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 라스꼴라니코프와 뫼르소.

나의 일상 여행기. (30)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사회의 변화에도
그리스도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가?


‘아침에 7시까지 등교를 못 하면 커피를 사자!’는 상윤이와의 내기 때문인지, 일찍 일어났다. 이 시간에 일어나던 게 일상이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게을러진 지금 상태에서는 꽤 성공적인 기상이었다. 물론 몸이 익숙지 않은지 깨고도 한동안 침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결국 그 시간 안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후에 쓰던 일기를 아침 시간으로 옮기고 오후에는 책을 넉넉히 읽자.'는 생각에 일기를 써 내려갔다. 커피를 한잔해서 졸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몽롱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이 몽롱함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침보다 매번 늦게 잠드는 저녁에 있었다. 아침부터 ‘레드아이'(드립커피에 에스프레소를 추가한 고 카페인 커피)가 당겼다. 그러나 오후 시간에 마실 커피를 위해 아침은 그저 가루 커피에 만족해야 했다. 상윤이는 인적성 시험을 대비한다고 수능의 언어 영역 문제를 풀고 있었다. 수능시험이 최신 동향의 이슈를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유형이 비슷해서 공기업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이 많이들 푼다고 했다. 지금 푸는 문제에 대해서 얼핏 들어보니 슈퍼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름달이 근지점에 있을 때 가장 크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때 지구와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져 기조력으로 인해 해수면이 가장 높아진다고 한다. 어쩌면 상식에 가까운 과학 지문일 수도 있으나 한 문제당 1~2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기에 해당 지식이 없다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구와 36만 킬로미터 내에 들어오는 진짜 슈퍼문에 대한 설명이고 실제 슈퍼문은 아니지만, 달이 지표면에 있을 때 더 커 보이는 현상이 있어서 상윤이에게 잠깐 이야기했다. 이는 물체의 배경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보이는 '폰조 착시'로 달의 크기는 지평선에 있을 때 더 크게 보인다.

그는 최근에 본 톨스토이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도 했다. 부활에 등장하는 종교적 견해를 이야기하며 인간이 어째서 다른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비록 사회가 위선적이고 악으로 가득 차 있어도 신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끝난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소설은 단지 '안나 카레니나'나 단편집 정도밖에 보질 않았다. 다만, 그 책들은 하나같이 그 끝이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이나 사회의 추악함 끝에서 하나의 모범적인 인물을 통해 제시하는 해결책은 결국 그리스도교적 사랑이었다. 들어보니, 아마 부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그나마 비슷한 시기의 도스토옙스키는 조금 더 근대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회개를 보여주더라도 주인공은 그 선택에 대하여 자신의 독백으로 마지막까지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그 중에 몇가지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유사점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독백으로서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점이다. 다만, 한 작품은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기 전에 주인공의 고뇌와 선택의 과정에서, 다른 작품은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의 독백으로 기독교적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한 작품은 기독교적 정신으로 보면 구원을 받지만, 다른 작품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기독교적 사랑과 회개’, 아마 이것이 당시 소설의 시대적 한계 또는 새 시대의 재건을 위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을 깨고 개인의 행복과 욕망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 수 밖에 없는 톨스토이적 사회나, 르네상스 시기 유럽으로부터 불어와 이미 진부화된 개인주의와 산업 혁명으로부터 발현된 천박한 자본주의의 도스토옙스키적 사회로부터, 이들 모두는 다시 그리스도적 이상과 가치를 세우려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도 그리스도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이들이 주장이었다. 16세기 인본주의자들이 르네상스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타락한 시대의 가치관에 부합시키려 했다면, 이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에 의해 타락한 사회에 그리스도 중심의 가치관을 부합시켜 보려는 노력이다. 아직도 그 사랑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사건 전개와 해결책은
이 러시아 소설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그에 반해 시기적 차이는 있으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사건 전개와 해결책은 이 러시아 소설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살인을 배경으로 한 법정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비교해보면 그 책의 진보성(?)은 보다 선명해진다. 죄와 벌에서 라스꼴라니코프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신이 주신 생명을 인간적 차원에서 심판하여 실행한 것인데, 사회 문제를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나름의 살해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경우에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괴롭히는 이방인을 단지 뜨거운 햇살 때문에 죽인다. 라스꼴라니코프가 자신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동일시하며 의도적인 살해를 감행한다면 뫼르소는 개인의 문제, 그마저도 다른 개인으로부터 받은 문제가 아닌 자신의 다른 심리적 동기에 의해 우발적 살해를 저지른다. 전자가 사회에 거미줄처럼 걸쳐서 어쩌지도 못하던 한 인간의 몸부림이라면 후자는 철저히 개인화되어버린 인간이다. 기독교적 이상이 엄연히 존재하고 국가가 나서서 인간을 보살피는 세계관에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사회 변두리로 떠밀어진 인간이라면, 후자는 철저히 개인화되고 인간의 이기성과 합리성이 기본 가치인 자본주의 경제사회에 동화된 빈 껍데기와 같은 인간이다. 후자는 살해 동기마저 비어져버린 인간이라, 그를 재판하기 위해 그 동기를 사회가 규정해줘야 한다.

두 인간의 마지막 선택도 다르다. 죄와 벌의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의심하나 회개의 길을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악의 따위가 없었던 뫼르소는 회개하라는 신부를 저주한다. 이 자를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 본능 자체가 소시오패스적인지, 사회가 그를 그런 관계와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인간으로 만들었는지는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마지막에 신부를 향해 지극히 정상적인 말투로 저주를 퍼붓는 것을 보며, 회개가 자신이 이렇게 한 행동의 해결책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이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지극히 정상적임을 알게 된다. 조금 솔직해져 보자. 우리도 햇볕이 뜨거울 때, 우리의 앞길을 막는 짜증스러운 것이 있을 때 화를 내거나 나쁜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다만, 우리는 아직 소중한 사람이 있으며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지옥에 간다고 여기기보다, 잃을 게 많다고 여기기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나 미덕은 사라져버리고 자신이 이 사회에서 잃을 게 없다고 여기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 뫼르소를 만든 것은 라스꼴라니코프처럼 아직도 사회이나 그나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처럼 고뇌토록 하는 존재는 그저 신화나 미신일 뿐이다.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 있다. 뫼르소와 같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이 제목과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를 몰라 결국 어떤 의미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뫼르소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가치나 어떤 의무도 아니고 자기 이익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끝나고 10시가 되자 그는 운동하러 떠났다. 오늘은 아무도 영어 모임에 오지 않는 날이라 혼자서라도 공부를 할까 하다가 그냥 계속 일기를 썼다. 오전의 일기는 정신이 멀쩡하던 오후의 일기만 못했다. 이것이 커피 탓일까? 시간 탓일까? 아니면 오후의 햇빛 탓일까? 혹은 장소 탓일까?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님에도 우리는 어떻게든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한다.


‘악한 목적이 아닌
선한 목적이라 한다면,
그 수단이 다소 악할지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오후에는 '부분과 전체'와 '데카메론'을 가지고 커피숍으로 갔다. 매번 같은 커피를 시키건만, 오늘은 커피의 양이 적었다. 어떤 날은 많고 어떤 날은 적었으나 어차피 커피양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저번에 말하기론 정량대로 드리는 거라고 해서 그냥 2층의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다. 바깥 날씨는 며칠 전과 다르게 더웠으나 내 자리는 에어컨 밑이라 추웠다. 오후에 글을 쓰다가 간만에 책을 읽으려니 몰입이 잘 안 되었다. ‘부분과 전체’는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오토 한' 박사가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여 살상 무기로서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발견 가운데, ‘자신의 기술이 의도치 않게 정치적 목적, 대량 살상의 목적으로 사용되려 할 때 과학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연구자의 책임에 대하여 고뇌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책에 나온 바대로 질문하자면, ‘악한 목적이 아닌 선한 목적이라 한다면 그 수단이 다소 악할지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덱스터'라는 미드가 있다. 법망을 피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악당을 잡아 살해하는 경찰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이 사람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사람이 행위를 통해 사회의 더 큰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도 도덕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해선 안 된다. 그러나 라스꼴라니코프나 덱스터 같은 존재가 생기는 까닭은 서글프게도, 올바른 수단으로는 사회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때이다. 국민이 배워야 하며 그 배움의 목적이 단순히 지식의 습득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적 시각과 사고’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 있다. 정당한 수단으로조차 해결되지 않을 때,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깨어 있는 국민의 단합된 힘’이 불완전하나 최선일 수 있는 정당한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에 이어서 읽은, ‘데카메론’은 르네상스가 도래하던 중세 말엽의 타락한 종교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프리 초서가 이 책을 보고서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그런지 이야기를 진행하는 구조는 유사했다. 다만, 이 책이 흑사병을 피해 외지로 도망친 10명의 남녀가 무료함을 이기고자 이야기를 시작하는 배경이라면, 초서의 글은 캔터베리까지 순례하러 가는 도중에 30여 명의 사람이 돌아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차이가 있었다. ‘데카메론’은 참고로 인간의 욕망을 밝힌 책이라 하여, 신곡에 빗대어 ‘인곡’ 이라고도 한다.

저녁을 거르고 계속 책을 보려 했으나 배가 고팠다. 석양이 지건만, 그다지 행복할 것도 없었고 환희에 가득 찬 마음도 없었다. 점점 스스로 감옥을 만들고 사회 속에서 멀어지기를 바라는 인간이 되어가는 듯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허전한 마음에 문득 왜 사람들이 그토록 술을 찾고 정욕에 빠지는가 이해가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내 가슴에 무엇이 빠졌고 그것을 도대체 채울 수는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방은 좁았고 간단히 라면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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