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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n 11. 2020

친구에게 답한 어떤 그림에 관한 감상.

나는 어떻게 그림을 보는가.

어느 날 A는 내게 그림 하나를 보여주고 어떤 느낌인지 이야기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그림에 관한 어떤 정보나 작가에 관한 단서조차 주지 않았고 나 역시 순수하게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에 묻지 않았다. 이 글은 그녀에게 보낸 장문의 글에 일부를 수정하거나 보완한 것이다. 아래와 같은 감상을 보내고 나서 작가의 이름을 전해 들었으나 여기에는 남기지 않겠다. 작가가 궁금한 분은 구글 이미지 검색(https://images.google.com/)을 활용하여 확인하길 바란다.

참고로 필자는 전문 비평가가 아닐뿐더러 미술 기법이나 기술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전문가가 보기에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고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지 말라는 요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시다피시, 모든 예술은 저마다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느낌이 주는 근거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느낌의 근거는 어떤 형식이나 기법으로 인해 나타나는 경우도 많은데, 다소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는 기법을 이 지면에서 설명하는 까닭도 바로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바로 위의 작품이 주는 어떤 느낌이 무엇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인가를 찾는 해석이다. 그 해석의 근거가 되는 기법에 관한 설명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내가 그림에 갖는 느낌을 발견하는 근거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어설픈 지식을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내 감상을 말하고자 한다.

이 글이 추구하는 목적은 어떤 작품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유명인의 작품이거나 혹은 누군가가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좀 더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 있기를 바라서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라'던 윌리엄 브레이크의 말은 언제나 예술작품의 감상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이며, 저 하나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느낌과 그에 따른 해석이 진정으로 가치를 갖으려면 오로지 자신이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예술 작품 속에 담긴 관념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존재와 그 주변에서도 예술에서 발견한 의미와 같은 것을 추상하게 될 것이다. 존재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사고는 늘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그대, 내가 비록 그대가 보기에 풋내기에 알량한 지식으로 지껄여 댄다 하더라도 그저 온화한 부처의 미소로 화답해주시길!


※ 그림에 관한 감상은 A에게 전할 때처럼 구어체로 서술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본 글에 일부 수정 및 보완을 했다.





총 50장의 종이를 붙인 그림인가 보네요. 나무들이 혈관처럼 계속 분화를 이루는데 그 부분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한 거 같아요. 그게 뭐랄까? 나뭇잎 하나 없는 나뭇가지들임에도 어떤 생명력마저 느끼게 하네요. 아마 계절이 바뀌면 저기에 엄청 많은 싹이 나고 꽃이 필 것을 미리 대비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은 아무도 없는 적막강산이지만, 그럼에도 외롭다고만 느껴지는 풍경은 아니에요. 밑에 자라나는 풀과 꽃들은 그것을 보완해주고 있으며 아마 마찬가지로 계절이 바뀌면 새나 나비, 그리고 사람들도 풍경 안에 존재하겠죠? 아마 왼쪽의 길에는 차가 다니고 오른쪽의 집에서도 사람들이 나올 거예요. 이게 실제 풍경을 그린 것인지 가상의 지역을 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곳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을 법한 풍경이라 작가는 어쩌면 자기 마을의 한 풍경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뭐 어린 시절일 수도 있고. 나라면 내가 사는 곳은 오른쪽 2층 창문이었고 그곳 밖으로 바라보았던 적막감이 조금은 감도는 아침의 숲 풍경을 그리고 싶었을 거예요.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집에서 문을 열고 오른쪽 2시 방향을 바라보면 길 너머로 몇백 년이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세 그루가 마치 저 그림처럼 일렬로 심어져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적막 속에서 그 느티나무를 바라보던 게 문득 떠오르네요. 적막감 속에 존재하는 커다란 나무,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보이지는 않는데, 아침이 되어 안개가 서서히 걷힐 때쯤이면 들렸어요. 저기 어딘가에도 아마 그런 뻐꾸기가 울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은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이리저리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여기까지는 제 감정이고 풍경의 거리에 따라서 좀 살펴볼게요. 가장 가까운 곳에는 노란색의 꽃들이 폈네요. 아마 잔디가 깔려 있는 정원이 있었나 봐요. 아마 50장이 아니라 60장, 70장이라면 그 잔디가 깔린 평지의 정원도 좀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마 학교 앞 잔디처럼 쭉 깔려 있었겠죠? 그 앞으로는 왼쪽의 잘려진 길이 있을 거고요. 길은 아마 밤사이에 부슬비가 좀 내렸는지 혹은 짙은 안개가 있었는지 물기가 있는 듯하네요. 그리고 거기를 터 놓아서 조금 답답함이 감쇄되는 거 같아요. 길을 타고 공기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온다랄까?

참고로 그림 앞부분이 있었다면 저 가운데의 나무에 집중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림은 극장처럼 와이드 스크린 느낌이네요. 그림의 파일명에는 650x244 비율이라고 적혀 있는데, 혹시 몰라 자로 컴퓨터로 확대한 그림 한 장을 대어보니 약 2:2.8(1:1.4)로 A4 사이즈 비율이었어요. 실제로 A4 용지를 활용한 그림인지 혹은 다른 사이즈 용지를 쓴 건지(어차피 비율은 같으니)는 모르지만요. 여하튼 그걸 기준으로 전체 길이를 계산해보면 5:14 그림이네요. 뭐, 제가 보고 있는 것은 이미지 파일이라 크기는 조정 가능할 테니 반드시 이 사이즈라고 장담을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이 그림은 여러 그림을 넓게 붙인 거라 그런 것도 있지만, 와이드 스크린이 주는 장점인 확 트인 느낌을 좀 더 선사하는 것 같아요. 답답한 3x4 비율에 비해 파노라마처럼 넓은 느낌이랄까요?

이런 비율과 크기의 그림을 보니 경회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던 때가 기억나요. 기둥과 기둥 사이의 화면 비율이 딱 이런 와이드 스크린의 비율이었거든요. 그 프레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회루 중앙에 앉아 인왕산을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문지방을 한 번 넘고, 또 한 번을 넘어 그 그림 앞쪽으로 다가가면, 어느새 기둥(프레임)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프레임 너머의 세상이죠. 그때가 되면 예술이라는 생각을 넘어, '내가 사는 곳이 바로 저곳이구나! 저 아름다운 곳이구나!'를 생각하죠. 그러고보니 저 나뭇가지들이 만드는 윤곽은 인왕산의 산맥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네요. 산맥 형태, 말하자면 삼각형 형태가 안정감을 주는듯 합니다.

시야를 중경 옮기면 가운데 검은색 나무가 확 눈에 띄어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색깔이 더 짙기도 할뿐더러 화면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네요. 그 덕분에 이 나무가 옆에 있는 다른 검정 나무들과 비교해서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정확히 가늠하기가 조금 어려워요. 또한 흥미로운 건 이 나무들이 가진 원근법이에요. 대략 가운데 나무를 기준으로 양쪽의 나무들이 점점 뒤의 나무들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선을 이루고 있는데, 그 소실점의 가운데를 이 큰 나무가 가로막고 있어요. 그나마 그림 왼쪽에는 얽히고설킨 나뭇가지가 다른 나무보다 앞에 있어서 이 나무가 좀 더 앞에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는데 오른쪽은 잘 모르겠네요. 또한 이 나무의 재미난 점은 이리저리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 인 것 같아요. 다른 나무와는 달리 여러 갈래로 율동하듯 뻗어 있는 게 마치 오케스트라 단상 위에 올라서 앞의 연주자들을 지위하는 마에스트로 같은 역동성도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이 나무를 중심으로 하여 전체를 보면 마치 경쾌한 연주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와이드 스크린이라 더 그런 거 같아요. 그림을 보는 관객의 시선이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공연장 1층에서 보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보면 노란색의 꽃들은 우리 앞에서 공연을 감상하는 귀여운 꼬마들처럼 보이기도 해요. 혹은 유튜브를 켜서 비발디의 사계의 '봄'을 들으면 화면에 노랗고 빨간 꽃들이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데, 마치 그것처럼 저 작은 노란 꽃들이 옅은 바람에 흔들릴 것만 같아요. 이 노란색이 저 가운데의 마에스트로의 강함, 혹은 어떤 무서움을 조금은 상쇄시켜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런 율동성이 마른나무들의 생명력을 좀 더 보여주는 거 같아요. 가운데 나무를 손으로 가려보면 확실히 이 나무가 이 그림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네요. 더불어 중경의 바닥에는 푸르른 새싹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 또한 어떤 생명력을 보여주는 거 같아요.

정리하면, 이러한 와이드 스크린이라 한눈에 확 들어오긴 힘든데 가운데 나무 때문에 시선이 중앙에 집중돼요. 만약 가운데의 나무가 없었다면 원근법의 소실점이 명확하지 않아 눈이 분산되었을 듯싶어요. 화면의 사이즈와 불안한 원근법으로 눈에 확 들어 오진 않을 수도 있는 것을 중앙의 검은색 나무가 보완해주는 것 같아요. 약간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에서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등장할 때 시선이 중앙으로 몰리는 것처럼요. 화면 비도 그런 홀의 느낌이 납니다.

원경에서 흥미로운 것은 밑에서 1단이 지평선이라는 것과 숲에서는 푸른 새싹과 작은 나무가 자라는 경계라는 점, 그리고 오른쪽에는 지붕의 끝과 담을 이어주는 일정한 선을 이루고 있다는 거? 나무 때문에 가려진 원근법의 소실점도 대략 그 선에 닿아 있는 거 같긴 한데, 마치 스푸마토처럼 흐리게 만든 거 같아요. 그래서 중앙 원경으로 갈수록 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거 같기도 하고... 그림의 선이 대체로 명확하고 깔끔한데, 중앙 원경 쪽만 흐리게 처리를 했네요. 왼쪽의 원경은 상당히 아득한 느낌이 드는데 지평선 위쪽으로는 스푸마토처럼 흐리게 형상을 그린 것도 한몫을 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고 보니 나무를 기준으로 좌우 대칭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말하자면 조금 식상함을 피하기 위해서 왼쪽과 오른쪽의 변형을 주었네요. 모양도 색도 전혀 다른 것을 사용하고요. 거리감도 왼쪽은 멀게 오른쪽은 가깝게 만들었어요. 그 덕분에 바람이 길을 통해서 들어오거나 뒤에서 앞으로 또는 앞에서 뒤로 도는 것 같아요.

중앙의 원경을 좀 보면 앞의 갈색 나무들과는 달리 붉은색의 나무들이 뒤덮고 있어요. 잎사귀가 있는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가까이 붙여 검은 나무를 바라보면 나무의 율동에 터져나가는 환희 같은 느낌도 들어요. 나무가 손을 들어 춤을 출 때마다 마치 물감이 떨어져 팡팡 터지는 느낌이랄까?


상징적으로 보자면, 천편일률적으로 뻗어나가는 군상들, 생명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을 그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 검은 나무의 혈관과도 같은 나뭇가지들은 다른 나무들과 얽히고설켜 있는데 자신이 준 어떤 영향력을 의미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혹은 그 반대로 자신이 다른 나무들과의 연관 속에서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건가? 뻗어나가는 느낌에서는 전자가 좀 더 느낌적으로 어울리네요. 또는 마녀 같은 느낌도 얼핏 드는데. 검은색에 강한 힘(악마 같은)이 가운데 나무에서 느껴져서 그런가? 여하튼 마을에서 만약 가운데 떡하니 저런 검은 나무가 하나 있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눈으로는 예사롭지 않게 보일 거 같아요. 공포스럽게 느낄 수도 있을 거 같고요. 검은색이라는 느낌에서는 작가를 보는 시선이 밝기만 할까 싶기도 하네요.

아마 거장(마에스트로)이 주는 느낌이 그런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예술을 향한 열정과 환희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벽의 추구를 위하다 보면 무서움, 고독감도 갖게 될 테니까요. 토머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라는 책을 보면 그런 예술가가 나오죠. 열정과 환희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예술을 위하여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한 예술가를요. 저 거대한 그림 안에서 오로지 가운데 나무에만 눈을 집중하다 보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아요. 그저 어떤 예술가의 끊임없는 열정만을 느끼게 되죠. 전체 그림은 마치 아침같이 차분한 느낌인데도요. 이런 집과 숲과 나무가 실제로 있었더라면, 아이일 때 보는 이곳과 어른이 되었을 때 보는 이곳의 느낌은 다를 거 같아요. 아이일 때에는 저 나무에 어느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검은 나무가 이리저리 꾸불꾸불한 나뭇가지를 뻗기까지의 열정과 노력도 보았을 거 같아요. 정적인 세상을 깨뜨리려는 동적인 움직임! 어제와 다른 오늘은 그것으로 진보하겠죠. 천편일률적인, 왼쪽의 나무들은 왼쪽으로 오른쪽의 나무들은 오른쪽으로 가지를 뻗어 마치 대립적이며 데칼코마니처럼 있지만, 가운데 나무는 그 세계 속에서 다양성을 추구해요. 저 검은 나무의 가지마다 생각의 풍선을 담아 걸어두고 싶어요. 마치 마인드 맵처럼요.

어찌 보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세상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어떤 대립적인 두 집단 사이에서 가지를 뻗고, 또 뻗어나가 얽기고 설킨 세상을 만들어간다. 마치 인간의 왼쪽, 오른쪽에 서로 닮은 혈관이 있고 그 혈관이 다 작은 혈관으로 분화를 거듭하여 우리 신체 곳곳에 혈액을 공급하듯, 그런 세상이고 예술과 예술가는 그 세계의 중앙에서 고독하게 존재하지만 양쪽 세상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그런 것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랄까요? 음…. 저 50장을 이어 붙인 그림의 세상에서 저 검은 나무는 고독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저 나무에도 분명 꽃은 피고 새들도 찾아오겠죠? 꽃은 다시 시들고 새들은 떠나겠지만, 분명 그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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