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기다리는 즐거움 /「자기 실현」의 시간
나의 일상 여행기. (29)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내가 이 일을 지금처럼,
어디서나 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는 마치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을
맞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부터 후배 기정이 야구 표를 이벤트로 받았다며 보자고 해서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인천에서 잠실까지 가려면 족히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약속 시각보다 한두 시간 먼저 가서 근처 커피숍에서 개인적인 볼일을 보는 게 일상인지라 그러려면 일찍 움직여야 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매번 모임이 있으면 지각을 했었다. 그 점이 내 자신도 짜증이 난 터라, '그러면 딱 맞춰서 갈 게 아니라, 아예 일찍 가서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보거나 일을 하고 있으면 늦지도 않고 시간 활용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도한 게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10분, 20분 정도 애매하게 일찍 나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거니와 다른 사람이 늦을 때 기다리는 것도 짜증이 날 수 있다. 또한, 그렇다고 고작 10분, 20분 정도 때문에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서 기다리고 있기도 그렇다. 그러나 약속 시각보다 최소 1시간 이상 먼저 와 있을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절대 늦지 않을뿐더러, 독서나 볼일을 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며, 볼일을 보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늦더라도 충분히 기다릴 여유가 생기며, 약속 장소를 자기가 있는 커피숍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또한, 주말에도 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찍 움직이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각쟁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약속 시간은 딱 맞춰 가거나 조금 일찍 가는 게 좋다.'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니 지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서 무엇보다 좋았다. 그리고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이 그저 편견일 따름이며, 우리의 관점이나 생활양식을 바꿈으로써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간만에 지하철을 탔다. 타는 동안 계속 일기를 썼다. 오후에는 분명히 야구를 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거라 지금 말고는 마땅한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만 하면 잠을 청하기 일수였는데, 이제는 글을 쓴다. 이것 역시 내 관점을 바꾸고 나서 생긴 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글은 책상머리 위에서만 써야 한다는 생각, 시간을 정해 놓고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루 중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고 나니, 시간에 이 일을 부여하기보다 일 자체에 시간을 부여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시간표에 일을 맞춰 넣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고 먼저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글쓰기 임에도 정해진 시간을 모르고 지나쳐버리면, 어쩔 수 없이 차일피일 미뤄둘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이 조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생각하기보다 시간표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지금처럼, 어디서나 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는 마치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을 맞는 기분이었다.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서는 폭풍우가 된다.'
1호선을 타고 주안에서 신도림으로, 2호선으로 잠실까지 가면서 다행스럽게도 모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특급, 급행 지하철을 타니 지하철 앱으로는 목적지까지 1시간 5분 정도 걸린다고 안내했다.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지하철에서 약 10분 거리에 커피숍이 있었다. 아침에는 날씨가 제법 흐려 춥지 않을까, 우산을 가져오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이제는 제법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날씨 앱으로 확인하니 강우량도 10%였고 오후부터는 햇살이 비춘다고 나와 있었다. 요즘에는 이러한 날씨 정보를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에 읽은 제임스 글릭의 '카오스'라는 책에서는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서는 폭풍우가 된다.' 라는 설명으로 날씨 예측의 어려움을 언급했었다. 흔히 '나비효과'라고 불리는 이 말은 사소한 변수가 민감하게 작용하여 날씨가 급격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날씨 변화에 관한 변수가 엄청나게 많고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현재 기술로는 예측의 정확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 책의 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북 콘서트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콘서트의 패널로 참여한, 한국어판의 감수자였던 김상욱 교수는 변수 예측에 대하여 컴퓨터 능력이 충분히 발전하면 그 변수를 다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답했었다. 그때가 벌써 약 6년 전이고 그 이후로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컴퓨팅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했으니 그만큼 예측 성능도 꽤 발전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은 기상이변 수준의 날씨를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일상에서 경험하는 평균적 날씨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잘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시가 넘어서 친구들을 만나 야구장으로 향했다. KFC와 피자헛에 들러 음식을 사서 들어갔다. 응원하면서 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잠실 구장은 한 10여 년 전에, 전 여자친구랑 오고선 처음이었다. 그때도 LG를 응원했는데, 이번에도 LG다. LG 팬은 아니었지만, 표를 받아온 친구가 LG 팬이라 그에 맞춰 온 것뿐이었다. 만약 상대편 팀인 키움을 응원했더라도 상관없었다. 야구를 안 본지도 근 5~6년 이상 되기도 했고 그것을 시간 내서 볼만큼 흥미도 없었다. 그래도 응원만큼은 여느 팬 못지 않게 했다. 소리를 너무 질러댄 탓에 끝에 가선 목에 상처가 난 것처럼 아팠다. 응원 중에 눈웃음이 상당히 예쁜 치어리더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이름이 등에 붙어 있어서 나중에 검색해보니 아직 고등학생이어서 놀랐다.
게임은 꽤 재밌었다. 팀이 이겨서 그런 것도 있지만, 게임 자체로도 난타전이 이어졌다. 경기는 이겨도 잘 싸워야 하고 져도 잘 져야 한다. 물론 잘 지는 것은 팀 게임에서 한 선수가 어떻게 한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잘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관객의 입장으로는 지는 게 아까울 정도 재미있게 경기를 했다는 느낌이며 팀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게 아닐까?그 안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더 배우고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이런 게임은 선수들이 페어 플레이 안에서 끝까지 전력을 다한 게임이다. 삶에도 이처럼 이기고 지는 과정이 있다. 이때에도 우리의 삶은 재미있어야 하며 페어플레이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삶의 원칙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는가?’ 다시금 되물을 수밖에 없다.
칼 융은 자기실현은
중년부터 시작해야 하고
젊을 때는 다양한 가면(페르소나)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야구가 끝나고 그냥 헤어지기 싫어 다시 커피숍에 들렀다.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와 옛날 대학 시절의 이야기들을 했다. 이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직장생활을 할수록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한, 자신도 예전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 노력하기보다 그냥 예전에 만나던 편한 사람을 만나고 한가할 때는 그저 쉬는 게 좋다고 했다. 이는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좋았던 사람들이 점차 학교를 떠나고 새로운 사람과 다시 그런 관계를 만들 때에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렇게 편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여러 이유로 멀어질 수 있기에 새로운 만남과 노력이 필요한 것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고 다시 멀어지는 게 밀물과 썰물 같다. 이들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떠나는 과정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여러 사정으로 한때 가까웠던 이들과 차츰 멀어지고, 자신에게 조금 더 관심을 두는 듯하다. 물론 이 시기에도 타인에 대한 외로움이야 있지만, 자신 내면에 프리즘처럼 존재하는 수많은 자신을 보게 된다. 칼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시기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쓰기보다 자기 내부로 보내는 시기이다. 조용한 가운데 내면을 탐험하고 성찰을 하는 것이다.
칼 융은 이러한 자기실현은 중년부터 시작해야 하고 젊을 때는 다양한 가면(페르소나)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까닭이 있겠지만, 앞서 말한 맥락에서 말하자면, 사회생활을 시작하기까지 다양한 사회관계에 집중하게 되고 나이를 먹고 나면 그 이후 새롭게 만들어지는 관계의 수가 적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실현을 위해 실제 내면의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와 깊이의 차이는 있어도 마치 본능처럼 인간은 사회 속에서 질풍노도와 같은 관계를 맺다가 잠잠해지는 무렵에 우리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 관계를 소유적으로 갖지 않고 나라는 존재를 조금 더 성찰한다. 그러면서도 인생의 무대 뒤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던 공허감의 실체를 확인하고 당황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30대는 20대의 젊음 속에 만들어온 관계의 무대와 40대의 독백의 혹은 소수의 인원이 등장하는 무대로의 이행 가운데, 뜻하지 않은 변화에 당황해하며 동시에 적응해가는 시기이다. 나이를 더 먹어갈수록 모노로그를 하게 되겠지. 나이를 먹고서 내 인생을 돌아보는 모노로그를 하게 될 때 난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우물쭈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게 될까?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자유롭다고 이야기하게 될 것인가? 혹은 행복했었노라고 이야기하게 될까?
그들과 헤어져 돌아가려는 길에 붕어빵이 보였다. 슬슬 출출한 시간이라, 주머니를 뒤졌지만, 현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정에게 붕어빵 좀 사달라고 하니, 차라리 밥을 먹고 가자고 나를 붙잡는다. 나도 그게 좋을 거 같아 다시 신천 시내 주변을 돌아본다. 인당 8~9,000원짜리 순두부를 먹으며 최근의 관련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로이 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는데, 최근 그의 음악적 완성도나 느껴지는 색을 생각하면 사정이 어땠든 조금 씁쓸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물론 잘못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서글픈 것은 이 사건들 역시 잘못된 것이지만, 이들 탓에 더 큰 사건들이 묻힌다는 것에 있다. 연일 언론에 등장하는 정준영이나 최종훈 또는 로이킴이 저 사건으로 실제 형을 얼마나 받겠는가? 아마 도덕적으로나 유명세로나 죄질은 있지만, 법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큰 죗값을 받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꼬리일 뿐이며 수많은 몸통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당장 나 역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듣는 내내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모두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낮에 못다 쓴 일기를 마저 끝냈다. 나는 쓰는 노력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될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이 일이 어떤 가치를 가질지 모르겠다. 다만, 바라건대, 지금 쓰는 것들이 오랜 시간 이후, 모두가 떠난 내 무대에서 오직 나만이 독백하게 될 때, 그때 정말 잘한 일로 기억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때 했던 선택과 노력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데 큰 힘이 되었노라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