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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Oct 20. 2020

공산당선언은 현 시대에 어떻게 읽혀져야 할까?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과거 자주 가던 모 사이트에 마르크스가 약 170여 년 전(1848)에 쓴 『공산당 선언』에 관한 독서 토론 모임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글에서는 당시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이 지금의 저임금, 비정규직, 민영화, 성과연봉제, 임금피크제, 파업 등으로 대립하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또한 그런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공산당 선언'을 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착취, 차별, 빈부격차를 과연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해결할 수 있는가?' '현대에 이 책을 어떤 대안으로 적용하기에는 색바랜 주장은 아닐까?' '북유럽 같은 나라들과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등을 나열하고 있었다. 아래는 당시 모집글에 관한 생각을 답글로 적은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 관한 간단한 리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 이곳에 남겨 둔다.




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을 통해 부르주아 지배 계급의 타도를 목적으로 쓴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대안 代案'의 사전적 정의는 아마도 '어떤 것을 대신 하는 안'이라는 말일 터인데, 이 책이 그 대안이라고 언급하신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내용을 보자면 그들의 대안은 결국 현재의 지배체제에서는 어떠한 것도 이뤄낼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는 분업화된 기계에 귀속되어 최소한의 임금을 받으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결국 그렇게 만드는 계급과 사회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그 외의 어떠한 대안도 당시의 사회 구조 안에서는 노동자들의 노예, 도구와 같은 삶을 해결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고요. 말하자면, 말씀하신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비정규직, 민영화 등등을 대체할 수 있는 정책으로서의 정치적 대안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10퍼센트의 자본가가 90퍼센트의 임금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살펴보았고 그 결론으로 중심이 되는 계급을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이끄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당은 다른 어떤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과는 달리, 모든 혁명을 지지하고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죠. 이는 간단한 정책의 변화는 평화적으로도 가능할지 모르나, 진정 한 인간이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기계에 귀속된 도구로써 사는 게 아니라, “정말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단결을 통한 집단의 강한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의 간신히 목숨을 부재할 만큼의 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대다수 노동자에게는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을 묶는 족쇄 이외에 잃을 게 없으니 그들이 뭉쳐 혁명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약 17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가 원하는 세상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각국에서 실험되어온 공산주의는 이제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거목이었던 중국조차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고 이제는 정치적으로만 힘을 발휘할 뿐 그 사회의 경제 구조는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으로 탈바꿈했죠. 북한은 타들어 가던 마지막 촛불처럼 죽어가는 공산주의를 붙잡으며 악을 쓰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고요. 공산주의를 만방에 선언하고 그들에게 윤리 강령을 배포한 이 책은 그럼에도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지 되돌아보게 하고 사회 구조 안에서도 충분히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거든요. 더불어 사회 구조가 사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목적과 의도에 맞춰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죠. 물론 모든 책이 그렇듯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부분도 있고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을 촉구하며 끝을 맺는 이 책은 비록 당시 공산주의의 힘을 보여주자는 의미로써 사용된 것이겠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권력자들이 국민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생각을 확장해 보면, 권력자들이 망각할 때 우리가 그 거대한 권력자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결국 국민이 단결한 힘이라고 바꿔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구절과도 일맥상통할 테니까요. 최근(2016년 기준)에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하며 광화문에 몇 번 다녀왔지만, ‘이 평화 시위를 과연 권력자들은 두려워하기나 할까?’ 아직도 종종 질문을 스스로 던집니다. 부패한 권력들을 끌어내리려면, 과거 프랑스 혁명이나 오늘날 해외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시위와 같이 조직된 집단의 무력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과거에 평화적 시위를 몇 번 참여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따금 허탈감과 공허함 뿐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러한 시위의 불꽃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보았을 때, ‘단결된 집단의 비폭력 시위’가 가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큰 힘을 얻습니다. 폭력으로 쟁취해야만 한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이 아닌 비폭력을 통하여 국민의 명령을 실현하려는 또 하나의 선언으로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니까요. 더불어 “그들의 투쟁의 진정한 결과는 직접적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이 점점 더 확산되는 것에 있다.”라고 말한 책의 구절을 상기시키면서 힘을 얻는 것이고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공산당 선언을 읽고 사회의 착취 구조를 완전히 전복시키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것, 권력을 등에 업고 어두운 곳에서 부패를 일삼는 자들 감시하고 심판하는 것은 (그것에 눈 감지 않고)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2016. 11. 20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통해 정권은 바뀌었고 약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통한 사회 변화와 현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계급 갈등의 격차는 더 벌어졌을까? 줄어들었을까? 그리고 당시 이 독서 토론 모임에 참여했던 이들과 당시에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느꼈을 법한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은 저 때와 비교하면 영향력을 더 확대해 나갔을까?      

나 자신은 비록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을 소유하고 있기는커녕 나이만 더 소유하게 되었음에도 그때보다는 나은 세상이 아닐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는 있다. 물론 그것은 어떤 지표로서 확고하게 이해되는 믿음이라기보다 적어도 평화적으로 세상을 바꾸고 과거보다 비교적 신뢰를 주는 국가 같다는 자기만족에 가까운 믿음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내가 세상이 좋아졌다고 여길만한 자료나 지표를 봤고 동시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만한 자료나 지표도 역시 보며 약간의 현기증과 혼란 속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나는 책은 마치 농사를 짓거나 요리를 하기 위한 도구와도 같다고 여긴다. 그러한 까닭에 이렇게 오래된 책이 경전의 진리처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지기보다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되거나 적절히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고전이라 여길 만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이 글을 썼던 4년 전이나 바로 지금이나 이 책은 내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여 폭력을 통해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자'가 아니라 적어도 현 시점에서 내게는 '국가가 올바로 작동하고 모든 시민이 억압이나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민주사회를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이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로 읽힌다. 그리고 이 책이 그렇게 읽힐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분노할 때, 서로 단결하여 평화 시위로 이끈 비폭력 사회에 조금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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