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그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고 여길 때가 있었다. 일시적인 감정임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되돌아가니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무가치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갖지 못한 것들에 관하여, 혹은 자신의 부주의로 놓친 것들에 관하여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런 날이면, ‘우울한 마음을 덜어버리게 글이라도 쓸까?’라는 생각조차도 작동하지 못했다. 무가치한 모든 것에는 자신이 쓴 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에는 그 기간이 하루를 넘어, 이틀, 사흘, 나흘까지도 계속 지속되기도 했다. 건강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일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것, 내 의지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책임감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면 되었다. 모임을 만들거나 직장을 잡거나, 시간표 안에 해야 할 일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파도처럼 올라온 이 일시적인 감정을 해소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건강한 삶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최소한의 의지 자체를 실행하기 싫을 때가 있었다. 인생의 어떤 선택들이 마치 쌀을 씻은 뒤 밥통에 넣고 취사 버튼만 누르면 되는 일이라면, 쌀을 씻는 행위 자체가 힘들 때가 있는 법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때면 나에 속하는 누군가가 그저 내 옆에서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며 조잘거려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는 ‘그것 하나면 나는 힘이 될 텐데!’라고 여기며 깊은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쉬운 그 일이 자신에게는 앞으로도 실현되기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자, 버티는 삶을 사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겠다고 여겨도 그때만큼은 그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잘 지내니?’라는 흔한 인사에 “잘 지내고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순간이 그렇게 이따금 있었다. “나는 잘 지내지 못해. 나는 행복하지 않아. 적어도 지금은.” 순간의 행복은 그 순간의 의식과 관련되기에 대체로 행복한 나 조차도 이따금 이렇게 슬퍼질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내일이면 사라질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지극히 순간적인 감정이었다. 지독하게 가파른 기울기를 가진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뇌까렸다.
나는 잘살고 있다는 믿음, 이럴 때일수록 강한 믿음이 필요했다. 문득 종교인들이 부러워졌다. '나는 잘살고 있다'는 믿음을 누군가로부터 주입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비록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길이 황무지이나 이 길 끝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길 위에서 이 길이 맞는지 계속 의문을 되풀이하다가 지쳐 주저앉고 더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기보다 5조 5억 배쯤은 거대하여 우리 눈으로는 볼 수조차 없는 누군가가 지금은 성공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라며 이 길 끝에는 분명히 네가 바라는 그곳이 있다고 말한다고 믿는다. 나이만 처먹고 있는 이 어리석은 글쟁이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믿음은 모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괜히 그는 입으로 믿음을 떠올리다가 생각난 성경 구절을 읊조렸다. 이어서 어린 시절 교회에 관한 추억이 그의 기억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도 신실할 때가 있었고 눈이 씻기는 기분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눈물로써 기도를 드린 적도 있었고 세상의 모든 슬픈 것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해본 적도 있었다. 그랬던 그였는데, 그는 결국 신을 믿지 못했다. 믿음은 증거가 아니었고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검증이 어려웠거나 불확실했다. 그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그분이 예비했다던 길조차 의심하게 했다. 결국 그의 이러한 회의주의자적 기질은 결국 수많은 노트에 쓴 신이라는 이름과 함께 쓴 기도문들을 박스 어느 한구석으로 몰아넣고야 말았다.
그는 종교에 관하여 한때나마 즐거웠던 추억과 100%란 없는 과학적 합리성 사이에서 무신론자 대신 불가지론자라는 박쥐 같은 타이틀을 스스로 붙여주고서야 그 중립지대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존재한다고 여기지도 않는 신에게 아주 이따금 기도하다가도 신을 믿는 누군가의 맹목성을 비웃으면서 지내왔다. (그러고선 한편으로는 맹목적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강한 의지를 부러워도 했다) 그것이 불가지론자에게 허용된 구역이었다. 고독 속에서 잠잠히 마음을 내려놓고 그 마음속에서 진심을 담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누군가 귀 기울여 들어준다고 믿는 것, 그 존재가 있다고 여기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될 수 있었기에 그는 그 기도를 완전히 떨쳐 낼 수 없었다. 거짓된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처럼,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소설처럼 허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한때 그가 좋아하던 친구는 어리석은 글쟁이 앞에서 이따금 신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으나 예수의 정신은 사랑한다고 했다.
“기독교 교리도 잘 모르고 알다시피 무신론의 입장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난 예수가 좋아. 그리고 어떤 판단을 할 때 ‘예수님은 이런 때 어떠했을까?’라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하지. 물론 그건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여 율법으로 만든 이들이나 목사나 신부의 관점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긴 해. 오로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라는 존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것뿐이니까. (종교인도 사람인지라 그들이 만든 교리가 100% 바르다고 생각지도 않아) 그런데도 그 예수, 그 예수가 원수조차 용서하려 했던 그 모습을 생각할 때, 나는 그와 같은 성인은 아니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내가 배척하는 것들조차 연민을 갖거나 생각을 해보려 노력해. 물론 그럼에도 사람인지라 싫은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지만….”
어느 날엔가 그가 신실하게 믿는 종교적 교리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 비난을 할 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글쟁이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글쟁이 자신이 한때 믿었던 종교로부터 배웠던 가장 큰 가치가 그 사랑이었으니까. 다른 세부적인 교리는 다 잊었다 하더라도 누구나 포용하려고 하고 원수에게조차 연민을 가지려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의 부끄러워하는 것만큼을 잊을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조용한 말로 미안함을 담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나와는 다른 그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또한, 비록 저 하늘의 아버지를 믿지 않아도 이렇게 함으로써 그 정신을 따라감으로써 세상을 이롭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공허조차 조금은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적으로나마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지론자인 그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니, 어느 누가 이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확신시켜주지 못하는 이상, 스스로 이것만큼은 의미 있는 것이며 삶의 여러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여겨야만 하는 것이었다. 알지 못하는 짜증과 답답함에 하늘을 향해 ‘아! 씨부랄!’이라고 뇌까려도 이러한 기준들이 다시 온화한 자신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인생이라는 의미 있는 것들로 제련하고 좋은 주물 속에 넣는 것, 저 예수라는 존재와 그에게서 받을 수 있는 여러 교훈은 그런 주물 중 하나였다. 이런 것들을 의식하는 건 내버려 두면 애매하게 버려질 용광로의 쇳물을 식기 전에 끊임없이 제련하고 주조하는 수고를 계속하는 것처럼 때로는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삶은 이러나저러나 고단하거나 혹은 공허한 법이다. 마음이 공허해진 글쟁이는 다시 고단함을 택하겠다고 다짐했다. 고단함은 참을 수 있고 때로는 어떤 보상이 있었으나 공허함은 참기가 힘들었고 보상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그는 문득 신이 괜히 인간에게 ‘힘써 일하라’라고 말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신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글쟁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전혀 쓸데없는 글이라도 그저 자신을 위하여 글을 쓰기로 했다. 무슨 가치도 없는 글일지라도 글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에게 거대한 위안이 되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그냥 의식의 흐름이 이끄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가기로 했다. 그 의식이 어디에 닿을지 지금은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저, 나를 위해서, 어느 누가 봐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득 그는 그 의식의 흐름 속에서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어려운 글을 쓰고 싶었다. 무한대로 뻗어 있는 수많은 길(글)에서 예정된 목적지로 향하는 오로지 하나의 길(글)이 아니라 그냥 그때그때의 마음에 따라 선택하는 길, 그 선택을 즐길 자유를 느낄 그런 글을 쓴다면 어떠할까 싶었다. 글쓰기에서조차 무한의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이든 써서 작가의 서랍 속에 가둬두고 싶었다. 물론 그 글은 마치 하드 디스크의 은밀한 폴더 안에 있는 야동처럼 세상 밖으로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죽음과 금기에 관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을 테니까. 바나나가 총이 되고 오물이 샘물이 되고 죽음이 쾌락이 되는 세상일 테니까.
비단 이러한 이유로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로서, 가치 있는 예술로서 충족하지 못하기에 그는 그것을 꺼내놓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오로지 ‘글쟁이 자신을 위한 위로’로서만 작용하는 글이 될 것이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글쟁이의 서랍 제일 밑바닥에는 그런 글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위험한 짐승들이 가장 순수한 욕망의 형태로 날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그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옷을 입히고 온갖 장식으로 자신을 꾸미게 되는 날에는 서랍 아래를 벗어나 책상 위에 자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듯, 서랍 아래에 있는 이들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에 그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오로지 살기 위한 글을 쓰고 있다. 아직 진화하지 못한 원생동물 같은 글을 쓰고 있었다. '아'메바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플'라나리아에서 자유로움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