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리석은 글쟁이를 위한 변명 21.

by Chris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우울함과 허탈함을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발버둥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아침은 언제나 위기였다. ‘넌 왜 그러고 있어?’ 그 해답을 어떻게든 찾으려 하기보다 그저 침대에 다시 누워 눈감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두목, 알을 깨고 나와야 해요. 할지 말지를 생각하지 말고 당연히 한다고 생각하고 뭐라도 써야 해요. 목구멍이 음식을 하나 가득 쉬지 않고 집어넣듯, 그렇게 두 손 두 발 다 들 때까지 쓰기를 멈추면 안 돼요. 그대의 존재 목적은 창조예요. 돈을 벌고 싶은 걸 알아요. 인정받고 싶은 걸 알아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대의 존재 목적을 도와줄 수많은 연료 중 하나에 불과할 뿐에요. 마치 자동차는 달리기 위해 만들어졌듯, 그대는 글의 창조를 위해 태어났어요. 그대는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에요. 글쓰기는 그 자체로 그대의 존재 목적이에요.”

조르바인지 데미안인지 혹은 그 누구인지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글이 보였다고 해야 할까? 이따금 글은 그의 의지 속에서 태어나기보다 손가락에서 자유롭게 태어나 시신경을 거쳐 대뇌로 전달되었다. 어리석은 자의 대뇌는 이렇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 스스로 존재 목적을 부여해야만 한다. 모태 신앙이었던 나는 스스로 신앙을 버렸고 경영학도였던 나는 스스로 전공과 직업을 버렸다. 내 존재를 말할 수 있을 법한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내가 책임져야 할 연인도, 아이도 없다. 내 존재는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 어설프게 만들어져 있을 수 없는 생명을 부여받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나의 생은 이 땅 위에 서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괴물 아들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더라면, 혹은 그가 사랑할만한 존재를 찾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존재에 관해 적어도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인가?’ 그나 나나 사랑으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 다른 존재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제법 똑똑한 괴물이 현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쓰지 않았을까? 글이 비록 사랑과는 다르며 어느 순간 무너져버릴 삶의 목적이 되더라도 그는 존재의 허무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글을 썼을 것이다. 어떤 글이라도 글을 쓸 때만큼 존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없을 테니까. 둥둥 떠다니는 무형의 생각들이 이 글자만 있다면 금세 존재하는 것이 된다. 물론 수많은 세상의 것들을 짜깁기하여 만든 이 글 역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내게 물을 것이다. ‘창조자 양반, 내 존재 목적이 뭐요?’

나는 내 글이 진짜 괴물이 되지 않게 사랑해주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 내 글이여. 비록 너의 모습은 흉악하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왜 만들었는지 모를 쓰레기 같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네가 외롭지 않게 나는 너와 닮은 글들을 별처럼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 그 무수한 존재들이 모여 또한 새로운 것이 창조될 수 있도록 나는 내 의지를 보일 것이다. 나의 존재 목적은 창조자이니, 내 존재가 발아래로 잠기지 않는 한 끊임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침대를 바라보며 아침부터 허무맹랑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인터넷을 켰다. 더 이렇게 아침을 흘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열심히 글을 썼던 때를 간신히 기억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옆에 그 누구라도 있었을 때였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듯 집을 떠나 아침 일찍 나와 닮은 존재가 머물러 있는 장소로 몸을 옮길 때였다. 언제나 하루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답답한 집은 글쓰기를 위한 적절한 공간이 아니었고 방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금방 다른 유혹에 젖게 했다. 그러한 까닭에 일단 아침 일찍 나와서 글을 써야 하는 책임! 그것을 느끼도록 하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또다시 전처럼, 자신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을 온라인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아침의 기상과 계획적인 삶을 위한 모임이 목적인 모임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명이 참가하고 싶다는 글을 보내왔다. 쇠뿔도 당김에 빼겠다고 다음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서며 온라인으로 인증사진을 찍어 올렸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시작이 만족스러웠다. 이다음부터는 마치 자동화 시스템처럼 하고자 하는 계획이 어느 정도는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넉넉하니 영어 공부도 하고 글쓰기도 해야지!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글을 쓰다가 한두 시간가량 책을 읽을 거야! 끝나면 운동도 다녀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뭔가 마음이 뿌듯해지는 듯했다.

그는 외롭고 고독했다. 그러나 그 감정 상태에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은 외롭고 서글펐다. 고독을 대가로 쓴 글보다 여러 맛이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군가의 굴곡진 인생처럼,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감미롭고 때로는 쓰디쓴 글을 쓰고 싶었다. 슬프기만 한 글, 쓰디쓰기만 한 글은 아무리 그 창조주가 그러한 상태에서 잉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바라지 않는 바였다. 물론 모든 것이 행복하기만 한 문장을 바란 것도 아니다. 아! 우리 역시 어느 고뇌하는 작가의 글쓰기 안에 속해 있는 것인가?

글의 창조주가 문장의 행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시련과 불행을 기대하듯, 만약 우리의 창조주가 어떤 멋진 이야기를 쓰기를 그저 원하는 거라면, 그는 내 어머니처럼 내 행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가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 중 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든, 혹은 전 생애에 걸친 한 인간의 이야기를 집필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나를 창조한 까닭이 적어도 나의 행복과 관련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나리오는 오로지 그의 창조 욕구에 의한 것이며 내 글은 나의 욕구로 탄생한다. 나는 글로써 무엇이든 만들어가고 그 역시 그의 말씀으로 무엇이든 만들어간다. 그의 언어로 창조한 세상이 단 하나의 감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 역시 하나의 감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기쁨만 있어서도 안 되고 슬픔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 김치를 버무리듯 골고루 버무려 특유의 맛이 나게 해야 한다.’ 어리석은 글쟁이는 작가의 한 두 가지 감정에 지배받는 글만큼 좋지 못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굶주려도 자신이 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써 내려갈 동기들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애써 쓴 글들이 내 감정의 기복에 따라 흔들린다면, 그것을 빠져나올 동기들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긴 액체와도 같은 감정이 성난 파도처럼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릇의 액체를 한가득 채워 닫아 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감정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어떤 것에 속해 있다는 느낌, 소속감이 아닐까?

‘소속감이라는 감정은 인간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사랑을 갈망하는 것도 어쩌면 사랑하는 이에게 속해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무리에 소속되는 것 역시 그것을 통해 감정을 충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속감이라는 동기, 특히 글을 써야 하는 동기를 계속 주입받을 수 있는 곳에 소속되어 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어느 외로운 존재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소속의 욕구와 분리의 욕구 그사이 어딘가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었다. 이중적이며 때로는 모순적이나 그 둘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나를 한 곳에 세우기에는 아직 어리고 또한 어리석었다. 그는 창조자였으나 실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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