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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Sep 17. 2020

경복궁에 관한 유홍준님과의 대화 2.

가상 인터뷰 방식을 통한 독서 이해 방법『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https://brunch.co.kr/@wringkle/320

위 글의 다음 편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을 인터뷰식으로 바꾸면서 더불어 여러 이미지와 추가 설명이 필요한 내용을 덧붙이다 보니 생각보다 분량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인터뷰 방식의 독서 재해석과 더불어 여러 보충 자료를 찾아보는 행위를 통한 독서 이해 방법론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독서를 하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러한 방식은『존재 양식의 독서를 위한 4가지 방법.』 https://brunch.co.kr/@wringkle/243 에서도 설명한 바 있는 매우 유용한 독서 방식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정리된 자료를 만들 수 있다는 측면에서나 훗날에 상기를 위하여 다시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는 측면에서도 유용한 편이죠. 물론 단점으로는 앞의 장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독서법입니다. 

이렇게 내용을 길게 쓴 까닭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필수로 다녀가기도 한다는 이 조선의 법궁에 대한 이해와 역사 인식을 통해 자긍심을 일깨워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전통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라나는 아이와 문화재에 흥미를 보이지 않던 친구와 친구와 그리고 전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러한 글이 그런 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티끌만큼의 바람도 있습니다. 그에 앞서 이 글을 보는 이들이 우리 문화재에 흥미를 갖고 유홍준님의 책과 여러 관련 자료를 곁에 두고 찾아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각설하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경복궁의 천재지변과 사람들의 인식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나요? 


조선왕조에서 임금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거죠. 천재가 아닌 인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대 왕정에서 왕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은 하늘뿐이었죠. 화재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은 임금에게 죄가 없음에도 이를 계기로 임금을 압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고조차도 왕의 부덕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것은 때때로 권력이 약한 왕이 대신들에게 휘둘리고 놀아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통치 구조에는 임금, 대신, 백성이라는 세 계층과 그 위에는 하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경복궁에는 하늘이 올바른 통치를 하는가를 지켜보는 상징적 조각이 있죠. 그 예가 명당수를 내려다보는 네 마리의 '천록' 상입니다. 


천록상, 출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천록상 조각에 대해 알려주세요. 


천록상은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텅 빈 공간에 명당수가 가로질러 흐르고 금천교가 놓여 있습니다. 이 다리를 영제교라고 부릅니다. 이 돌다리 양 옆의 호안석축에는 물길을 내려다보는 천록이 있죠. 이 짐승은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라고 여겨지는 신수입니다. 재밌는 점은 이 동물이 위엄이 있다기보다 어딘지 능청스러운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중 한 마리는 아인슈타인이 '메롱'을 하는 것처럼 혓바닥을 날름 내밀고 있죠. 


이 조각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이 조각은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 조각들은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경복궁 복원 때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았죠. 그중에 한 마리는 이상하게 등이 파였고 뚜껑이 덮여 있습니다. 이 천록에 대해서는 유득공이 영조 46년 3월 3일 스승 박지원과 선배 이덕무와 함께 나흘간 서울을 유람하고 쓴 "춘성 유기"에도 나옵니다. 


다음날 경복궁 옛 궁궐에 들어갔다. 궁 남문 안에는 다리가 있고 다리 동쪽에는 돌로 만든 천록이 두 마리, 서쪽에는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유득공이 유람한 당시에는 천록 한 마리가 없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며 "필시 다리 서쪽의 하나가 옮겨진 듯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남별궁에서 보았고 흥선대원군의 복원 때 다시 원위치되었습니다. 


경복궁의 기본 골격은 어떻게 되나요? 


기본 골격은 3문 3조입니다. 3문이란 정전(근정전)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말합니다. 3조는 외조, 치조, 연조를 말하는 것으로 외조는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문무백관을 조회하는 곳인 근정전 권역입니다. 치조는 정무를 보는 사정전 권역으로, 여기에는 만춘전, 천추전 등의 여러 건물이 입니다. 이 건물들을 편전이라고도 부르죠. 연조는 흔히 침조라고도 부르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입니다. 왕의 침소인 강녕전, 왕비의 침소인 교태인 그리고 살아 있던 대왕대비(조대비)를 위한 자경전이 있습니다. 민가로 치면 치조는 사랑채이며 연조는 안채이죠. 치조에 해당하는 공간은 없습니다. 


경복궁 전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공간 분할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나요? 


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반듯한 축 선상에 건물을 배치하고 기하학적 공간 분할과 정연한 대칭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 구조의 묘미는 기본 골격의 다음으로 이루어지는 변주에 있죠. 이는 연조 공간이 끝나는 왕비의 교태전과 대왕대비의 자경전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교태전 뒤에는 민가의 뒤뜰 같은 개념을 받아들여 십장생 굴뚝이 있는 아미산 정원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자경전과 교태전 담장은 여성 공간으로의 성격을 살려서 꽃담장으로 장식했죠. 이러한 장식과 공간은 왕궁의 엄정성과 긴장성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건축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요소입니다. 부지런하게 일한 왕이 침소에 들 때만큼은 그 권위로부터 나오는 긴장을 다소 벗어버리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온 셈이겠지요. 


그러한 공간 외의 다른 공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치조 공간 서쪽으로는 연회를 위한 경회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제사를 위한 죽음의 공간인 태원전이 있죠. 본래 그 연조 공간 뒤쪽으로 여러 건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장고나 그 밖의 함화당, 집경당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 대신 궁 안쪽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과 향원정이 있어 안으로 들어갈수록 재미와 깊이가 있어 한, 두 시간 만에 이 14만 평의 넓은 공간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죠. 


외조 공간인 근정전 외에 치조 공간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통해 치조 공간으로 들어서면 3단 석축 위에 있는 사정전이 보입니다. 이곳이 바로 왕의 집무실이죠. 다섯 칸 집에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으며 팔 짝 지붕입니다. 여기에서 왕은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함께 공부하는 경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 오면 매일 5시 혹은 그 이전에 일어나 조회를 보았던 세종의 일화가 생각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정전, 출처: 문화재청


사정전 내부, 출처: 나무 위키



이 건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사정전 건물은 열다섯 칸의 규모로 건물 중간중간에 있어야 할 고주(높은기둥)를 대담하게 생략한 호방한 구조입니다. 천장이 아주 높고 바닥 전체에 마루를 깔아 공간감이 장대하게 느껴지죠. 임금의 자리는 한단 올린 어탑위에 마련되어 있고 용상 뒤로 "일월곤륜도"가 둘러져 있습니다. 용상 앞 기둥머리에는 벽화로 '운룡도'가 그려져 있어요. 복제화이지만, 임금의 권위를 품위 있게 장식하고 있죠. 이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반드시 경복궁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국립 고궁 박물관에 가봐야 합니다. 사정전 좌우로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사정전을 보좌하듯 배치되어 있습니다. 천추만세를 봄, 가을로 나누어 붙인 것입니다. 임금은 주로 여기에서 정무를 보았습니다. 격식 있게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으나 근신들과 편하게 논의를 하기도 했죠. 때문에 사정전과는 달리 온돌을 깔아 난방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그 권역 전체는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일반 행정을 보는 사무실로 편전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앞쪽의 긴 행각은 임금의 전용 곳간으로 내탕고라 했습니다. 임금에게는 지금으로 치면 판공비, 기밀비에 해당하는 돈과 재물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를 사정에 맞게 풀어 백성을 구제하거나 신하에게 포상을 하기도 했죠. 참고로 내탕금은 각 고을 수령에게도 있었습니다. 


내탕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내탕고가 흥미롭네요. 좀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내탕고는 '천자문'의 '천지현황 우주홍황'의 순서로 '천자고'부터 '황자고'까지 모두 여덟 칸입니다. 16세기 조선백자 대접 중에는 밑바닥에 '천지현황'을 새긴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해당 창고에 들어갈 것임을 아마 가마 들어갈 때부터 명시한 것이죠. 이렇게 하여 민가에서 빼돌려 쓰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천지현황'이 새겨진 백자 대접 한 세트가 국보 제2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백자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이번에는 연조 공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마지막 권역인 연조 공간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내전 또는 침전이라고도 합니다. 왕과 왕비의 공간을 강녕전과 교태전으로 나눈 것은 민가 양반 가옥에서 사랑채와 안채를 나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인과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는 강년전에는 넓은 월대가 있어 크고 작은 행사장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교태전에는 월대가 없는 대신 행각들이 연결되어 있어 많은 시녀와 함께 안 살림을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왕의 공간인 강녕전은 정면 열한 칸의 독립건물로 대단히 장중한 인상을 주고, 교태전은 이에 반해 단아한 아름다움과 아늑함을 주죠. 


강녕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교태전, 출처: 위키백과


교태전이 강녕전, 둘 중에 무엇이 더 큰가요? 둘 다 용마루가 없네요? 


교태전이 강녕전보다 큽니다. 마치 민가에서 사랑채보다 안채가 큰 것과 같은 이유죠. 그리고 용마루가 없는 까닭은 왕이 곧 용을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창덕궁 대조전이나 창경궁 통명전 등의 왕과 왕비의 침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죠. 참고로 강녕전 뒤로 돌아가면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이 있고 양 날개로 펼쳐진 담장에는 주황빛 전돌로 쌓아 올린 굴뚝이 있어요. 굴뚝에는 '천세만세千歲萬歲'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글자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닮은 추상무늬처럼 생겼지만, 다르죠. 이 점은 대칭은 대칭인데 약간 어긋나게 하는 '비대칭의 대칭'으로 엄격함과 흐트러짐을 동시에 구현하는 한국 미술의 센스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양의문 굴뚝,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교태전 양의문에 들어서기 전에 눈에 띄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강녕전의 굴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례 이 굴뚝이 교태전의 굴뚝인 줄 알고 지나가지만, 실은 앞 건물인 강년전의 굴뚝을 여기까지 빼낸 겁니다. 교태전 굴뚝은 아미산 뒷동산에 있어요. 우리나라 온돌의 굴뚝은 건물 뒤쪽으로 멀리 빼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양반집이나 절집 굴뚝은 뒤켠에 높이 세워져 있죠. 그런데 강녕전 건물 뒤는 뒤뜰이라는 빈 공간이 없어서 굴뚝을 빼낼 곳이 마땅치 않아요. 그렇다고 현대 고층 건물의 배기통처럼 처리하기도 애매하죠. 그걸 마치 교태전의 담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거예요. 그래서 굴뚝인 줄 모르고 지나가죠. 


우리나라 굴뚝이 집 밖으로 멀리 나와 높이 세워지는 이유는 뭔가요? 


난방의 문제는 알다시피 열을 어떻게 오래 붙잡아두고 연기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잘 빠지느냐에 있습니다. 본래 불은 위로 솟는 성질이 있어서 이것을 막으면 연기가 굴뚝이 아닌 아궁이 쪽으로 나오게 됩니다. 서양은 그래서 바로 위에 굴뚝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하면 열도 금방 빠져나가버리죠. 구들은 연기를 오래 잡아두고 연기만 빼내는 데 정말 좋습니다. 구들을 놓을 때 땅 밑을 파내 '개자리'라는 것을 만듭니다. 불은 위로 솟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습하고 찬 공기 쪽으로도 간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죠. 개자리는 구들개자리, 고래개자리, 굴뚝개자리 세 군데에 설치하는 데 그중 고래 개자리가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불을 눕히고 오래 붙잡아두게 되죠. 


출처 : LG 사이언스 랜드 홈페이지


아미산 꽃 계단에 대해 말해주세요. 


'3문 3조'의 마지막 건물인 교태전 뒤에는 아름다운 꽃동산이 있어요. 아미산 화계(花階)라고 불리는 이 꽃동산은 진정 여성적 공간입니다. 또한 자경전 꽃담장과 경회루 연못과 더불어 우리 궁궐이 다른 어느 나라 궁궐보다도 인간적 체취가 느껴지게 만드는 요소라 할 수 있죠. 이 아미산 화계는 경회루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을 모아 가산을 만들면서 네 개의 꽃 계단으로 축조한 것입니다. 화계에는 모란, 진달래, 국화, 앵두, 미선나무 등의 꽃밭과 계단식 화단 위에 올라앉은 괴석과 수련을 담는 석조 같은 석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낙하담, 아미산의 계단식 화단에 위로 높직하게 설치한 석조(石槽) 형식의 돌 연못. ‘낙하담(落霞潭)’은 ‘노을이 내려앉는 연못’이라는 뜻임(문화재청)
함월지, 낙하담은 동쪽에, 함월지는 서쪽에  있음. ‘함월지(涵月池)’는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으로 달이 이 돌 연못의 물속에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임(문화재청)


이러한 꽃 계단은 우리나라 동산 조성에 큰 자랑입니다. 우리나라의 집이 대개 산자락을 등지고 위치하기에 건물 뒤쪽은 비탈로 남계 되는 것을 화계로 만들어 산사태도 막고 꽃밭을 가꿀 수 있도록 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죠. 교태전 화계는 밝고 화사한 꽃담장과 더불어 세 번째 단에 아름다운 네 개의 굴뚝이 줄지어 있어 환상적인 공간이 되었어요.  


아미산 화계, 출처: 문화재청

굴뚝이 참으로 아름답네요. 


붉은 벽돌 30장은 6각형 기둥으로 쌓은 뒤 그 위에 기와지붕을 올리고 지붕 꼭대기에 연기 구멍으로 연가(烟家))를 각기 네 개씩 얹었어요. 각 면에는 별도의 전돌로 온갖 무늬를 만들어 붙였죠. 이 굴뚝들은 별도로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조화롭고 환상적입니다. 


아까 교태전 꽃계단과 더불어 자경전 꽃담장을 언급하셨는데, 그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겠어요? 


자경전 십장생 굴뚝, 위키 백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고종의 어머니인 철종의 왕비(철인왕후)가 생존해 있었고,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와 익종(효명세자)의 왕비인 신정왕후(조대비)도 생존해 있었어요. 그래서 이분들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필요했죠. 자전(慈殿, 사랑 자 또는 어머니 자/대궐 전)이라고 하는데, 그중 신정왕후(조대비)가 기거하던 곳이 아름다운 곳이 자경전이에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친아들인 고종이 왕으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대비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인 것이라고 하죠. 조대비는 이곳에서 1866년까지 수렴청정(나이 어린 임금이 등극(登極)했을 때 왕대비(王大妃)나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왕을 도와서 정사(政事)를 돌봄을 이르는 말)을 했습니다. 자경전 굴뚝은 아예 별채처럼 떼어내면서 아름다운 십장생 벽화를 장식했어요. 마치 설치 미술이나 장식 건축처럼요. 이것도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자경전 담장, 위키 백과 


담장 세부 무늬, 위키 백과

 

자경전은 집보다 벽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죠. 담장에는 거북등 무늬, 만자 무늬, 능화꽃 무늬 등이 연속적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수복강녕(壽福康寧) 네 글자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죠. 또 매화, 난초, 모란, 연꽃, 대나무, 국화 등이 그림처럼 디자인되어 있어요. 그게 참 밝고 화사하죠. 붉은색 벽돌 자체가 안 그래도 화려한 데다 거기에 온갖 꽃무늬를 더했으니 사치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법한데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궁궐 건축의 미학이 여기서도 발휘되나 봅니다.

  

연조, 치조, 외조 공간을 제외한 다른 공간도 좀 보고 싶어요. 


구중궁궐(九重宮闕, 아홉 번 거듭 쌓은 담 안에 자리한 대궐.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깊이 자리한 궁궐을 가리킴.)이라고 하잖아요? 물론 언급하신 3조 공간 외에도 궐내각사(조선왕조의 관청들, 즉 궁궐 외부에 자리하고 있던 육조 외에 왕을 근저에서 보필할 필요가 있던 관원들의 관사인 빈청, 승정원, 대청 등 궁궐 내부에 자리하고 있던 관청들을 말함.) 외에도 수많은 부속건물이 있습니다. 마치 지금의 세종시 행정수도처럼 행정적인 부분과 청와대가 모두 결합된 형태인 것이죠. 물론 경복궁 내의 반의 반도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만(글을 쓴 2011년 기준, 현재 현황은 각주 참고 바람), 제가 답사로 인솔할 때면 꼭 들리는 곳이 있어요. 자경전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보이는 함화당과 집경당입니다. 


함화당, 나무 위키

일제의 무자비한 경복궁 훼철 때에도 살아남은 건물이에요. 원래는 빈궁들의 거처였는데, 고종이 건청궁에 살던 시절에는 외빈을 접견하기도 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복원 건물들과는 달리 예스러운 격조가 느껴지지 않나요? 


집경당, 나무 위키


또 하나의 건물은 바로 수정전이에요. 사정전 행각 밖에 있는 이 건물은 세종 때에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니 바로 훈민정음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죠. 집현전이 폐지된 뒤에는 세조 때 예문관으로 쓰이고, 흥선대원군 시절에 복원하면서 수정전이라는 편전(궁궐에서 사무실로 쓰는 건물)으로 사용되었죠. 앞에는 다섯 벌대로 쌓은 월대가 있잖아요? 학자들이 아마도 이곳에 나와 바람도 쐬고 대화도 나누었을 거예요. 이런 구조 때문에 고종 31년(1894) 갑오동학농민전쟁 이후 군국기무처가 이곳에 들어오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여기에서 이루어진 유명한 조치가 갑오경장이죠. 


수정전, 위키 백과


다른 곳도 알려주세요. 


교태전 서쪽 행각 쪽으로 가보면 함원전과 흠경각이 있어요. 흠경각은 세종 20년(1438)에 장영실이 6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옥루기륜이 설치된 곳이기도 합니다. 옥루기륜은 시각과 방위와 계절을 알려주던 자동 천문 물시계예요. 옥류기룬의 산의 사방에는 농촌의 사계절 풍경을 그린 『시경』「빈풍 칠월(豳風七月) 편을 진열해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여 백성들이 농사짓는 데 도움을 주려 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경각, 나무 위키




흠경각옥루, 출처: 나무 위키, YTN

https://youtu.be/TT3603s-__0



경복궁 답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아무래도 경복궁 서북쪽 외진 곳에 있는 태원전이 아닐까 싶어요. 경복궁을 소개하는 여러 책에서는 여러 선왕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그곳은 사실 선원전으로 지금 국립민속 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곳이에요. 태원전은 죽은 이를 위한 빈전(殯殿, 염할 빈/궁궐 전)입니다. 빈전이란 왕과 왕비가, 상왕과 대비가 승하했을 때 염(소렴과 대렴)을 마친 시신이 안치되는 재궁(왕과 완비의 관을 높여 부르는 말)을 모시는 전각이에요. 어째 그래서 더 단정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지 않나요? 망자란 이승에서 보면 세상을 떠난 자이지만, 저승 입장에서는 새 손님이기에 주검 시(尸) 변에 손님 빈(賓) 자를 써서 빈전(殯殿)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저승은 서쪽이기 때문에 서쪽 궁장(궁궐 성벽)에 바짝 붙여지었죠.  


태원전, 나무 위키


태원전은 꽤 중요한 장소였을 것 같아요. 


상례(喪禮)는 국조 5례 중 하나였기에 이 건물 역시 대단히 중요했죠. 태원전은 스무 칸(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 규모에 그 부속건물로서 열네 칸의 영사재(永思齋), 열 칸의 공묵재(恭默齋), 네 칸의 숙문당(肅聞堂), 열한 칸 세답방(洗踏房), 그리고 행각들이 있습니다. 태원전 앞에는 丁모양의 긴 캐노피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에 들어서면 자뭇 엄숙함이 느껴지는 구조이죠. 전각과 대문의 이름을 한번 볼까요? 태원전은 하늘이라는 뜻이에요. 영사재는 오래도록 생각하여 가슴속에 새겨둔다는 뜻이며,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살피듯 한다는 광림문(廣臨門), 엄숙함을 세운다는 건숙문(建肅門), 의식을 마무리한다는 예성문(禮成門) 등이 있죠. 그중 건물의 모습이나 이름이 태원전의 성격에 가장 맞는 건 숙문당(肅聞堂)이라고 봐요. 이곳은 돌아가신 이의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혼백이 남긴 말씀을 엄숙한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 담겨 있죠. 우리 한옥은 세 칸 집이 가장 예쁘다고 하는데, 같은 세 칸이지만 기둥이 높이 지붕이 묵직하여 아담하면서도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지죠. 이런 공간은 죽음을 대비한 공간이고 항상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을씨년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1868년 중건된 이후 고종 9년(1872)되는 해에 조선왕조 건국 여덟 번째 회갑(+480년, 조선은 1392에 건국되었다)을 맞이하면서 태조 이성계의 초상과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어진을 함께 모십니다. 그리고 중건 이후 두 분의 재궁(관)을 여기에 모시죠. 신정왕후(1890)와 명성황후(1895)에요. 


숙문당, 문화재청


경복궁 중건 이후에도 수난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명종 8년(1553)에 일어난 내전일곽(왕과 왕비의 침소인 내전을 두고 주변을 건축적인 요소로 경계를 삼은 전체를 말함) 대화재는 이듬해 복구되었습니다만, 38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죠. 그리고선 273년간 폐허 상태로 남겨진 채 창덕궁이 왕궁으로서 몫을 다했어요. 고종 2년(1865)에서야 흥선대원군의 중건 공사로 장엄하게 복원되죠. 실추된 왕권의 회복과 왕조의 부흥을 꿈꾸던 중건은 결국 고종 5년(1868)에 완성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으로 고종은 재위 10년(1873)에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을 지어 따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종 13년(1876)에 대규모 화재로 800여 칸 건물이 소실되어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겪고 1885년에 다시 경복궁에 돌아왔고 그로부터 10년 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게 되죠(아관파천). 2년 뒤 1897년 환궁한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덕수궁)이었습니다. 결국 중건한 뒤로 18년 정도밖에 그곳에서 못살았아요. 결국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기 한해 전 1904년에 경복궁에 일제 통감부가 들어왔으니 그로서 경복궁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인마저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일제의 경복궁 훼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일제가 점거한 후에도 경복궁은 법궁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어요.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훼철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1915년 시정(始政) 5년을 기념하여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고 많은 전각을 헐고 민간에게 건자재를 팔아치웁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이었던 건청궁을 헐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세우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민간에 팔아넘긴 경복궁 전각이 4천여 칸이 넘었어요.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근정전 앞에 세우기로 확정하고 흥례문 권역을 헐고 이듬해 공사에 들어갔고, 1917년 11월에는 창덕궁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깁니다. 결국 총독부 건물은 1927년에 준공되었고 이 과정에서 광화문이 헐려 동북쪽 담장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건물이 헐려서 오직 근정전과 침전 구역, 경회루와 향원정만 남게 된 상태로 해방을 맞이하죠.  


조선 총독부, 나무 위키


이후에도 한참 복원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네. 총독부 건물은 아시다시피 정부청사로 사용되었죠. 5·16 군사 쿠데타 후에 수도방위사령부 30 경비단이 태원전 권역으로 들어와 군부대 주둔처가 되었고, 경복궁 동쪽 사옹원 자리에 국립중앙박물관(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지면서 더욱 파괴될 뿐이었습니다. 



총독부 철거, 나무 위키


제 모습을 찾아간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경복궁 복원 계획을 발표하고 96년에 김영상 대통령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 버리죠. 그리고 이듬해 대대적인 복구를 시작했어요. 2010년에는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죠. 복원한 것은 2,720평(약 9,000 제곱미터) 89채의 건물입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한 건물 36동을 포함해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죠. 참고로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퍼센트 수준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경복궁의 모습입니다.(이후 복원 사업은 각주 참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영상 뉴스, 나무 위키, https://youtu.be/ad8dA0y9EWw




경복궁 복원 사업 - 출처: 위키백과


1990년에 들어서 2030년 완료를 목표로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건립되어 공진회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1995년 철거하였으며, 1926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1997년 철거, 1935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1999년 철거,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 수정전 남측의 한식 건물인 무명각을 1998년 철거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박물관 창고로 건립(1915년)된 부속 건물은 현재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2010년 기준으로,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m2(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2010년 9월 이후 광화문 권역이 완전 개방되었다.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이 추진 중으로 1차 복원이 중심 건물들로 경복궁의 뼈대를 갖추는 것이었다면,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수정전 앞 궐내각사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2차 복원에는 흥복전 권역이 복원 예정에 있고 전체적인 궁장과 동서십자각도 복원 예정에 있다. 그 이후 장기 복원계획은 국립 고궁박물관과 국립 민속박물관 및 관리사무소, 주차장 등 시설의 이전에 맞춰져 진행된다.[출처 필요] 


1차 복원정비사업


지난 1990년 시작하여 당초 2009년 완료될 예정이었던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은 총 1789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강녕전 등 93동 1만743.85m2(3250평)를 복원할 계획이었다. 사업기간을 1년 연장한 2010년 기준으로 1572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89동 8987m2(2720평)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하여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하여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사업기간 중 옛 조선총독부 청사와 옛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전통공예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 데서 나타나듯 일제의 유산인 네거티브 문화재를 철거하고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宮制)를 완비하는 것이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의 목표였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 경복궁 중심축의 복원이 추진되었다. 구체적으로 침전 권역(1990∼1995) 사업을 통하여 강녕전 등 12동의 건물이 복원됐으며 동궁 권역(1994∼1999) 사업 당시 자선당 등 18동의 건물이 세워졌다. 또한 근정전이 일제강점기때 축이 틀어진것을 고치려고 '근정전 정비공사'(2000년~2003년)까지 복원을하였고,흥례문 권역(1996∼2001) 사업 당시 흥례문 등 6동의 건물이, 태원전 권역(1997∼2005) 사업으로 태원전 등 25동의 건물이 각각 복구되었다. 끝으로 광화문 및 기타 권역(2001∼2010) 사업으로 광화문과 건청궁 장안당 등 28동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1단계 (1990년 ~ 1995년 12월) : 침전 권역 복원 (강녕전, 교태전 등 12동 794평 복원)

2단계 (1994년 ~ 1999년) : 동궁 권역 복원 (자선당, 비현각 등 18동 352평 복원)

3단계 (1996년 ~ 2001년) : 흥례문 권역 복원 (흥례문 등 6동 517평 복원)

4단계 (1997년 ~ 2005년) : 태원전 권역 복원 (태원전 등 25동 496평 복원)

5단계 (2001년 ~ 2010년) :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 (광화문, 건청궁, 함화당, 집경당 등 32동 1,091평 복원)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 (2006년 ~ 2010년) : 광화문 권역 복원


2차 복원정비사업


문화재청은 2010년 1차 복원 정비 사업이 완료된 후 2011년 부터 2030년까지 20년 계획의 제2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계획기간을 6단계로 구분하여 단계별 세부시행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며, 총 254동을 복원하고 총 사업비는 약 5,4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 전각을 전면 복원하며 상대적으로 복원 의미가 떨어지는 지역으로 판단한 102곳은 기단 및 초석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사업이 완료되는 2030년 까지 전체 379동으로 원래 규모의 75.8% 수준으로 복원하며, 5단계 선원전 일대 복원에서는 복원지의 대부분인 73동을 기단·초석으로 복원해 미복원한 상태로 둔다. 2013년 5월 중 문화재청은 예산의 효율적 활용이 필요하며, 관람객 동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2010년에 수립된 기존의 계획을 대폭 삭감하는 "경복궁 2차 복원정비계획 조정안" 연구 용역에 착수했다. 권역별 대표 건물만 복원하고 부속 건물은 복구하지 않으며, 국립고궁박물관 철거 계획도 빠지는 것이 주 내용이다. 2015년 소주방 영역(내•외소주방등 18동)이 복원되었다. 


단계별 사업 계획[33]((2011~2045년), 약 3천억원 소요 추정)


1단계 궁중생활권역 (소주방 및 흥복전 권역 등, 2011년 ~ 2021년) : 소주방 영역(내·외소주방, 대전생물방), 흥복전 영역(흥복전, 영훈당)등 총 28동 원형 복원, (빈궁소주방, 다경합, 원역처소)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2단계 제왕교육권역 (동궁 및 오위도총부 권역 등, 2019년 ~ 2023년) : 동궁영역(계조당), 건춘문영역(수문장청 등), 오위도총부 영역(상의원, 오위도총부 등) 총 14동 원형 복원, (춘방, 계방, 별군직청)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3단계 궁중통치권역 (궐내각사 권역 등, 2026년 ~ 2034년): 영추문 영역(영추문 및 수문장청 복원), 궐내각사 영역(빈청, 정원, 의약청), 등 총 14동 원형 복원 (국별장직소, 선전관청, 내반원) 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4단계 궁중의례권역 (혼전 및 선원전 권역, 2031년 ~ 2042년): 문경전 및 회안전 영역(문경전), 신무문 영역(수문장청 등 3동, 측간 1동), 만경전 권역, 선원전 권역(선원전, 경안당), 등 총 23동 원형 복원, (회안전 영역, 제수합 행각, 만화당 영역, 건복합) 등 기단·초석으로 복원.

5단계 궁중방어권역 (동·서십자각 및 내사복 권역, 2040년 ~ 2045년): 서십자각 영역(서십자각 1동, 궁장복원), 동십자각 궁장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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