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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Sep 09. 2020

광화문과 광장에 관한 유홍준님과의 대화.

가상 인터뷰 방식을 통한 독서 이해 방법『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6권』

https://brunch.co.kr/@wringkle/50


일전에 『책을 읽어도 생각이 안 나고 머리가 멍해질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제목으로 여러 독서 방법을 안내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상기 링크 참조) 그중에서 인터뷰로 각색하는 방식은 읽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는 데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진짜 인터뷰처럼 머릿속에서 화자를 상상하여 독서의 지루함을 이겨내고 문어체의 딱딱한 표현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재미있는 방식이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상대가 알아들 수 있도록 자신만의 언어로 정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해당 책의 부분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방식은 자신이 책을 잘 읽고 있는지 가늠토록 하고 질문에서 벗어 말을 덧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단점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글의 생각을 정리해서 다시 인터뷰 언어, 이를테면 대본으로 변환해야 하니 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죠.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독서 방법이 있음을 안내해 드리고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을 통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그중에서도  광화문과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 앞 광장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쉽고 재밌게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이 글을 읽어보시고 어느 날 아이와, 혹은 연인과 저 광화문 앞을 거닐 때, 재밌는 이야기라며 운을 띄우고는 저 문과 우리 민족의 서글픈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줄 수 있다면, 상대는 얼마나 좋아할까요? 이 인터뷰는 긴 호흡의 글을 각 문단의 요지에 맞게 잘라낸 것이니,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만 들려준다고 하더라도 좋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문화에 관하여 더 알고 싶어 하는 상대에게 이 책을 안내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앞서 언급한바, 해당 인터뷰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의 광화문 편을 일부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가상 인터뷰를 통해서 책과 우리 문화에 관하여 좀 더 관심을 두게 되길 바라며, 시간이 되시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인터뷰를 읽으실 때에는 책을 읽는다는 생각보다 그 이미지와 목소리를 그리며 상상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로 유홍준님을 이렇게 생기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왕궁을 복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왜 일제가 총독부 청사를 굳이 경복궁 전각을 허물고 지었을까요? 왕조의 법궁을 그대로 두고 식민통치의 권위를 획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궁을 완전히 허물기에는 식민지 백성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동양 최대 건물을 세움으로써 그 법통을 눌러 정신과 상징을 없애려 한 거죠.

또한 왕궁은 그 민족과 나라의 역사적 · 문화전 전통성에 대한 확인이자 상징입니다. 우리는 경복궁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저력과 현재적 삶의 역사적 뿌리를 보게 되죠.  


그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나요?


모든 나라의 왕궁 앞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광장이 있습니다. 광장은 근대 시민사회의 상징적인 공간이며 왕궁 앞 광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죠. 우리가 근대사의 굴절을 겪지 않았다면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 거리가 그러한 역사적 광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시화와 일제 강점으로 인하여 육조거리는 자동차와 전찻길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새로 조성된 광화문 광장을 이제 우리에게도 나라를 상징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면 언제 광화문 광장을 복원하셨나요?


광화문 복원을 계기로 광화문광장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96년에 총독부 청사 건물이 철거되고 흥례문 권역을 비롯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다음 정권에도 차질 없이 진행되고 2010년에 광화문 복원을 끝으로 1차가 완료가 되었죠. 그러나 이 사업에는 광화문 광장 계획이 없었습니다. 많은 건축가들이 광장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으며, 세종로를 막고 광장을 세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죠.

2004년에 제가 문화재청장으로 취임할 때에는 위의 프로젝트 중에서 광화문 복원만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광화문 복원이 광화문광장을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재청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행자부를 비롯한 다른 어느 관계 부처나 서울시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죠. 그래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 직접 건의할 방안을 마련하고 그동안 광장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건축가들과 만나 상의했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대통령께 전달되자 대통령께서는 크게 공감하시고 그대로 실시하라고 지시하셨죠.


그러면 실무 단계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막상 실무 단계에 들어가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각 부처는 광장을 만들면 일어나게 될 어려운 문제만 제기하였죠. 관계 부처를 비롯하여 심지어 문화재청의 실무를 담당할 공무원들과 이야기해도 타고난 수비수들처럼 안 되는 일들만 찾아냈죠.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해내셨어요?


2006년 5월 오세훈 시장이 당선이 되었어요. 나는 이 일을 서울시에 넘기기로 마음먹고 당선자 시절의 시장을 찾아가 이 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야당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죠. 나는 그에게 광화문 광장의 의의부터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하고 서울시에서 받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시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시민여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겠다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정부의 안을 액면 그대로 받기는 부담이 있었을 거예요. 그리하여 세 개의 안이 만들어졌고 그중에서 현재처럼 섬처럼 된 광장이 다수 표를 얻어 문화재청안은 무산되고 현재의 광장으로 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 부분이 아직도 아쉬운데, 지금도 광장을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인 문화재청 계획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광장이 더 쓸모있고 진짜 사람이 모이는 살아 있는 공간이 되거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하튼 서울의 심장이 될 수 있는 상징적 광장을 마련했다는 점이지요. 그 덕에 우리가 그곳에서 촛불의 역사적 혁명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또한 광장 앞에서 경복궁의 파사드를 볼 수 있어 좋죠! 곁눈으로 보는 광화문의 바로 앞으로 난 광장을 통해 경복궁의 정문으로서의 기능과 관람동선을 확보했다는 점도 의의가 있습니다.  


광화문은 언제 세워진 거예요?


광화문은 태조 4년(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 궁궐의 정문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태조는 정도전에서 각 궁궐의 이름과 전각을 짓게 했지만, 대문에는 별도로 이름을 짓지 않고 정문만 방위에 맞춰 오문(午門)이라고 했어요. 정문이 갖는 뜻은 "닫아서 민간의 이상하고 쓸데없는 말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사람들이 들어오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종 8년(1426), 집현전 학사들이 대문의 이름을 지으면서 정문의 이름을 광화문이라 명명했습니다. 광화란 『서경』「요전」 편에 나오는 말로 "광피사표 화급만방"에서 온 말입니다. "광(빛, 군주의 덕)은 사방으로 덮이고 화(교화, 바른 정치)는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니 그것이 주인 된 자의 임무라는 뜻입니다. 광화문 경복궁의 다른 문과는 달리 출입구의 무지개문은 홍예(아치)가 세 칸으로 되어 있어 자못 정문다운 위용이 있습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고 양 옆으로는 긴 담장이 동십자각, 서십자각까지 뻗어 있죠.  


광화문에도 역사의 상처가 많겠죠?


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광화문이 소실되어 폐허의 성벽이 됩니다. 그리고 1868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하면서 다시 서울의 상징적 얼굴이 되었으니 276년 만의 복원이었죠. 그러나 일제가 강제 병합을 하면서 광화문도 헐리게 됩니다. 일제가 근정전을 가로막고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가 된 거죠. 1916년에 착공된 총독부 청사가 1926년에 준공되면서 광화문은 헐리고 맙니다. 복원된 지 58년 만이죠. 이때 광화문은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져요. 완전히 허물려던 계획을 바꿔 경복궁 한쪽으로 옮겨 놓게 된 것은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일으킨 철거 반대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아! 광화문이여! (…) 너의 운명이 경각에 쫓기고 있다. 비정스러운 끌과 망치가 그대의 몸을 조금씩 파괴할 날이 이미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대를 죽음에서 구해내려 덤비는 자는 반드시 반역의 죄를 쓸 것이다. 그대를 낳은 민족은 지금 암흑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사람들의 뼈에 사무치도록 그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마저도 자유로이 나타낼 수 없는 세상이다. 나 또한 (…) 우리 동포에 의해 백주에 감행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용서해다오! 나는 죄짓는 자 전부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다.  


이 글이 발표된 때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지 3년이 된 시점이어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을 감동시켰죠. 이러한 비판 이후에 광화문이 헐리는 것에 대한 여론이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좋지 않게 일어나자 총독부는 경복궁 북동쪽 담장으로 유배를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배 덕택에 언젠가 다시 돌아올 여지를 갖게 된 것이죠.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분은 누구신가요?


민예운동의 창시자로서 일본 근대 지성의 한 분입니다. 그는 서구 문물에 대항해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을 위해 노력하셨죠. 특히 그는 조선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에게 조선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 분은 조선백자와 민예품을 무척 사랑했던 아사까와 노리다까(1884~1964)와 그의 동생 아사까와 타꾸미(1891~1931)였습니다. 아사까와 타꾸미는 "조선의 소반""조선의 공예"를 펴냈고 죽어서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조선의 흙이 된 사람'이었죠. 야나기는 3.1 운동 때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문화가 파괴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어요. 그는 그 울분을 달래려고 "조선인을 생각한다"를 쓰게 되죠. 이 글은 1920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어로 번역 연재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19일부터 20일까지 그의 유명한 글인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또 반향을 일으킵니다.


나는 오랫동안 조선의 예술에 대해 진정한 존경심과 친밀감을 품어왔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의 예술만큼 나에게 마음을 터놓아준 것은 달리 보지 못했습니다. 또 그만큼 세심한 인정을 담은 예술을 달리 알지 못합니다. (…) 나는 언제나 거기에서 당신들의 자연이나 인생에 대한 관념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들 마음에 아름다움이나 따뜻함이 또는 슬픔이나 하소연에 언제나 거기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나는 그 예술을 통해 깊은 존경의 마음을 조선에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외에도 야나기는 "조선과 그 예술"에서 조선미의 특질은 선의 아름다움과 '비애의 미'에 있다며 무수한 찬사의 글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선에는 조선인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했죠. 그리고 그것은 현세를 떠나 내세를 갈망하는 애잔한 소망이고 선(禪)의 경지라고 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그에 대한 비판도 있고 그의 생각이 교묘한 제국주의 미학이라고까지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좀 달라요. 그에게 죄가 있다면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의 민예 사상과 결합해 찾아낸 죄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가 말한 비애의 미란 인간의 지고지순한 감정의 소산이라는 것이죠. 이 분은 아사까와 형제와 힘을 합해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이 미술관이 국립민속박물관의 모태이죠. 그는 1961년 5월 3일 73세로 생을 마감하고 1984년 9월에 우리나라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광복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를 바로 없애지 못했나요?


들은 바로는 박정희 집권기 당시 나라 형편으로는 이 건물을 헐어버릴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당시 고 최순우 국립중앙 박물관장에게 상의를 했고 최관장은 광화문을 옮겨 그 앞을 막으면 총독부 건물이 고궁 속에 있는 것이 되어 일단 감추어 둘 수 있다고 조언했다고 하죠. 그리하여 평소 문화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콘크리트 복원 명령을 떨어졌습니다. 결국 박정희 시절 광화문의 복원은 복원이 아니라 총독부 건물 가림막으로 옮겨진 중건이었던 것이죠.


콘크리트 복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콘크리트 복원은 2차 대전 때 많은 목조 건물이 파괴된 일본에서 먼저 유행했습니다. 지금은 일본도 크게 후회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화재위험이 없는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미술품은 본래 형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그 예술적 특징은 재료의 속성과 질감을 처리하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마띠에르(기법상 화면의 재질감)과 텍스쳐에서 묘미를 찾는 것이죠. 그래서 목가구의 아름다움은 '선(線)과 땟물'이 결정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의 지붕선은 야나기가 말하던 조선미의 아름다운 선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절대 다른 건축물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죠. 또한 복원된 광화문을 헐 수밖에 없던 다른 이유는 그 위치 문제였습니다. 당시 광화문 복원의 목적은 총독부 청사를 가로막는 것이었기에 그 축은 총독부 청사 건물과 맞추어졌죠. 그러나 총독부 청사와 근정전은 그 축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는데요?


경복궁의 자리앉음새는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금강산에서 한 갈래를 뻗어내려 삼각산(북한산), 북악산으로 이어진 맥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떨어져나간 낙맥인 관악산을 바라보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 청사는 남산에 그들이 지은 신사를 바라보는 방향이었죠. 따라서 광화문의 각도가 3.8도 비틀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위치 자체도 도로를 넓히기 위해서 원래보다 14미터나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광화문을 새로 복원하지 않고는 경복궁을 복원할 수 없었던 거죠. 물론 현재 복원된 광화문으로도 모든 문제가 마무리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 주변으로 길이 나 있기 때문에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잇는 경복궁의 파사드로의 제 모습을 갖추기 어렵게 된 거죠. 우리의 능력은 여기까지였으니 이후 세대가 슬기롭게 처리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광화문에 현판 글씨도 복원한거죠?


네. 광화문 복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죠. 두 가지 방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고학적 원상 복원이라면 원래의 현판을 재현하는 것이고, 중건의 의미를 갖는다면 이 시대의 정서와 문화능력을 반영한 새 글씨로 현판을 만드는 것입니다. 1967년에 중건된 광화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현판이 걸린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닌 것이죠. 당시에는 두 가지 다 어려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 복원 당시의 현판은 탁본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당대의 서예가에게 위촉을 하자면 여초 김응현(1927~2007)에게 위촉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지만 당시 중풍으로 몇 년째 붓을 잡지 못하셨거든요. 이런 상황에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방향은 선인들의 글씨 중에서 집자를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안에는 안의 디지털 복원, 훈민정음, 갑인자, 퇴계 이황의 글씨, 한석봉의 천자문, 정조대왕의 글씨를 검토했죠.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글씨 자체가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현판을 떼어 낸다', '정조대왕 글씨로 곡학아세한다'는 등의 정치적 논쟁화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현판을 만드는 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정치적 문제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죠.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유리원판 사진에서 흥선대원군의 복원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광화문 현판 글씨를 디지털로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8월 15일 이 디지털 복원이 준공식과 함께 걸리게 되었죠.


디지털 복원이라면 그 맛(?)이 안 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문화재위원회가 염려한 대로 운필이 가져오는 붓맛이 살아나지 않았죠. 그래서 서예에 안목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글씨도 아니다'라고 혹평을 합니다. 문화재청이 애써 만들어놓은 여러 안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거의 맹목적인 복원 원칙에 따라 '죽은 글씨'를 걸어놓게 된 셈이죠. 그 결과 현재의 광화문 현판은 평범한 문패로 전락했고 국민들은 아무런 감동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공사를 하면서 재미있던 점은 없었나요?


2005년에 광화문이 철거에 들어가면서 공사 가림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공간에 흉물스러운 거대한 가림막을 설치해놓고 5년 동안 지내야 한다는 게 보통 문제는 아니었죠. 그래서 가림막 설치를 맡은 공사 업체 대표를 불러 철거를 위한 가림막에 설치 미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양주혜의 '바코드'에 의한 공사 가림막 작품이 설치가 되었죠.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2년 뒤 광화문 중건을 위한 공사 가림막이 필요할 때에는 강익중의 작품을 받았습니다.  


그럼 그런 작품은 비용도 족히 들었을 텐데…


네. 이 작품 가격을 대충 계산해보니 30억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욕에 있는 강익중이 나를 찾아와 작품값을 받지 않고 대여해드리겠다고 흔쾌히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인생도처유상수!' 아니겠습니까? 삶의 곳곳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고 그들이 바로 새로운 깨달음을 주지요.  


그러면 복원 과정이 기록된 보고서가 있습니까?


문화재의 복원 뒤에는 반드시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실린 종합보고서가 간행이 되죠. 이 책을 쓴 당시에는 출간이 되지 않았었지만, 영국인 하워드 리드가 쓴 『광화문의 부활, 잃어버린 빛을 찾다(2010)』가 국문으로 간행되었었습니다. 이들은 '광화문 프로젝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광화문 복원에 대한 5년간의 과정을 60분짜리 방송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BBC에 방영하고 책으로 펴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내가 놀란 것은 이들은 광화문 복원이 갖는 의미를 한국적인 시각이 아닌 인류 문명사의 측면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영국인이 그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잃어버린 빛을 찾아서' '슬픈 역사의 문' '끈질긴 생명의 문' '한국의 얼굴, 빛의 미소를 짓다' 등 네 개의 장으로 광화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워드 리드를 처음 만나 "당신은 광화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미 준비된 것처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계몽의 문(The Arch of Enlightenment) 입니다."

그 계몽의 문과 그 앞의 광장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6권 광화문 편 中, 유홍준 저』를 가상 인터뷰로 각색, 편집한 것입니다. 원문은 해당 책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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