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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Sep 14. 2020

경복궁에 관한 유홍준님과의 대화 1.

가상 인터뷰 방식을 통한 독서 이해 방법『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https://brunch.co.kr/@wringkle/318


다음의 글은 위 링크인 『광화문과 광장에 관한 유홍준님과의 대화.』의 연장선에 있는 글입니다. 위의 글이 광화문에 관한 대화를 담고 있다면 아래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에 관한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내용은 광화문 편과 마찬가지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경복궁 편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불어 이 글의 가장 큰 목적은 이러한 대화체로 형식으로 바꿈으로써 독서의 흥미를 높이고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해 드리고자 함에 있습니다.


출처 : EBS


NTL(National Training Laboratories)의 학습 효율성 피라미드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학습법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굳이 이러한 자료를 따지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것이 학습 효과에 좋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학습이나 독서를 그렇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공통의 관심사가 없다면 부득이하게 혼자서 책을 읽어야만 할 때도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어떻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책의 저자나 대화의 상대를 상상으로 불러내어 그에게 대화를 청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이 방식은 그러한 생각에서 작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은 머릿속 상상의 존재가 책의 내용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다른 책의 내용이나 인터넷의 참고할만한 이미지를 가져오기도 하고 저자의 원본 글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죠. 물론, 이는 과자를 씹듯이 빠르게 삼켜버리는 소비적 독서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독서 방법입니다. 특히 머릿속에서 그저 책의 내용을 대화식으로 바꿔서 읽는 것을 넘어, 이렇게 직접 기록으로 남긴다면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참고로 이 방식은 아래 링크에 담긴 방법 중 하나일 따름이니, 여러 (존재 양식의) 독서 방식에 관심 있으신 분은 다음의 링크를 참고 부탁합니다. 



각설하고, 이 방식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찾는 결과를 얻게 되거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음의 유용한 내용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궁궐이나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하면 어떠한가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자금성에 비하면 뒷간밖에 안된다."는 식의 자기 비하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경복궁에는 자금성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미학과 매력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은연중에 경복궁이 자금성을 모방 축소해 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금성이 완공된 것은 1420년이고 경복궁은 1395년이니, 경복궁이 25년 먼지 지어졌죠.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해 크기는 작습니다. 경복궁이 14만 평(46만여 제곱미터)이라면 자금성은 24만 평(79만 제곱미터)으로 약 60퍼센트 규모죠. 황궁과 왕궁의 차이이기도 한데, 국제적 관례상 왕궁은 3문 3조(연조, 치조, 외조) ¹이고 황궁은 5문 3조였습니다. 대문에서 정전에 이르기까지 황궁은 5개, 왕궁은 3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죠. 정전의 월대도 5단과 3단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당시 국제 질서의 파괴이자 도전이었으니 뒷감당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경복궁과 자금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차이는 위치 설정(location)에 있습니다. 자금성은 그 기본 취지가 위압감을 주는 장대함의 과시에 있다면 경복궁의 특징은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있죠. 주변의 경관을 끌어안는 차경의 미학을 경복궁처럼 이뤄낸 건축은 세계에서도 드뭅니다. 경복궁은 어느 시점에 보아도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는 자연과의 어울림이 그 자랑입니다.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학이 중요했던 것이죠. 경복궁은 거기에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다는 것은 전제로 지어진 건축입니다. 궁궐 너머로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은 경복궁의 가시적 정원인 것이죠. 마치 그것은 왕의 위엄과 동시에 선비들이 화폭에 그렸던 이상향의 세계에 가까운 건축인 셈입니다. 자금성 주위에도 산이 없어요. 자금성 주변에는 삼엄한 경비의 필요성으로 인해 나무 한 그루 조차 없죠. 경복궁의 각 권역을 이어주는 길에는 100여 종이 남는 너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경복궁은 좀 더 인간적인 체취가 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광화문과 흥례문, 근정문을 거쳐 근정전에 이르는 길은 나라의 위엄을 보이는 정숙하고 엄숙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 들어가면 사정전이라는 근무 공간과 강년전, 교태전, 자경전이라는 왕과 왕비, 대비의 생활공간이 있죠. 근정전 옆에는 경회루라는 연회 공간이 있고, 태원전이라는 제사 공간이 있습니다. 또 그 뒤로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던 건청궁이라는 살림집이 있으며, 집옥재라는 서재가 있고 향원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습니다. 장고지에는 조선 팔도의 장독이 있습니다. 각 권역에는 왕과 왕비가 생활하고, 신하들과 집무하고, 사신들과 연회를 베풀고,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홀로 산책하던 자취가 그대로 느껴지죠. 


유럽의 궁궐 하고는 차이가 있네요? 


네. 유럽의 궁궐은 한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짐에 반해서 우리 궁궐을 권역을 분명히 나누고 있죠. 


이런 곳에 경복궁을 어떻게 세우게 되었나요? 


사람들은 경복궁의 자리 앉음새를 말할 때면 으레 풍수적 형국에 잘 맞는 곳을 쉽게 고른 줄 압니다. 그러나 일반 민가의 풍수가 아닌 국가 전체를 관장할 왕궁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죠.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 달도 못되어 수도를 옮길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듬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건물을 지으려고 했으나 여러 공신들의 반대로 인하여 다시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죠. 그리하여 무학대사는 지금의 서울 자리를 지목하였습니다. 곧 태조는 정도전으로 하여금 도시 전체를 설계토록 하였고 그해 12월에 종묘의 터 닦기를 시작함으로 신도시 건설 공사에 들어갔죠. 


드디어 건설을 시작한 거네요?! 


이 엄청난 공사는 불과 10개월 만에 완료됐습니다. 설계기간 3개월, 시공기간 10개월, 동원 인부는 약 1만 5천 명이었죠. 경복궁의 마스터플랜을 세울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등에 진 동향궁을 주장했으나, 결국은 정도전의 의지대로 남향궁으로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무학대사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남향궁을 지을 경우 일어날 갖가지 풍수적 예언과 경고를 남긴 것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죠. 


그 전설이 어떤 건가요? 


그가 예언하기를, 영천 무악재 고개에는 3천 선사가 수도할 것이라고 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3천 명을 수용하는 서대문형무소가 생겼습니다. 낙산 아래에서는 인재가 나온다고 했는데 나중에 서울대학교가 자리 잡았고, 서쪽은 인왕산이 너무 강하여 군부가 장악한다고 했는데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동쪽 낙산은 너무 약함을 걱정하였는데 임진왜란, 한국전쟁 때 적군이 동대문으로 입성했습니다. 남쪽에서 한양을 내려다보는 관악산은 병오가 낙맥한 것이기 때문에 경상도 정권이 생긴다고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파워게임에서는 정도전에게 패배한 셈입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결국 죽임을 당했으니 누가 더 우수했는지 알 수 없죠. (웃음) 


경복궁은 무슨 뜻인가요? 


태조 이성계는 재위 4년에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은 뜻을 담아, 이를 지어서 왕에게 바쳤어요. 그 내용은 실록과 정도전의 "삼봉집"에 실려 있는데, 모든 이름의 뜻은 고전에서 가져왔습니다. 경복이라는 이름은 시경 대아편의 '기취(이미 취하다)'에 나오는 시구를 따온 것입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景福)을 누리리. 

그러면 경복궁은 그때 다 지금의 형태대로 다 완성한 것인가요? 


1차 준공이었고 궁궐로서 최소 공간의 확보였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공사는 진행되었죠. 담장은 3년 뒤인 태조 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순탄치 않았는데,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들의 세력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 일어나는 과정에서 정종은 재위 2년에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겨버리고 태종 재위 5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경복궁 동쪽에 창덕궁을 지은 뒤 그곳에서 업무를 봤죠. 1408년에 태종 이성계가 운명한 곳도 창덕궁 별궁이었습니다. 이대부터 왕들은 이궁 체제를 갖추며, 사정에 따라 양쪽을 옮겨 다니며 정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임란 전 임금들은 권위적인 경복궁보다도 인간적 편안함을 느끼는 창덕궁을 선호하여 그곳에 기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태종은 이복동생을 죽인 곳이며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도하여 건설한 곳이니 더욱 꺼려할 법도 했죠. 


그러면 경복궁은 완성 후에도 방치된 상태가 많았다는 건가요? 


그건 또 아니었어요. 태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재위 11년에 경복궁에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풍수적 형국을 보완하려 했죠. 또 재위 12년(1412)에는 외국 사신들과 조정 대신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할 경회루를 지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조선왕조의 법궁 다운 면모를 완벽하게 갖추게 된 것인가요? 


그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예요. 세종 8년에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 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의 이름이 이때 지어졌죠. 그리고 알다시피 재위 28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한 곳도 경복궁 집현전(지금의 수정전)이었습니다. 


근정전에 대해 알려주세요. 


경복궁은 근정전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는 정사를 보는 편전인 사정전을 두고 그 뒤로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두는 남북 일직선상의 정연한 배치입니다. 경복궁 건축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근정전입니다.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이었죠. 많은 임금들이 이곳에서 즉위를 했습니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큰 목조 건축물입니다. 경회루나, 종묘의 정전과 평수는 비슷하지만 월대 위에 중층 구조로 되어 있기에 외관상으로도 가장 크게 느껴지죠.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 중앙에서 약간 북쪽에 2단의 월드를 높직이 쌓고 그 위에 지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중층 건물로 기둥은 다포집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입니다. 


근정전, 출처 : 위키백과



건물의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이 없이 전체가 하나의 통관으로 트여 있어요. 뒷면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고 그 뒤에 "일월오악도"의 병풍을 쳤습니다. 천장 중앙에는 절집 부처님 위의 닫집처럼 보개를 마련해 구름무늬를 새기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 한쌍을 달면서 권위 있는 장식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외부 못지않게 장엄하죠. 


일월오악도(일월오봉도, 일월 곤륜도)


근정전 건물의 진짜 아름다움을 하나 꼽으신다면요? 


이 건물의 진짜 아름다움과 위용은 여기 들어오는 동선을 그대로 따라 들어올 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광화문으로 들어와 흥례문에 다다르고 금천을 가로지르는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에 이르면 늠름한 근정전이 엄습하듯 다가오죠. 그리고 근정전으로 다가가면 그 배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발걸음을 이동할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움직이는 영상처럼 따라와요. 건축은 하나의 건물에 다다르는 시공간적 거리가 관객의 심리에 크게 작용하죠. 정전 앞 넓은 마당은 회랑으로 반듯하게 둘려 있고 바닥에는 조각보를 이은 듯한 박석이 추상무늬처럼 깔려 있어요. 근정문에서 근정전 월대까지 정가운데로 난 어도, 좌우로는 아홉 쌍의 품계석이 있죠. 이것은 마치 근정전의 액세서리와도 같은 효과가 있어 이 건축의 주제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근정전의 뜻은 뭔가요? 


정도전은 근정의 뜻을 이렇게 풀이했어요.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이어서 서경의 말을 끌어와 부지런함의 미덕을 강조하고, 그 역사적 사례를 제시했죠.  

"그러나 임금으로 오직 부지런해야 하는 것만 알고 부지런해야 하는 바를 모르면 그 부지런하다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고 까탈스러움에 흘러 보잘것없는 것이 됩니다. (...)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쉴 때는 쉬고 일할 때는 일하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죠. 다르게는 무조건 부지런하기보다 인생의 여백을 둬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강조하죠. 

"부디 어진 이를 찾는 데 부지런하시고, 어진 이를 쓰는 것은 빨리 하십시오." 

청와대라는 이름과 비교해 본다면 근정전의 뜻은 참 깊죠? 


근정전 건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근정전 월대에는 사방으로 돌계단이 나 있고 그 난간 기둥머리에는 모두 세 종류의 석상의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방을 지키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상이고, 또 하나는 방위와 시각을 상징하는 십이지상이며, 마지막 하나는 서수상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관념의 의미로 이 공간의 치세적 의미를 강조하죠. 또한 이런 돌조각들이 있음으로 기하학적 선과 면으로 구성된 차가운 월대에 생기를 감돌게 합니다.  


석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석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그중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월대 남쪽 아래위 모서리에 돌출된 멍엣돌 네 곳에 있는 또다른 짐승 조각 한 쌍입니다. 암수 한쌍이 분명한데 두 마리가 몸을 밀착해 있으며 딴청을 부리듯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어미에게 바짝 매달려 있는 새끼까지 표현되어 있어 절로 웃음을 자아내죠. 이 석상에 대해 아직 정확히 고증된 바는 있지만 재밌는 전설 하나가 유득공(1749~1807)의 "춘성 유기"를 통해 소개되고 있어요. 

이 책은 유득공이 스승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와 함께 서울을 나흘간 유람하고 쓴 근일인데, 셋째 날 폐허가 된 궁터를 돌아보다가 이 돌짐승을 보고는 '석견'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리(영제교) 건너 북쪽은 곧 근정전 옛터다. 그 계단이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계단 동서 모서리에 암수 석견이 있다.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가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는 것이며 개가 늙으면 새끼가 이어가라는 것이라고 말한 것인데 그럼에도 임진왜란의 화를 면치 못했으니 (그렇다면) 석견의 죄란 말이냐, 다만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 모름지기 믿을 것이 못된다. 


이러한 석견과 똑같은 조각 한쌍이 창덕궁 뒤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래나무가 있는 빈 건물터 돌계단 옆에도 있었어요. 이 석견상에는 새끼가 어미 앞에 새겨져 있죠. 암수 한쌍이 다리를 마주 교차하고 있는 자태나 수컷이 암컷의 등에 바짝 밀착된 모습은 에로틱한 느낌마저 풍기는 명작으로, 근정전 월대의 그것보다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여하튼 이러한 유머 넘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왕조의 너그러움과 석공의 유머 감각이 넘치는 부분이죠. 


근정전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위치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내가 안내할 때 항상 답사객들을 근정문 행각 오른쪽 모서리로 모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근정전을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지점이기 때문이죠. 여기 서면 북악산과 인왕상을 양옆에 끼고 듬직한 월대 위에 한껏 말개를 편 근정적 팔짝지붕이 더없이 아름답고 품위 있게 보이거든요. 그리고 이 자리에서 보아야 앞마당에 깔린 박석의 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마치 조각보를 만들듯 불규칙하게 생긴 넓적한 박석을 촘촘히 이어 붙였는데 그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선이 월대의 수직 · 수평선, 그리고 근정전 처마의 가녀린 곡선과 환상적으로 어울리거든요. 불규칙한 선, 기하학적 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처마의 곡선, 북악산과 인왕산의 자연스러운 능선의 어울림은 어느 미국 미술평론가의 말대로 포스트모던적인 어울림이죠. 


박석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박석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조화를 꾀했던 우리나라 건축에 걸맞은 훌륭한 바닥재입니다. 이것은 마감을 깔끔하게 하지 못했다의 문제가 아니에요. 조선시대에도 박석의 불규칙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대신들이 었었어요. 문종 때 좌의정 황보인의 경우 박석을 치우고 중국식 전돌인 당전을 깔아 시험해 보라고 건의를 드리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임금이 말하기를 "당전이 만약 오래 못 가서 부서진다면 박석을 도로 깔아야 하는 폐단을 어찌하겠는가? 먼저 사정전 뜰에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했죠. 여하튼 그 후에도 계속 근정전 월대에는 박석이 깔렸으니 아마 그때 시험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아요. 박석은 기능적으로도 꽤 훌륭한 고급 재료예요. 강한 화강암판이라서 잘 깨지지 않는 견고성이 있고, 표면이 적당히 우툴두툴해 미끄러짐을 방지해주죠. 땡볕에도 또한 눈부심이 없어요.  


박석,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박석,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²


비 오는 날 근정전으로 와서 박석 마당을 볼 때, 빗물이 박석 이음새를 따라 제 길을 찾아가는 동선의 아름다움은 이로 말할 수 없어요. 물길이 마냥 구불구불해서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하수구로 급하게 몰리지 않습니다. 근정전 앞마당의 배수시스템은 뒤쪽이 앞쪽보다 약 70센티 정도 높여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울기에 의한 것도 있어요. 근정적 박석이 눈에 잘 들어오는 것도 수평이 아니라 뒤쪽이 약간 올라간 때문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음새가 물길을 돌리면서 속도를 줄여주게 하는 것 역시 그러한 배수를 고려한 옛날 분들의 슬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박석은 아직도 나오는 건가요? 


근정전에 깨진 박석이 많아 갈아 끼워야 하는데 이 박석을 구할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었죠. 박석은 얇은 화강암판으로 두께는 보통 4치(12센티미터)이고 넓이는 구들장이나 빨래판의 두배 정도입니다. 얇다는 뜻으로 박석이라고 부르나 문헌에 따라서 널찍하다는 의미로 광박석이라고 표현된 곳도 있어요. 주로 궁중 건축에 사용된 포장재료로 지금도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나 전정, 종묘의 진입로 및 정전과 영녕전의 월대, 왕릉들의 참도 등에도 깔려 있죠. 서울의 옛 지명 중에도 박석고개라는 곳이 여럿 있는데, 임금의 행차가 있는 왕릉으로 가는 고갯길이었던 곳을 의미하죠.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 공사에서 박석 채취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여하튼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현지조사를 하여 마침내 강화도 매음리에서 광맥을 찾아냈습니다. 여러 부처들과 협의를 얻어 채석하기까지 3년이 걸렸어요. 이렇게 채취된 박석들은 2010년 8월 15일에 준공된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박석의 부활이었죠.




1. ‘3문 3조’의 기준에서 3조는 연조, 치조(또는 내조), 외조를 말하는데, 연조는 왕과 왕비 및 왕실 일족이 생활하는 사사로운 구역으로 경복궁의 연침, 동소침, 서소침 등 3채의 침전이 이에 속한다. 치조는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행하는 공공구역으로서 종전과 편전으로 이루어지고 보평청과 정전이 여기에 속한다.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구역으로 주방 이하 동서 누고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3문은 고문(庫門, 외조의 정문), 치문(雉門, 치조의 정문), 노문(路門, 연조의 정문)인데 경복궁의 경우 오문(午門,남문)이 고문, 전문(殿門,근정문)이 치문이 된다. 단 보평청 뒤와 연침 사이 향랑에 기록에는 없지만 노문에 해당하는 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 3문 3조로 이루어진 궁실 전체를 다시 궁성으로 둘러싸고 거기에 동문(건춘문), 서문(영춘문), 남문(광화문, 2층 누문)을 설치한 다음 남문 앞쪽 대로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6조, 사헌부 등 관청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태종 때에는 경회루를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 장소를 마련하였고, 세종 때에는 동궁, 후궁, 혼전(魂殿), 학문연구기관 및 후원까지 완비하여 이른바 ‘법궁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 주요 전각뿐 아니라 문에도 고유한 이름을 붙였다. 사장전 좌우에 만춘전, 천추전을 짓고, 연침인 강녕전 일곽 뒤쪽에 교태전, 함원전, 자미당, 인지당, 청연루, 종회당, 송백당 등 후궁을 지었다. 동궁은 계조당과 자선당으로 구성되었으며, 후원에는 못을 파고 주변에 나무를 심고 취로정 등 정자를 세웠다. (출처 : 한국 컨텐츠 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322&index_id=cp03220436&content_id=cp032204360001&search_left_menu=7 


2. 문화재에 관한 다양한 정보 및 이미지를 확인하고 싶으면 다음의 사이트들을 추천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s://m.cha.go.kr/main/index.do (모바일),

국가 문화유산 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경복궁 관리소 https://www.royalpalac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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