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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Sep 19. 2020

경회루에 관한 유홍준님과의 대화.

가상 인터뷰 방식을 통한 독서 이해 방법『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https://brunch.co.kr/@wringkle/321

『경복궁에 관한 유홍준님과의 대화』의 연장선으로 경복궁 건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경회루만을 따로 떼어낸 것입니다. 가상 인터뷰 방식의 도서 이해 방법론은 위의 글에서도 안내한 바 있으니 해당 글에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더불어 이 내용은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의 일부 내용을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음을 보시고 경복궁을 비롯한 우리 문화에 관심이 생기시거든 꼭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경복궁 건축의 꽃이라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경회루가 아닐까 싶어요. 사실 경회루가 없어도 궁궐 건축의 격식과 제도는 다 갖춘 셈이에요. 그러나 경회루가 있음으로 해서 '3문 3조'의 늠름한 줄기에 환상적 꽃까지 갖추게 된 것이죠. 경회루는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 건물이며 단일 평면으로는 가장 큽니다. 연못의 크기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이고 48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이층 누각은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으로 되어 있죠. 남북 33미터, 동서 29미터 넓이예요. 누마루의 넓이는 298평이라 공간에 여유가 있어요. 기록상으로는 1,200명이 이곳에 모였던 적이 있다고 하죠.


경회루 전경, 위키백과



엄청나게 넓네요. 경회루 공간은 다 열려 있는 공간인가요?


경회루 내부, 출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그냥 평면 공간은 아니에요. 한 뼘 정도의 높이로 두 차례 높여서 공간은 3단으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 공간은 외진(外陣), 중간은 내진(內陣), 제일 안쪽은 내내진(內內陣)이라고 하며 각각은 분합문(分閤門)이 달려 있어 이 문을 닫으면 세 칸으로 나뉘고 열면 전체 공간이 통으로 열리게 되죠.


분합문, 한국 고건축 박물관
경회루 종 단면도의 11량, 문화재청


가구(架構) 형식을 보면 들보가 11개인 11량 구조로 복잡하나 치밀하고 견실한 느낌을 주죠.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 모양의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산시켰어요.  누각 둘레에는 계자(鷄子) 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커튼을 접어 올린 듯한 낙양각(洛陽閣)을 설치했어요. 이게 궁궐 정자의 트레이트 마크라 할 수 있죠.


계자 난간, 조선시대 가장 많이 쓰이던 난간. 난간대를 계자다리라고 하는 부재가 지지하고 있는 난간을 말한다, 그림 문화재청
커튼을 접어 올린듯한 기둥 사이의 낙양각, 서울시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290512



경회루 누각 기둥과 처마이다. 1983년 이전 촬영.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경회루는 건물도 건물이지만 연못도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경회루를 밖에서 보면 누각이 못에 어른거리면서 아름답게 비치죠. 누각 안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면 땅과 거리감이 생겨 일상의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경회루 건축에서 가장 슬기롭고 경외로운 부분이 어딘 줄 아세요?


어딘가요?


바로 물의 순환 시스템이에요. 어떤 강제 순환장치 없이 북한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돌아나가게끔 되어 있어요. 그 순환으로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죠?


전통적으로 연못에 물을 넣는 방법은 세가지에요. 하나는 높은 곳에서 물을 떨어뜨리는 기법, 현폭(懸瀑, 소리를 내며 폭포로 떨어지게 조성) 기법이라고 하죠. 또 하나는 연못의 수면과 평면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흘러들게 하는 자일(自溢, 조용히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게 조성) 기법, 마지막은 연못 밑으로 잠겨 넣는 잠류(潛流, 물이 지하로 잠겨 스며들게 하여 연못 바닥에서 솟아나게 조성) 기법이에요. 경회루는 이 세 가지를 모두를 적용했어요. 참고로 예전에 경회루 연못 청소를 위해 물을 다 뽑아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경회루 밑바닥은 수평이 아니라 입수구가 있는 북동쪽이 약간 높고 출수구가 있는 남서쪽은 약간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울기가 물의 흐름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죠.


그럼 이러한 기울기가 순환을 돕는 것이겠네요.


그러나 그것으로 연못 전체를 순환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두 곳에 있어요. 하나는 북쪽 호안(湖岸, 호수의 기슭)에 조각된 용머리 입에서, 다른 하나는 동쪽 호안의 돌다리 밑으로 용의 목덜미를 통해 들어오죠. 북쪽 호안 못바닥에서는 상당한 양의 지하수가 솟아 들어오고요. 이 세 곳으로 들어온 물은 경회루 연못에서 세 줄기 물길을 이루며 조용히 흐릅니다. 


그 흐름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동쪽 호안(湖岸, 호수의 기슭) 다리 밑으로 들어오는 물은 세 개의 다리 밑을 통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남쪽 호안에 부딪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북쪽 지하에서 스며든 물은 완만하지만 호안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쪽 호안에 부딪혀 남쪽으로 흘러가죠. 북쪽 용머리 입수구에서 떨어져 내린 물은 서쪽으로 흐르다가 만세산이라 불리는 두 섬 사이로 흘러 서남쪽 출수구로 빠져나갑니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에도 강제 순환하는 일 없이도 항상 맑은 물을 유지할 수 있는 거죠. 다만, 수량이 옛날 같지 않아 조금 걱정입니다. 


경회루와 그 옆 만세산(조선 연산군 때 연못 가운데 만든 섬) 전경, 출처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300#none


이 경회루의 건립 목적은 무엇인가요?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베풀기 위해 지은 누각입니다. 2005년 6월 1일, 경회루를 44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했죠. 경복궁의 창건 당시에는 경회루가 없었습니다. 그저 경복궁 서쪽이 습지여서 연못을 파고 작은 누각 정도만 세웠습니다. 경회루 공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태종실록』11년(1411) 8월 22일 자를 보면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경복궁을 수리하게 하고 (중략) 북루(北縷) 아래 못을 파라고 명하였다"라고 나오는 데 이 무렵 착공된 것이 아닌가 생각돼요. 그리고 불과 8개월 만인 태종 12년(1412) 4월 2일에 완공이 되죠. 


새로 큰 누각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했는데, 제도(制度)가 굉장하고 창활(敞豁)하였다. 또 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임금이 협착하다고 명하여 고쳐지은 것이다.


하륜은 경회루 기문(記文)을 보면, (누각이 완공된 뒤) 태종이 경회루에 올라가 보고는 "나는 옛 모습대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하니 박자청은 "후일에 또 기울 염려가 있어 짐짓 이와 같이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경회(景會)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5월 16일에 태종은 새 누각의 이름으로 경회(景會), 납량(納凉), 승운(乘雲), 소선(召仙), 기룡(驥龍) 중에서 고르라고 하륜에게 명하니 그는 경회로 택하고 6월 4일에 기문을 지어 바칩니다. 그리고 6월 9일에 세자 양녕대군(1394~1462)에게 명해 경회루 편액(編額,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을 큰 글씨로 쓰게 하죠. 이때 세자 나이가 열아홉이었어요. 이 모든 정황을 보면 경회루는 태종의 명을 받은 박자청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대공사를 8개월 만에 해냈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박자청은 누구인가요?


박자청(1357~1423)은 노비 출신으로 공조판서, 의정부 참찬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입니다. 동래 관노 출신인 장영실이 과학기술로 종3품까지 오른 것처럼 그는 건축기술만으로 종1품에 올랐죠. 그는 개국공신인 황희석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주인을 따라 이성계를 모셨죠. 1391년 4월, 역성혁명을 일으키기 1년 전, 그는 이 쿠데타의 성공을 기원하며 청동사리함을 금강산 월출봉 아래 봉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리암의 발원자로 이성계와 부인 강씨, 시주자로는 황희석 등 남녀 11명 그리고 만든 사람으로 박자청 등 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어요.


대단하네요. 그래서 건국 이후에 노비의 신분을 벗게 된 건가요?


개국 후에는 무관의 말단 벼슬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태조 이성계에게 발탁된 것은 태조 2년(1393)이었어요. 그가 당직으로 궁궐문을 지키고 있을 때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1382~1398)이 궁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의 명령 없이는 안된다며 끝내 들여보내지 않았죠. 의안대군은 화가 나서 그를 발길로 걷어찼지만, 그럼에도 요지 부동이었다고 해요. 이 사실을 들은 태조는 되려 의안 대군을 나무라고 박자청에게 자신의 경호를 맡는 호군(護軍)으로 발탁하죠. 그 후로도 우직한 충성심을 보여 태조와 태종에게 깊은 신뢰를 얻고 무반 관리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건축가가 된 건가요?


태조 3년(1394)에 공역(工役, 토목 건축 따위의 공사를 이룩하는 일)에 첫발을 내디뎌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의 감역관 재질을 인정받았아요. 태종 5년(1405)에는 창덕궁을 완공해 안마(鞍馬,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선공감(線工監, 조 시대에공조에 딸려 토목과 영선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 되어 이때부터 나라의 영선관계의 일을 주관하게 됩니다. 태종 7년(1407)에 성균관 문묘, 이름해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建元陵)과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의 산역(시체를 묻고 뫼를 만들거나 이장하는 일)을 주관했습니다. 그 공으로 그해 10월에 공조판서에 인명 되죠. 선공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거예요. (공조판서는 장관급 고위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상업 다음으로 경시된 공(건축/토목 및 도기/금속기구 제조 등)을 담당하는 부서의 관리인지라 실제 취급은 별로 좋지 못했다 - 출처 나무 위키)


그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을까요?


그는 공사가 시작되면 무서울 정도로 몰두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태종 7년(1407) 성균관 문묘를 건설하였는데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인부들을 독려해 불과 넉 달만에 건물을 완성하죠. 그렇게 혹독하게 공사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여러 민폐가 생겼던 모양이에요. 이런 일로 그는 항시 대신들의 미움을  샀고 왕에게 수도 없이 처벌을 요구하곤 했죠.


그래서 그는 처벌을 받았나요?


아뇨. 태조, 태종, 세종 모두 그를 두둔했다고 해요. 경회루 공사가 한창이던 때에 신하들이 그를 처벌하라 요청했는데, 태종은 이렇게 그를 옹호했다고 합니다.


박자청은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부지런하고 곧은 사람이다. 종묘 사직을 수리하는 일은 모두 내가 명하여 감독한 것이다. 어찌 자신의 출세를 위한 계책으로 이 일을 하겠느냐? 내가 설령 박자청을 파직시킨다고 하더라도 대신 일을 맡은 자는 앉아서 보기만 하고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냐? 경들은 다시는 말하지 말라.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가 미천한 신분에서 출세하는 과정을 소상히 말하면서도 수많은 공사는 대략만 기록하고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적혀 있어요.


박자청은 사람된 품이 세밀각박하고, 은혜와 덕이 적었으며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것을 좋아하였다. 다른 특이한 재능은 없었으나 오직 토목의 공역을 관장한 공로로 사졸로부터 출세하여 종1품의 지위에 이르렀다. 


조선 양반네들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노비 출신에 학식도 없고 천한 기술인 토목이나 잘하는 인물이었을 거예요. 교양도 없고 인품도 없는데, 그저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출세한 자로만 비쳤던 것이겠죠. 그러나 세종대왕은 달랐어요. 세종 4년(1422) 11월 19일,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부음을 듣고 사흘간 조회를 중지했습니다. 그런 다음, 종이 100권과 사람을 시켜 손수 지은 제문을 내리고, 나라에서 장사 지내게 했죠.


참으로 대단한 건축가였네요.


그렇죠. 정도전이 한양을 기획했다면 박자청은 서울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낸 토목 건축가라고 할 수 있어요. 최소한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박자청의 독자적인 설계와 시공으로 이루어진 경회루는 대한민국 국보 제224호다.

경회루 준공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준공 이후에는 앞서 말한 바처럼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고, 송별연이나 연회 등을 하기도 했어요. 대신들과 경전을 함께 읽기도 했고 유생들이 시험 보는 장소로 쓰거나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죠. 세종 15년(1433)에 한 차례 보수했을 뿐 경회루는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는 중요한 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직위한 성종이 대왕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는 경복궁을 오래 비워두는 바람에 이곳 역시 퇴락하게 되죠. 


다시 경회루가 중건된 것은 언제인가요?


성종 5년(1474)에 이르러서야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근정전, 광화문에 청기와를 올리고 경회루는 헐고 다시 짓기로 했죠. 이때 경회루 돌기둥에 꽃과 용을 새겼어요. 신하 중에는 이를 옛 제도가 아니라며 비판하기도 했죠. 여하튼 이게 정말 아름다웠나 봐요. 성현(1439~1504)의『용재총화(慵齋叢話) 』에 보면, 유구(流寇, 류우꾸우)라는 외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본 세 가지 장관 중 하나로 경회루의 돌기둥을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니까요. "돌기둥에 가로세로 그림이 새겨져 있어 용이 거꾸로 물속에 그림자를 지으며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여기에 경회루 주위를 크게 치장하고 흥청망청하며 연회를 열었습니다. 중종이 즉위하고는 경회루 주변에 설치한 가건물을 모두 헐어버리고 기물과 목재는 다시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죠. 이후 본래 기능대로 사용되다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탈 때 경회루 누각 또한 소실되고 아래층 돌기둥만 폐허로 남게 됩니다. 


겸재 정선의 「경복궁」


그리고선 흥선대원군이 다시 복원을 했겠군요.


고종 4년(1867) 4월 20일에 상량식(上樑式, 목조 건물의 골재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운 후에 최상부 부재인 마룻대인 상량을 올리고 거기에 공사와 관련된 기록과 축원문이 적힌 상량문을 봉안하는 의식임)을 갖습니다. 양녕대군이 쓴 현판은 소실되어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한 신헌(1810~1888)의 글씨를 걸고 다시 제기능을 찾게 되죠. 실로 276년 만의 복원이었어요. 


조선 후기 제작된 서울 경복궁 경회루의 현판이다. 현판은 신헌이 썼다. 일제강점기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일제 침략으로 경복궁이 헐릴 때에도 경회루는 살아남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경복궁을 헐고 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에도 이곳은 파괴되지 않았어요. 다만 경회루를 감싸던 외곽 담장은 모두 헐려나가 누각이 휑하니 드러나게 되었죠. 광복 이후에 경복궁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경회루 북쪽 입수구 용머리 조각이 있는 쪽에 하향정(菏香亭)이라는 육각정을 짓고 낚시를 했어요. 이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향정, 문화재청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하던 모습, 나무 위키


경회루 연못은 겨울이면 스케이트 장으로 개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죠. 들리는 말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회를 열기도 했다죠. 2004년 9월에 되어서 제가 문화재청장에 취임하면서 일반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합니다. 사람의 발길이 없는 건물은 생기를 잃고 퇴락하기 마련이니까요.


경회루를 생각하면 향락이나 연회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이 경회루의 참뜻은 아닐 텐데요.


경회루의 완공 당시 하륜이 태종에게 경회루 기문을 써 바치며 임금에게 사실상 '충고한 구절이 있어요.


누각을 일으켜 새로 세우는 것은 나라를 경륜함과 비슷함이 있으니 기운 것을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하고 (…) 흙을 쌓되 단단히 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없애는 것은 큰 기업(基業)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들보와 마룻대와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 함은 무거운 것을 지탱하는 것이 약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요, 대공과 지도리와 문설주가 모두 제각기 갖춤이 있는 것은 작은 재목은 큰 소임을 맡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추녀 끝을 시원하게 트이게 함은 사방으로 보고 들어 총명하자는 것이요, 밑을 내려다보면 반드시 두려우니 이는 경외(敬畏)를 갖자는 것이요, 멀리 보아 빠뜨리지 않으니 그것은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를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요, 파리가 붙지 못함은 간사하고 침소하는 무리가 물러감이요, 그림이 사치스럽지 않음은 제도문물이 중도(中道)를 얻음입니다. 이때를 맞추어 여기에서 노는 것은 문무의 긴장에 이완이 알맞게 따른 것이니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정치를 행한다면 이 누각의 유익함은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경회루 등에서 만찬을 가졌을 때 매스컴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문화재청장으로 지내면서 가장 속상했던 것은 고궁에서 국제대회 환영만찬이 열리는 것을 '특정인이 사사로이 사용한다'며 이를 허가한 문화재청을 일부 방송사에서 일방적으로 비판한 것이었어요. 2004년 9월 6일 경복궁 경회루에서 열린 국제검사협회 연례총회 환영만찬, 2005년 6월 1일 창경궁 명경전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 총회 환영 만찬에 대한 보도는 거의 비난에 가까웠죠. 그리고 이것은 야당 국회의원의 질타로 이어졌어요. 고궁에서의 만찬은 하나의 국제적 의전(儀典)이에요. 왕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는 국제대회 환영만찬을 고궁에서 베풀어요. 고궁이 없는 나라는 박물관이나 예술관에서 열죠. 이는 국제적인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자국의 문화 전통을 체득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방법입니다. 이는 돈만 있으면 열 수 있는 특급호텔의 만찬과는 격이 다른 것이죠. 


2005년 6월 1일, 경회루가 일반인에게 공개될 당시의 국악공연 관련 사진, 출처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왜 이리 '금지'하는 게 많은 걸까요?


불행하게도 우리는 권위주의 시대의 강압통치를 오랫동안 경험하여 '출입금지' '사진촬영금지'에 아주 익숙해 있어요. 그러나 무조건적인 '출입금지'는 권위주의의 소산일 뿐 아니라 매우 무책임한 관리 행태입니다. 특히 목조 건축은 사람이 사용할 때만 그 생명을 유지해요. 아무리 잘 지은 한옥도 3년만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됩니다. 진주 촉석루가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까닭은 항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존을 위해서라도 개방되는 게 좋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죠. 활용의 측면이 아니라 보존을 위해서라도 문화재는 관리할 수 있다면 개방되어야 합니다. 일반인에게 '출입금지'를 해놓고 국제대회라는 미명 아래에 만찬을 열었다면 그것은 있는 자들만을 위한 향연장으로 활용한 것이니 비난을 받을 만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출입금지 구역은 최소화되었고, 만찬 때에도 진짜 출입금지된 곳은 들어가지 못해요. 아마 당시에는 우리가 국제대회를 주관한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이런 행사의 의의를 국민과 언론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경험이 쌓이고 우리의 역량이 성숙하면 누구도 이런 행사를 비난하지 않을 거라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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