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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Oct 16. 2020

'주짓수'라는 간판을 보며

나의 주짓수 도전기 24.

주짓수 한 타임을 끝내고 도장에 남아 1시간가량 개인적인 운동을 하고 나서 길을 나섰다. 30분 가량을 걷다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릴 즈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 '주짓수'라 쓰여 있는 다른 도장의 간판이 보였다. 그 단어 하나에 몇 개월 동안 계속 주짓수를 즐겁게 해온 시간들이 흘러들어왔다. 처음 그 사람에게 주짓수를 안내받을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3개월 등록했을 때, 같이 운동하는 걸 어색해하던 때, 좋은 사람을 만나 같이 훈련을 하고 처음으로 롤링을 하던 때, 주짓수와 관련한 기록을 남기자고 마음을 먹고 글을 쓰기 시작한 때, 그리고 지금……. 체력을 기르는 것도, 기술을 배우는 것도, 그리고 누군가와 옷깃이나 소매를 맞잡고 웃으면서 대련을 하는 것까지 모두 즐거웠다. 운동을 하면서 뭔가 함께한다는 느낌이 든 것이 얼마 만인가? 어쩌면 나는 지금껏 운동하는 순간에도 외로웠나 보다. 그 점이 제일 좋았다.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또한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게. 허튼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매일 보는 상대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눌 수 있음이 좋았다. 나를 따르는 동생이 있어서 좋았고 내가 따르는 선배들이 있어서 좋았다. 나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좋았다. 내가 조금이나마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마음이 답답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매일 그곳에 가서 지칠 때까지 운동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날의 답답함이 물러갔다. 답답함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 갖지 못하는 욕구, 억지로라도 생각해야만 하는 고통, 그 모든 것들의 종합이었다. 그것들 속에서 제법 분명한 길이 있다는 것만큼 즐거운 건 없었다. 글쓰기나 책 읽기는 끊임없이 생각하거나 없는 생각을 만들어내야만 했고 인간관계는 그 마음이 준 만큼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운동은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누군가가 일러준다는 것이 정말 편했다. 시간만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면 되는 일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었다. 이러한 복은 직업에 얽매여 있지 않은 나로서는 스스로 고민하여 만들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여가와 업무 시간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지 않기에, 한번 나태하게 되면 끊임없이 소비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한 삶을 조금이나마 막아줄 수 있는 시간이 현재로서는 바로 도장에 있는 시간이었다. 특정 시간에 반복적으로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나태함을 막아주고 다시 올바로 살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더불어 또 다른 한 가지 복은 꾸준함에 따른 성취감이었다. 동생은 몇 시간 동안 운동하는 것보다 조금씩 매일 운동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경험상으로도 그랬다. 반복을 통한 습관화는 그 행동이 익숙해진다고 하더라도 다른 강한 유혹이 눈앞에 있거나 매일 눈에 띄는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상 쉽게 포기하게 된다. 그 습관화를 잘 만드는 사람은 과거에 그런 반복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얻었던 사람이거나 혹은 그냥 아무 생각 않고 매일 때가 되면 하는 우직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운동을 통해 내 미래의 경제적 이득이나 사회적 지위 상승을 기대하지 않는다. 신체적 이득을 많이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반복을 통해 과거에 경험했던 한 분야의 작은 성취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저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라고 바닥에 깔려 허우적거릴 때마다 생각하지만, 저 수많은 선배가 그런 고민 속에서 띠를 얻고 모두 성장했다는 사실에서 나 역시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될 것이라며 안도한다. 거기에는 두 가지 확실한 조건이 있다. 첫째는 내가 저들보다 지능 면에서 뛰어나진 않지만, 결코 뒤지는 것도 아니라는 믿음의 조건이다. 이따금 몇 번이나 기술에 관한 설명을 들어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거나 전날 가르쳐 준 기술조차 까먹어 어쩌면 ‘돌머리가 아닐까?’ 라며 자책하는 순간에도 '나의 지능이 결코 평균에서 멀지는 않으며 그렇기에 저들이 할 줄 아는 것은 내가 못할 리는 없다'라는 믿음을 갖는다. 둘째는 신체 조건에서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체력적으로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아니라 결국 이들과 나의 차이는 기술의 숙련도 혹은 얼마나 오랫동안 진지하게 수련해 왔는가의 차이임을 이따금 나의 얄팍한 기술과 방어가 제대로 사용될 때 깨닫게 된다. (물론 엘리트급의 선수 수준이 아니라 생활 체육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 속에서 대련을 마치고 땀에 젖은 도복을 벗으며, 언제나 ‘나는 성취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되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것에게도 동시에 질문을 던지도록 한다.

확실히 보이는 띠의 성취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능력과 기술의 성취, 띠는 외적인 성취를 보여주며 수많은 기술의 숙련도와 그것의 적용은 내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이 두 훈장은 상호작용하여 끊임없이 목표의식과 동기를 부여한다. 그냥 단기간의 성취로 끝나버리는 자격증과 같이 성취 후에는 허무함마저 남는 성취도 아니고 헬스처럼 꾸준히 하다가도 오랜 기간 손을 놓으면 사라져버리는 성취도 아니다. 띠와 기술 능력은 이 둘을 보완한다. 물론 띠의 최종 단계인 블랙 벨트에 이르면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다. 어느 분야에나 마스터는 존재하는 법이며 그 단계까지 간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초급자인 내게는 그 마지막은 보이지도 않는 아득히 먼 미래일 따름이다.

이 주짓수를 취미활동 이상의 그 무언가로 만들 마음도 없고 이 운동의 가치를 다른 것보다도 높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주짓수'라는 이름 세 글자에 느껴지는 감흥이 전과 다르다는 것, 저 단어 위로 켜켜이 쌓인 몇 달간의 추억과 한 나무의 뿌리처럼 이어지는 다른 존재의 기억들이 내게 슬픔을 주기보다 기쁨을 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 운동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주짓수는 해보고 싶었지만 못한 아쉬운 것 혹은 만나지 못할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슴 시린 외로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주짓수는 외로움이나 그리움과 같은 아득해지는 것의 다른 이름이라기보다 그저 나의 삶을 충실하게 이끌어주는 기쁜 것임이 분명하다. 온갖 잡다하고 복잡한 생각, 공허한 생각 따위는 모조리 벗어버릴 수 있는 이름이다.

물론, 잘 만든 음식 중에는 코끝에 갖다 대면 짙은 향 외에도 미묘하게 느낄 수 있는 풍미가 있듯, 저 간판에 달린 이름에는 기쁨을 주는 짙은 땀의 냄새만큼이나 그 사람에 대한 향기가 아스라이 풍긴다. 내 띠를 처음으로 메어주던 그때의 향기, 도복이 그리 예뻐 보였던 그 사람에 관한 향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잊혀진 그리움이며,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될 그리움이다. 그 사람의 마지막 말대로 좋은 추억으로만 기억하면 될 그리움일 뿐이다. 그립지만, 아니 만나도 될 그리움이다. 그저 잘 지내라고 멀리서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할 그리움이다.

나의 주짓수는 실로 지금부터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실망스럽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는 것이며 나만의 길을 찾아 꾸준히 성실하게 걷는 것뿐이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다시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나의 꾸준한 노력이 무르익어 한 단계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혹 다른 중요한 인생의 일 때문에 언젠가 주짓수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지금의 기쁜 의미를 추억으로 오래 간직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로부터 들었던 영혼의 단짝 같은 허울뿐인 말은 지워버리고 그저 시간의 풍화로 희미해져 아픔 따위도 느끼지 않는 그런 추억으로만 남아버리길. 다만 그것이면 된다. 그것이 내가 이 시간의 점 위에 도복의 시간을 올려두는 방법이다.

횡단보도의 빨간불이 파란불 신호로 바뀌고 나는 저 간판을 뒤로한 채,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늦지 않게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가끔은 뛰기도 했다. 다음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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