는가가 아니라, 너희는 왜 글을 쓰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내 부모는 먹고살아야 하니까 글을 쓰거나 책을 볼 시간이 없었다. 내 친구는 일하고 여행을 가고 여자를 만나야 하니까 계속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고 나는 글을 계속 쓰는 것뿐이며, 하는 일의 차이일 뿐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꾸준히 하는 일들을 돈으로 받고 일부는 즐거움으로 환산된다. 나는? 나는 무엇으로 환산하고 있는가? 정신적 만족감? 아마 그것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무엇이 그를 계속 글을 쓰도록 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몇 번이고 던지고 있겠지.
무언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와 쓰던 글을 급히 덮고 책을 편다. 어디 어디 추천 도서, 고전 100선 같은 곳에 이름을 올린 책을 보고 발췌를 하면서 그 밑에 내 생각을 그보다 더 길게 넣는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채, 이 시끄러운 커피숍 안에서 나는 그렇게 그 작가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 대화에는 그 작가가 언급한 어느 부분에 관한 내 생각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이따금 그 글에서 느껴지는 어떤 선율이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나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것이 애간장을 녹이는 슬픔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애간장을 녹이는 슬픔을 적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미술 작품에서 느껴지는 색감과 비슷한 색으로 나만의 작품을 꾸며보는 것이다. 혹은 이따금 구조를 비슷하게 설계하고 전혀 다른 색으로 칠해보기도 한다. 이는 마치 어떤 레고 작품을 어느 수준까지 분해하여 다시 조립해보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어느 어리석은 글쟁이가 남의 글을 가지고 노는 일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만들어놓은 글과 대화하거나 부수고 여러 형태로 만들거나 비슷한 느낌으로 재조립해보거나 혹은 그도 아니면 그냥 쓸데없이 떠오르는 부수적인 생각들의 찌꺼기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 보는 것. 의식의 흐름대로 뻗어 나가는 생각들을 주저리 적다 보면 수년 전에 읽었던 책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다른 작가를 불러 이 작가에게 소개해주는 게 된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데, 저 작가는 저런 식으로 말하네요. 저는 두 말이 결국 같은 말 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제 생각은 여기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그러고선 나만의 생각을 덧붙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저 위대한 작가들 사이에 껴서도 쫄지 않고 한마디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위대한 책을 봐야 하는 까닭은 그 작가들이 위대하기 때문이며, 그들과 대화나 토론을 한다는 것은 나의 지적 성장을 높여주는 것이다. 너의 학벌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너의 친구와 지인의 학벌이 무엇이든 지적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전 시대에 걸쳐 가장 똑똑한 친구들이 그들의 생각을 집약한 책 속에서 너와 지적 토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니까.
책 속에서 위대한 작가 친구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다른 위대한 작가를 불러와 생각을 듣고 어리석은 내 생각을 적는 그 몇 시간 동안에, 이 어리석은 독자는 더디게 읽은 것에 조바심을 느끼다가 동시에 자기가 써 놓은 글들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며 더 읽을지 말지를 고민한다. 책을 더디게 읽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가?’ 하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실재하지 않지만 위대한 생각을 하는 그들을 몇 시간 동안 불러내는 것이 위대하진 않지만 내 생각을 귀담아 들어주고 실없는 농담에 웃어줄 이성을 만나는 것보다 나은 일인가?’ 나에게 부귀영화는 실재하는 이성이다. 슬픔에 무감각해져 있는 나를 말없이 안아주는 이의 존재가 이 책 속의 유령들보다 낫다. 나는 그녀가 없으니까 위대한 작가를 꿩 대신 닭으로 만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위대한 작가들이여, 나는 그녀를 만나면 당신들은 뒷방 늙은이처럼 꽂아둘 거다. 그리고 먼지가 꽤 쌓일 때쯤이나 되면 그대를 다시 찾겠지. 나는 그럴 거다. 내 고독을 씻어낼 사랑이 더 중요하니까. 내가 그대들을 뒷방 책꽂이 속으로 밀어 넣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대들보다 위대한 사랑을 찾은 것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게. 당신들을 이따금 들춰보며 추모 정도는 해줄 테니. 그대들이 유령이 되어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면, 아마 이해하고 축복해줄 것이다. ‘그는 고생했으니,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어!’라며. 사랑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는가? 사랑하지 않으니 글을 쓰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으니 운동을 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니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대를 위해 좀 더 책임감 있게 글을 쓰고 그대를 위해 좋은 문구를 찾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그대를 위해 아프지 않도록 운동을 할 것이다. 사랑한다면, 나보다 더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 모든 삶의 이유가 사라져 끝내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갈 단 하나의 불씨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변할 게 두려워 어디선가 있을 그대를 찾지 않는 것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글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사람을 만나러 갈까나. 책 안의 위대한 유령들을 사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90년대 초 유행하던 귀신과 사람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던 중국 무협 영화처럼 노력해도 결국 일방적인 사랑으로 끝이 난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글을 쓰고 남의 글을 읽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따금 외로우면 친구와 동생에게 연락하고 또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복잡할 대로 복잡하던 어제까지의 삶은 이제 단순하다. 그 많던 사교 활동과 친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러 연락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실로 평온하다. 언제 넘실거릴지 모르는 저 매혹적인 파도만 빼면.
어리석은 글쟁이는 자신을 보며 웃고있는 푸르고 하얀 파도를 바라보다가, 저 파도를 즐기기엔 나이를 먹었다고 변명했다. 슬프게도 파도는 언제나 그렇게 어리석은 글쟁이를 유혹했기에, 저 파도가 내게로 올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든 넘어서 이쪽에 스며들기를 내심 바랐다. 마치 금기에 대한 유혹처럼.
오늘도 저 푸르른 파도가 넘실대다가 가슴 안쪽까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둔 방파제를 조금씩 넘어선다. 간신히 막아서지만 내 마음의 방파제를 적시고 이따금 넘어오는 것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결국, 풍랑이나 해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면서.
그는 부처와 예수를 마음의 한 자리에 두고 동시에 충동과 본능의 야수를 감추고 있다. 부처와 예수가 잠들고 늑대가 울부짖을 때쯤이면 야수는 감시의 틈을 몰래 빠져나와 내 행동에 관여한다. 참을성을 잃게 되고 쌓아오는 모든 고매한 가치가 무너져버리는 순간이다. 한 인간에게는 진짜 비극이 탄생하게 되고 모든 자아를 벗어던진 욕망의 예술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순간이다. 진짜 예술가는 이것조차도 눈을 들어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동틀 무렵이 되면, 다시 이성을 되찾고 벌거벗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이드 씨는 그렇게 지킬박사가 되어, 그를 깊은 어둠에 또다시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