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리석은 글쟁이를 위한 변명 18.

by Chris

어리석은 글쟁이에게 무기력은 어느 때 찾아오는가? 그는 바로 지금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든 것이 감옥이 되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지금이 그런 때였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 사소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느끼고 있었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스스로 그 흔한 커피숍조차 가지 않고 고작 서너 평짜리 작은 방에서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처음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이 생겼노라 좋아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시간이 많은 글을 쓰는 창조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썼어야 했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부터 얻은 경험과 영감으로부터 썼어야 했다. 이놈의 극심한 전염병은 내게 모든 삶의 경험과 영감의 원천을 앗아가고 있었다. '나는 가진 것도, 변변한 직업도 없지만, 적어도 부지런히 살고 있다!'라는 하나 남은 자존감마저 점점 훼손하고 있었다. 자존감이 점점 비워진 마음의 공간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 아무런 능력도 없이 이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허무감이 자리했다. 그리고 마음이 그럴수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책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마감 시간은 축복이라던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떠올랐다. 기약을 알 수 없는 이 전염병, 그리고 내게 주어진 꽤 많은 시간이 되려 내게 무력감을 주는 시간이 된 것이다.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어쩌면 지금껏 진짜 고독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고 어지럽혀진 방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동안 바쁘다고, 일이 많다고 하며 아침이면 뛰쳐나오다시피 나와 저녁 늦게 들어가던 이 좁은 공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성이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이 시간은 내게 새로운 일들을 준비하기 위해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매는 시간이라며 미뤄두었거나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청소하고, 방의 배치를 조금 바꾸고, 늦잠도 잤다. 그는 어쩌면 지금이 수능 이후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여유가 있으면 안 되는 나이에 여유가 생겨버린 것이 좋은 것일까, 아닐까?

하루라는 시간의 거대한 주머니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는 언제나 고민이었던 문제였다. 자유로운 일이 아니라 시간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직업이었다면 아마 이런 고민은 덜 했을 것이건만, 어리석은 글쟁이가 되겠다는 선택의 가혹한 대가로 나는 모든 시간의 공간을 스스로 채워놓아야만 하는 시련을 얻게 되었다. 채워 넣을 계획만 세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 그 계획에 따른 시간을 견뎌내어 나의 것을 만들어가는 것 또한 도전이었다. 그래도 그런 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관계였다. 동료와의 관계, 모임과의 관계, 커피숍과 같은 장소와의 관계, 커피숍은 내게 글을 쓰는 장소였고 모임은 내게 책임감을 부여해 열심히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고 동료는 내게 외로움을 벗어나고 위안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관계였다. 지금은 그것 모두가 무너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경제적 타격뿐 아니라 그간 익숙해졌던 사람, 사물과의 관계를 모두 무너뜨린 것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마치 혁명처럼. 그리고 그 혁명은 모든 것을 무질서의 상태로 급격하게 나를 끌고 갔다.

슈뢰딩거라는 물리학자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한 강연에서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음으로써 엔트로피 상태를 늦춘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생명은 어느 정도는 생체 반응을 통해 자신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의 이러한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그 무질서도를 낮출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육체의 생은 좋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생체 반응을 이끌고 그것이 무질서도를 낮추는 것이라면 정신의 생은 무엇으로 무질서도를 낮출 수 있는 것인가? 사물, 실체와 나와의 관계에서 가공되는 의미일 것이었다. 무질서, 공허로 이어지는 나락을 벗어나려면 의미를 먹어야 한다. 불량 식품처럼 불량한 의미가 담긴 음식도 있겠지만, 건강한 음식처럼 건강한 의미이면서도 달달한 의미로 전달되는 의미를 먹고 싶었다. 마트에서 파는 여러 재료처럼 의미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책이었지만, 좋은 책은 좋은 음식의 재료들이나 건강한 약처럼 막 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주 단 책도 있었지만, 같은 시간이라면 나는 건강하거나 혹은 거창한 의미를 담은 책들을 보고 싶었다. 어쨌든 의미로서의 음식은 비단 책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모든 관계 속에서 느끼는 존재라는 재료를 내가 의미로서 먹는 것이니, 나는 좋은, 건강한, 혹은 그와 같은 단어의 범주로 이루어질 의미를 위한 관계를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자신이 계속 글을 써 내려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의미를 위한 관계를 다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고독 속에서 혼자서 글을 쓰더라도 그에 앞서 영감을 끌어낼 의미들이 필요했다. 그는 지금 의미의 궁핍, 급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로 관계의 궁핍에 처한 상황이었다.

관계가 궁핍할 때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한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글을 쓰며 그 마음을 달랬거나 정기적인 여러 모임을 만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보거나, 또는 노래를 불렀다. 그때와 지금의 큰 차이는 장소의 고립이었다. 그는 얼핏 자유를 빼앗는 감옥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말미암아 그는 실로 자신의 시간을 구속하던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느꼈다. 자유란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거리낌이 많다고 느꼈다. 또한, 그러한 와중에 전에 없던 중독 증세도 생겨버렸다. 가장 큰 것은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 의미 없는 클릭만을 해대는 휴대폰 중독이었다.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멍하니 무의미한 글들을 클릭하고 있었다. 그는 책을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판 위에 손을 올렸지만,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시시하거나 재미없어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들마저도 놓아버리도록 했다.

그는 멍한 상태로 자판을 두드리다가, 숨을 돌리며 책꽂이의 책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오래전에 사둔 올더스 헉슬리의 책『영원의 철학』이 눈에 띄어 손을 뻗어 그 책을 보았다. 마치 '예언의 책'처럼 그는 마음을 담아, 그 책의 아무 페이지를 열었다. 책과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 맺어보기는 오랜만이었다. 거기에는 이러한 말이 쓰여 있었다.


내적 기도에 전념하지만 어떤 때는 마음이 매우 흐릿해지고 감정이 아주 둔해져서 거기에 대해 스스로 매우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드문 영혼들이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영혼이 제대로 교육을 받거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 열등한 성질이 갖는 모순이 오래 지속되어 실망을 하고 기도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묵상이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생각하거나 신을 향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시간의 손실뿐 아니라 전혀 가치가 없으며, 그러므로 시간을 다른 데 쓰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로 어떤 영혼들은 다른 방법이 아닌 무미건조한 기도를 통해 전능하신 하느님의 인도를 받지만 모든 묵상에서 어떤 만족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지속적인 고통과 모순만을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속에 깊이 각인된 비밀스러운 은총과 용기로 멈추지 않고 오히려 온갖 어려움을 단호히 뚫고 나가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내적 훈련을 계속해 나감으로써 그들은 영은 엄청나게 진보하게 된다. - 어거스틴 베이커


어리석은 글쟁이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글을 다짐했다. 그게 비록 어리석은 글일지라도 멈추지 말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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