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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04. 2020

나는 어떻게 소설을 읽는가?

존재 양식의 독서를 위한 4가지 방법.

하나의 문장 속에서 무한으로 뻗어 나가는 세상을 보기를 바라며.


시작에 앞서 - 좋은 음식과 좋은 소설의 공통점


좋은 소설은 이야기라는 특성답게 서사를 꾸려나가는데 꽤 오랜 시간을 투여합니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흰 원고지나 워드 프로세서를 활용해 꽤 오랫동안 글을 써 내려가죠. 그것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기도 하고 어떠한 관념이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언어로 창작하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어떤 형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는 처음부터 저자가 의도하기도 하고 기본적인 흐름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꾸려나가면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여러 형식과 제약 속에서 저자의 생각은 책이 되어 독자 앞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소설은 마치 요리와 같습니다. 손님은 그것을 허겁지겁 먹기도 하고 음미하며 먹기도 하죠.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음식 안에서 어떤 그리운 맛을 발견하고 요리사가 어떤 생각으로 이 음식을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리게 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지 맛있기만 해서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의 맛 너머로 떠오르는 어떤 생각과 기억이 바로 음식에 대한 감동을 만들어내죠.

마찬가지로 글의 감동이라는 것은 비단 유려한 문장이나 꽤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가 어떠한 생각으로 만들었느냐, 혹은 그 안에서 독자가 저자의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알아주길 바라느냐를 이해하거나 느끼게 될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소설 읽기의 방식도 바로 그렇습니다.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이야기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 생각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찾아내려는 방식입니다. 이를 위하여 책에 제공되는 형식을 분석하거나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비슷한 패턴의 문장을 만들어봄으로써 배움과 감동을 얻습니다.



소설을 읽는 방식에 관하여


소설을 읽는 방식은 많습니다. 흔하게는 한자리에 앉아 빠르게 책을 눈으로 넘기는 방법도 있고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마치 음식을 꼭꼭 씹듯이 몇 번이고 되뇌기도 합니다. 혹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췌해가면서 그 밑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두거나 두고두고 보려고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두기도 할 겁니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 법이니 감히 어떠한 방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 시간이 덜 드는 방식과 더 드는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이번 장에서 제안하려는 방식은 그중에서 소설을 깊이 있게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방법입니다. 깊이 있게 읽는 방법인 만큼 시간이 많이 드는 방식이기도 하죠. 참고로 이 방식은 비단 소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분야의 독서에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방법이며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장에서는 소설에 한정하여 설명하겠습니다.


※ 참고로 저는 주로 발췌와 생각의 기록을 여러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도구에 대한 설명은 『효율적 독서(학습)를 위한 디지털 도구들』을 참고하시거나 훗날 별도의 지면을 빌어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해당 장에서는 「소설」을 읽는 중에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언급을 할 뿐입니다. 서평이나 에세이처럼 독서 후 기록 방법이나 아래의 방법에 더하여 비소설, 비문학을 읽을 때 할 수 있는 추가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추후 다른 글을 통해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https://brunch.co.kr/@wringkle/69



이 방식의 목적


우리는 이따금 어떤 거장의 예술 작품을 볼 때는 한 곳에 꽤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 안에 담긴 본질을 파악하거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유사한 경험을 그림에 투영해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순간을 담은 그림은 우리의 사고 속에서 무한대의 영역으로 뻗어 나가게 되죠. 이 장을 통해 말씀드리려는 소설의 읽기 방식의 지향점도 그와 비슷합니다.

말하자면, 이 방식이 추구하는 것은 한 문장에도 허술하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작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서 그가 의도한 의미와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평소 예술적 태도와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의미들을 파악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경험했던 삶의 유사한 단면과 결합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죠. 자신만의 주석과 해석을 단다는 의미에서 지적이며 보다 적극적인 독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따르는 개인적 이유


참고로 이러한 거창한 의미에 앞서 제 개인적으로 이 방식을 따르는 까닭은 첫째로 자기 생각을 글로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재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냥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이해가 더 잘되고 또한 지적인 자극을 줍니다. 소설을 읽을 때 그 종류나 읽는 목적에 따라 서두에서 언급한 여러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나,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주된 책은 대체로 고전이거나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입니다. 그런 책들은 대체로 눈으로만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그럴 때 이 방식은 생각을 곱씹고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나만의 기록물로 남으니 그저 눈으로 읽는 것보다 만족감이 높습니다.



구체적인 독서 방식과 예시


여기서 말씀드릴 독서 방식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생각 적기, 소설 쓰기, 문장과 관련된 다른 분야의 예술 작품 찾아보기, 문장과 관련된 텍스트」를 찾아보기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방식이고 뒤의 두 가지는 다른 예술가들의 생각을 엿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독자인 자신이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 모든 방식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도 좀 더 구분을 하자면 그중에도 생각 적기와, 소설 쓰기는 자신만의 생각을 만드는 데, 예술 작품을 찾아보는 것은 소설의 분위기를 이해해 보려는 데 좀 도움이 됩니다. 문장과 관련된 다른 텍스트를 찾아보는 것은 독서 토론을 하는 데에도 좀 더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책을 소설을 해체하고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는 적극적인 방식이기에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독서 방법보다도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⑴ 생각 적기


다음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첫 구절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발췌한 글에 제 생각을 기록했습니다.


#발췌 아래의 보고를 위한 자료가 나온 몇 가지 부차적인 원천과 세 가지 주요 원천이 있다. 이들 자료의 원천은 여기 처음에서 한 번 언급하고, 이후에는 더 거론하지 않겠다. 주요 원천은 경찰의 심문 조서, 후베르트 블로르나 변호사,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대학 동창인 페터 하흐 검사이다.
#생각 소설에서 첫 문장이나 첫 단락을 꽤 중요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른 것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소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첫인상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모비딕처럼 어떤 거대한 것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카뮈의 이방인처럼 충격적이거나 혹은 설국처럼 감상적이거나 안나 까레니나처럼 의미 심장한 말이 담긴다. 그렇게 담긴 것은 독자에게 글의 첫인상을 차지하여 그 책에 관심을 두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다. 첫 번째 문장이나 문단의 문체는 이 소설이 누구의 입을 빌려 어떤 문체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알려준다. 위의 문장은 딱딱하며 마치 어떤 보고서에서나 볼 법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그 사건에 대해 일체를 주목한 어떤 담당관이나 기자가 관찰한 시각처럼 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이지만 르포의 느낌마저 난다. 또 하나는 문장은 그다음에 어떤 내용이 올지에 대해 궁금하게 만든다. 보고는 어떤 보고를 말하는 것인가? 저자는 보고서나 르포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고가 무엇인지 미리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그 보고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경찰과 변호사, 검사 등이 연루된 범죄 사건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 페이지를 넘겨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살펴보게 만든다.


⑵ 소설 쓰기


아래의 글은 엔도 슈샤쿠의 『침묵』의 한 구절입니다. 아래에서는 해당 구절을 바탕으로 제 생각이 담긴 패러디 소설의 한 구절을 만들었습니다.


#발췌 그러나 이렇게 썼다고 해서 저희의 사기가 약해져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오히려 저는 기치지로와 같은 사람에게 제 미래를 위탁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왠지 웃음이 나옵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운명을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경우에는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기치지로를 믿기로 하겠습니다.
#소설 나는 나의 운명을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로지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내 운명은 불안함을 처음부터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온갖 믿을 수 있는 것들만 있을 수 있으랴. 그렇지 못한 날이 그러한 날보다 많을 진데, 나는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람들은 그러한 불안함을 이길 만큼의 자신에게 이득이 있느냐로 판단한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겨내고 훗날 얻을 보상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훗날 얻어질 금은보화, 천국의 보상. 그러나 이는 금은 보화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신론자인 나에게는 믿음에 따른 천국에 보상 따위도 믿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저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일말의 불안과 의심을 안고서 믿을 뿐이었다. 쉽게 흔들리는 불완전한 믿음 속에서 나는 계속 그들을 향해 절반의 믿음과 절반의 의심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처럼 눈길이 머무는 문장이나 단락에 자신의 생각이 담긴 글을 자유롭게 달았습니다. 그중에는 어떤 관점이나 시각(가령, 페미니즘적 시각이나 특정 사상가의 시각 등)으로 보면서 기록된 것도 있고 어떤 문체를 쓰고 있는지에 관한 글이 담긴 부분도 있습니다.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그저 이 부분을 발췌하면서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것도 있으며 이따금은 발췌를 하고 생각을 기록하는 이 순간의 감정을 적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랫부분과 같이 발췌된 부분에 나오는 소재나 플롯을 바탕으로 제 생각이 담긴 소설을 써보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담아 무엇이든 써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발췌된 부분의 단어나 문장 또는 문장 전체에 흐르는 중심 생각이 기준이 되어 새로운 것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생각을 기록할 때에는 자유롭게 써 내려가도 좋습니다만, 최소 분량을 미리 설정하고 써 내려가는 것도 좋습니다. 가령 내가 발췌한 문장이 있다면 그만큼 분량 이상의 생각을 기록한다는 식입니다. 생각은 고민하면 할수록 발전할 수 있는 법이라 이러한 강제성을 주면 생각을 짜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이 익숙해지면 때로는 하나의 문장에 한 장의 생각을 가득 담을 때도 있죠. 참고로 이렇게 낙서처럼 써내려 간 생각은 후에 서평이나 해당 책에 관한 글을 쓸 때 아주 중요한 원천이 되고 짧게 소설화한 글은 훗날 여러 번의 각색을 거쳐 제 소설의 한 문장이 되기도 합니다.


⑶ 다른 분야의 예술 작품 찾아보기


이 두 방식이 제가 주로 독서를 하면서 생각을 기록하는 방식이라면, 이따금 아래처럼 소설의 분위기나 작중 느낌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다른 분야의 예술 작품을 찾아볼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하여 소설의 분위기나 문장이 전하는 어떤 느낌에 관하여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때 좀 더 작품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시는 시각적 인상에 한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청각이나 다른 감각을 활용한 작품을 찾아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소설을 읽거나 문장에서 묘사하는 느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아래의 그림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라는 책을 볼 때 찾아본 작품들입니다. 상단은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눈 속의 사냥꾼(Hunters in the Snow (Winter)이라는 그림의 일부분입니다. 이 작품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보스의 요양원의 배경을 생각하면서 보았던 그림입니다.


그림: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눈 속의 사냥꾼 중 일부(Hunters in the Snow (Winter)_, 1565
※ 마의 산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보스의 요양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하단은 병을 찬미하며 병자를 고상한 존재로 만들려는 한스 카스트로프의 견해, 가령 병이라는 육체적 결핍이 마치 고귀한 예술의 정신과 결합하여야만 한다는 미신, 천재 예술가는 요절한다를 넘어 요절해야만 천재 예술가라고 여기는 생각들은 총명함과 병에 대한 인과관계를 미묘하게 결합하는 견해를 반대하는 세템브리니의 견해를 읽으면서 찾아본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 연작 판화, <궁핍>(1893)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그림을 캡처하고 생각해볼 질문을 간단하게 기록하거나 그에 대한 답변을 가볍게 적기도 했습니다.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 연작 판화, <궁핍>(1893)

※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도 병과 죽음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텍스트 찾아보기


그런가 하면, 조금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비슷한 주제를 가진 다른 책과 함께 읽어보고 관련 있는 부분을 발췌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식은 제가 독서 토론 모임을 위한 발제를 만들면서 애용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라는 존재를 기다리며 두 사람이 대화한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것 아니냐”라는 에스트라공의 물음에 저는 과거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부분이 떠올라 서로를 묶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두 작가의 생각을 이어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들었고요. 독서 토론을 하지 못할 경우 이 질문을 만들고 스스로 질문에 관한 생각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에스트라공은 소맷자락으로 당근을 닦아서 먹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 그럼 순무는 도로 다오. (에스트라공, 순무를 돌려준다) 조금씩 오래오래 먹어라. 더는 없으니까.
에스트라공 (씹으면서) 아까 네게 물어본 게 있었지.
블라디미르 그래서?
에스트라공 너 대답해 줬냐?
블라디미르 당근 맛이 좋으냐?
에스트라공 달콤하다
블라디미르 잘됐구나. 잘됐어. (사이) 그래 뭐가 알고 싶었는데?
에스트라공 생각이 안 난다. (씹어 먹는다) 그래서 탈이라니까. (그는 당근을 즐거운 듯이 들여다보더니 허공에서 손가락 끝으로 돌려본다) 당근 맛이 좋은데. (그는 당근 끝을 음미하듯 빨아본다) 가만있자. 이제 생각났다. (한 입 깨문다)
블라디미르 그래 뭔데?
에스트라공 (입 안 가득히 물고 건성으로 묻듯이)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블라디미르 난 원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에스트라공 (씹어 삼킨다)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블라디미르 묶여 있다고?
에스트라공 그래. 묶-여-있단 말이야.
블라디미르 묶여 있다니 어떻게?
에스트라공 손발이 다.
블라디미르 도대체 묶긴 누가 묶고, 누구에게 묶여 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네가 말하는 그 작자에게.
블라디미르 고도에게? 고도에게 묶여 있다고? 무슨 소리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이) 아직은 안 그렇다.
에스트라공 그자 이름이 고도라고?
블라디미르 그럴걸.
에스트라공 이런! (먹다 남은 당근 청의 한 끝을 손에 들고 눈 앞에서 돌려본다) 이상한데, 먹을수록 맛이 없어진단 말야.
블라디미르 나는 정반대다.
에스트라공 정반대라니?
블라디미르 난 먹을수록 맛이 난단 말이다.
에스트라공 (한참 생각하더니) 그게 바로 정반대라는 거냐?
블라디미르 기분 문제지.
에스트라공 성격 문제다.
블라디미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에스트라공 날뛰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블라디미르 타고난 대로니까.
에스트라공 꿈틀거린다고 별수 있니?
블라디미르 근본이야 달라지지 않는 거지.
에스트라공 별 수 없는 거야. (먹다 남은 당근을 블라디미르에게 내민다) 마저 먹을래? 31p.



"조르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지요?"
"두목, 무슨 생각이라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소.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얼마 후 또 잔을 채운 그가 소리쳤다.
"......건강하시오, 두목!"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우리 둘 다 이 쓰라린 감정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울음을 터뜨리거나 술에 취해 버리거나 미친놈처럼 춤을 출 수도 있었다.
"산투르를 쳐요! 조르바!" 내가 제안했다.
"두목, 내가 일찍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산투르에겐 느긋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 달, 아니면 두달...... 글쎄, 그 정도 지나야 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가서 두 사람이 영영 이별한 사연을 노래로 할 수 있겠지요."
"영영이라니!"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는 이 엄청난 말을 홀로 되씹은 적은 있지만 밖으로 큰 소리로 터져 나오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몹시 놀란 것이었다.
"영원히지요." 조르바는 힘들여 침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영원히지요. 조금 전에 다시 만난다느니 수도원을 짓는다느니 하는 건 병든 놈을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쓰는 말이지요. 나는 그런 말을 받아들일 수 없소. 바라지 않으니까. 우리가 계집들처럼 그렇게 서로 위로해야 할 만큼 약골이오? 물론 아니지. 그럼 영원히지......"
"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조르바의 필사적인 애정에 당황하고 말았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다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428~429p, 열린책들>

※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또는 무언가에 얽매여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본 경험이 있나요? 왜 그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나요?



윌리엄 브레이크는 그의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본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한 알의 모래를 통해 삼라만상의 우주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모래이든 종이에 기록된 하나의 단어이든 그 자체는 무게를 지닌 물질일 뿐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정신 활동 속에서는 무한으로 뻗어 나갈 가능성을 지닌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가령, ‘어머니’라는 단어 하나에 누군가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순간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던 내 어머니를 떠올릴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이미지의 어머니를 떠올릴 수도 있죠.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관념과 경험이 연결되어 만들어집니다.

 어떤 단어나 문장의 이미지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도 풍성해지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이 주는 관념이 그 무언가와 결합할 때에 더욱 풍성해집니다. 이러한 독서 방식은 어떠한 단어와 문장에 대한 이미지를 풍성하게 더욱 만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소설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의 사고의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나아가 사고의 추상화된 영역 속에 존재하게 된 희미한 생각들을 다시 풀어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언어를 통해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방식이 추구하는 본질입니다.



타협해야 할 것


이 글을 읽은 혹자는 이러한 방식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깨뜨린다고 말하거나 또 그런 식으로만 읽으면 지나치게 피곤하지 않겠냐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묻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취미 활동의 하나로 바쁜 시간을 쪼개 읽는 것이기에 이러한 방식을 따르는 게 쉽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방식으로 하다가도 때로는 다른 독서 방식을 취해도 되고 혹은 그 반대로 해도 됩니다. 

또한 그럴 수도 없겠지만, 소설의 모든 문장을 일일이 헤집어 마치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처럼 행동한다면 소설 그 자체가 주는 맛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강박적으로 이 방식을 고집하려 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타협을 해야 합니다. 요는, 소설을 읽을 때에는 여유로운 마음과 자기만의 원칙과 속도로 독서 방법을 선택하면 됩니다.



존재적 독서를 위하여


어떤 시간에 책을 읽느냐 유튜브를 보느냐, 책을 골랐다면 어느 분야를 읽느냐, 소설을 골랐다면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

이 모든 것이 모두 다 선택입니다. 그 수많은 선택이 모여 삶을 이룹니다. 그 삶의 수많은 순간이 의미로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내가 그 선택이 내게 어떤 가치가 있으며 의미를 둘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그 행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읽는 순간에 자기 생각을 남기는 행위는 독서라는 자신의 지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입니다. 즉, 독서를 통해 오래 기억될 자신만의 어떤 발자취를 남기는 행위이죠.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존재 양식의 독서'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서(60~62p)

  대화에 해당하는 요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마땅히 그래야 할 독서의 경우에도 십분 해당된다. 물론 독서를 할 때는(대화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읽는가(또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 없이 싸구려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는 과정은 백일몽과 같은 형태이다. 그런 독서는 생산적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시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듯, 또는 화면을 보면서 씹어 먹는 감자 칩처럼 무심코 삼켜질 뿐이다. 그와는 달리, 예컨대 발자크의 소설 같은 것은 진심으로 관여하는 생산적 독서, 다시 말하면 존재양식으로의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책들도 십중팔구는 소비행위로 - 즉 소유양식으로 - 읽힌다. 독자는 호기심에 이끌려서 줄거리를 알고 싶어한다. 주인공이 살아남는지 죽는지, 여주인공이 유혹에 빠지는지 아닌지를 궁금해한다. 이런 경우 소설 텍스트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일종의 전희역할(前戱役割)을 하며,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 결말이 절정을 이룬다. 결말을 알고 났을 때 독자는 마치 자기 자신의 기억들을 헤집어본 듯이 현실감 있게 이야기 전체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가 획득한 인식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 주인공을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능력도 심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깨우친 바도 없다.
  철학서나 역사서를 읽을 때도 이런 차이는 드러난다. 철학서나 역사서를 대하는 올바른 독서 태도 - 또는 나쁜 독서 태도 - 는 교육의 결과이다.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일정한 양(量)의 "문화적 자산"을 전달하려고 하고 있고, 수업 기간이 끝나면 각 학생에게 그중 최소한의 것을 습득했음[소유했음]을 입증하는 졸업장을 준다. 따라서 학생을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주요 사상을 뒤따라서 암기하는 식을 주입받는다. 이런 방식으로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까지를 알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수준의 차이는 주로 전수받은 교양적 자산의 양적(量的) 측면에서 드러나며, 전수받은 교양적 자산은 어쩌면 학생들이 훗날 생애에서 관장할 물질적 자산의 양과 비례할 수도 있다.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학생은 과거 철인들이 말한 경구를 가장 정확하게 따라 외울 수 있는 학생들이다. 그는 해박한 박물관 안내인과 비견된다. 지식의 소장품 외곽의 것은 습득하지 못한다. 선대 철인들을 문제의 과녁에 놓고 그들을 대상으로 대화를 펼치기를, 그들도 자기모순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문제들은 제쳐놓고 어떤 주제들은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또한 그는 당대에는 "이성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작가를 매료시킨 견해들과 작가의 공헌에 힘입어서 뒤이어 나온 새로운 견해를 판가름하기를 배우지도 못한다. 언제 작가가 순전히 머리로만 이야기하는지, 언제 마음과 머리를 다해서 말하는지를 느끼지 못하며, 작가가 진실된 인물인지 허풍선이인지 - 그밖의 여러 가지를 깨닫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존재 양식으로 책을 대하는 독자는 아무리 저명한 저서라도 다소간에 무가치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때로 작가 자신보다 그 책을 더 자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것은 모조리 중요하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독서 방식이 에리히 프롬이 말한 존재 양식의 독서라고 딱 잘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만의 생각을 짓는다는 점에서는 과자를 씹듯 쉽게 씹고 넘겨버리는 소유적 독서가 되기에는 번거로운 방법입니다.



끝으로


예술로서 정당화될 자격을 갖춘 소설은, 소설가 조셉 콘래드의 말처럼 바로 우주의 온갖 양상에 깃들어 있는, 하나이자 여러 형태의 진실을 소설의 문장 속에 숨겨놓는 법입니다. 그 진실의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시야를 확보하고,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게 되며,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지를 좀 더 잘 깨우치게 되죠. 이러한 독서 방식은 문장 안에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데 적당한 기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모쪼록, 존재 양식의 독서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소설 읽기 방식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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