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나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년 동안 이렇게 게을러 본 적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에 대한 죄의식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이 하던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던 것들은 자신이 손을 놓아버리자 실은 그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동? 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독서?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글쓰기? 긴 시간을 커피숍 한구석에서 쉼 없이 써 내려가던 글들도 내 형편을 나아지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 긴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이끌려 기계처럼 살아갔다면, 그러한 자유에서 도피해 구속당해 살아왔다면, 어쩌면 나는 이따금 느끼는 이 자유라는 이름의 다른 공허감 속에서 표류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긴 자유는 방종이었고 방종은 구속을 갈망케 했다.
전 세계적인 질병으로 수많은 것들이 일시에 중단되면서, 여러 계획된 일들로 내 하루의 기준을 정하던 일들도 차츰 망가지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어진 아침은 수년 전의 게으른 나로 돌아가게 했고 공간의 폐쇄는 균형을 유지하던 내 시간들을 카오스적으로 무너뜨렸다. 나는 지금껏 해왔던 모든 일을 내 방 안에서 나 자신의 의지로 해낼 수 있을 거라 다짐했지만, 나태의 공간에서 나는 번번이 실패할 뿐이었다. 더 무서웠던 것은 몇 번의 실패가 이어지자 그런 실패에 대한 반성, 죄의식조차도 점점 사라져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마치 나 자신이 서서히 끓고 있는 솥단지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개구리처럼 변화를 조금씩 느끼면서도 빠져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냥 이대로 될 대로 되라지. 뛰쳐나온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이런 목소리가 계속 어디선가 들려왔다. ‘안돼, 내일은 아침 일찍 나와 다시 무너져가는 내 삶을 탁월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일들로 묶을 거야.’라고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나 자신의 모습에 허망함만 들 뿐이었다. 이따금 그 허망함은 죽음과도 같은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둘은 분명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생명의 유지는 분명,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생의 존속을 위하여 무언가를 먹어야만 했고, 원시 시대에는 끊임없는 투쟁으로써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생은 유지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의 사회는 원시 시대처럼 치열한 투쟁은 별로 없다. 원시시대만큼 목숨을 내놓을 만한 의식적이며 꾸준한 노력 없이도 그 어느 시대보다도 생의 존속을 위한 섭취가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우리의 진화 속에서 이루어진 우리 생을 유지하기 위한 그 의지와 노력에서 우리는 살아있음과 비슷한 냄새를 느끼고 나태와 허망함 속에서 생의 포기, 죽음의 냄새를 느낀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어리석은 글쟁이의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서도 계속 밭에 나가셨다. 이따금 아버지는 할머니가 아프다고 할 때, "제발! 일을 그만두고 쉬세요."라고 하소연했지만, 억지로 말리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도 꼭두새벽부터 나가 일을 하는 그 행위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억척같은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어르신들에게 할 때면, 그분들은 하나같이 “그런 분은 일을 손에 놓으면, 얼마 못가 아프다”라고 말했다. 아프니까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아니라, '일하지 않으니 아프다'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인과관계가 뒤틀려 보이는 이 말에서 다시 한번 내 할머니의 노력과 생의 의지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정해주고 강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마감 시간처럼 누군가 마감 시간을 정해주고 그 안에 주어진 것을 해내면 그에 보상하는 어떤 것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돈이었으면 가장 좋고 그게 아니어도 나에게 이득이 되는 그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아! 정말, 그게 있다면! 그게 있었더라면!' 물론 그것을 구속이라 생각할 것이다. 답답해하기도 할 것이다. 도망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없는 그런 구속을 동경하고 있었다. 사람은 언제나 반대편에 있는 것을 동경하는 법이니까.
그의 공상 속에서는 자신이 벼랑 위에서 뛰어내려 자신 있게 날갯짓하는 파랑새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공상만 하는 어리석은 글쟁이일 뿐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글쟁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행동조차 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일 뿐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시도를 해야만 한다. 꼴 같지 않게 겸손한 척 고고한 척하지 말고!' 그러한 모습을 보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건 그가 실은 지독한 겁쟁이기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그는 평생을 겁쟁이처럼 살았다.
결국, 자신을 겁쟁이로 만드는 것도, 나태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어리석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자기 자신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지금의 이 굴레를 벗어나야 하는데…'라는 한낮의 한숨, '이번 생은 망했어!'라며 자조 섞인 농담조로 하루를 때우려는 어리석음. 모두 나 자신이 바뀌어야만 하는 일임은 진작 알고 있었다. 실은 어리석은 글쟁이로서는 이런 생각 속에서 때로는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일들이었다. 자신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며 칭찬해주지 못하고 그저 멍한 눈으로 하루를 살다가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멍하게 잠이 드는 일, 실로 누구도 날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며, '차라리 사랑받는 어느 집의 애완견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버리는 일,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나 보다.'라고 자포자기하는 일 등등….
이런 일을 극복하려면, 실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면서 끊임없이 도전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내가 바뀐다고해서 이뤄질거라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서는 차라리 그 일 외에 다른 일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게 낫다 싶을 정도였다. 사랑받고 싶어 했으면서도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실로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어떤 큰 실망을 한 뒤에, '다시는 이따위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자'라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감정 소모 따위로 나를 슬프게 하지 말고 여자 때문에 자존감 따위를 무너뜨리지 말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자며 다짐했을 때, 마음은 조금 나아지는 듯했지만 한순간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글쟁이의 삶의 투쟁은 바로 그러한 감정과 이성 사이의 투쟁이기도 했다. 그가 꾸준히 운동하고 글을 쓰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은 바로 그 감정의 틈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특정 시간에 해야 할 특정한 일과 목적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해 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둥둥 떠다니는 시간에는 본능적으로 감정의 회복, 사랑받고 싶다는 본능에 따른 회한의 감정들이 마음을 뒤섞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것을 뒤덮기 위해서 시간을 죽일만한 영상을 보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글들을 반복적으로 눌러댔을 것이다. 충족하지 못한 괴리로부터 오는 우울을 무엇인가로 채우려는 법이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타인에 대한 지배와 폭력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채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모든 것이 다 무가치하다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겠지.
글쟁이는 전혀 만족하지 못하는 쓸데없는 글을 싸질러 놓고선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며 쓴웃음을 짓는다. 별 볼 일 없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니까. '그거면 됐다.' 오늘의 글은 그거면 됐다며, 내일은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돈이 되는 글을 써보자며 다짐한다. 오늘 밤에는 파랑새 꿈을 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