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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13. 2020

승급하다

나의 주짓수 도전기 27.


"이번 주 일요일에 승급식이 있습니다. 참여하실 분은……."     

올 한 해도 이제 약 2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잘하지 못하니, 나만의 속도로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마음으로 한지도 어느덧 9달가량 지났다. 코로나와 개인 사정 등으로 인해 운동을 중간에 하지 못한 시기를 빼면 약 7~8개월가량 수련한 셈이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아니, 나는 적어도 이 운동을 하는 시간이 부끄럽지 않게 수련하고 있는가? 나의 실력은 나아지고 있는가?'

수많은 분야에 도전하는 초보자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는지 의심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따금 나 자신의 노력에 관하여 의심할 때가 있었다. 지난번 대회에서처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조차 실제로 활용하지 못하고 허둥댈 때는 더욱 그러했다. 다만 다행인 점은 학습의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이립을 지난 나이라는 점이었다.

그 나이가 훌쩍 지나고 나서 느끼는 이립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 여러 경험을 거쳐오면서 반복되는 일들에 관해 나름의 주관과 확신을 가진다는 점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와 같은 오래된 명언의 진정한 의미를 몸으로 익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진짜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게 이 주짓수라는 외국인으로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대학 시절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나는 머리가 하얗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느는 것 같지 않은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익혀야 할 영어의 기본 문법을 몸으로 익히지 못했고 여러 회화적 패턴에 익숙하지 않았을뿐더러, 실제로 영어로 대화를 해본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년에 걸쳐 적절한 문법과 패턴을 익히고 실제로 상대와 대화를 많이 하게 됨에 따라서 나는 좀 더 편하게 외국어로 말을 하게 되었다. 주짓수는 꼭 이런 외국어 같았다. 배우고 노력해야만 알 수 있고 상대와 계속 대화해야만 알 수 있는 새로운 언어였다. 이렇게 언어 학습의 과정과 같다는 생각, 영어처럼 평생을 꾸준히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

다만, 승급이라는 내 실력을 인정하는 자격증(?)에는 조금 부담이 있었다. 나는 아직 잘하지 못하며 1 그랄(grau)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형님, 1 그랄은 몇 개월을 꾸준히 다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줘요. 크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승급에 관한 나의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니, 매번 내게 가르침을 주는 동료 한 명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곳에 비하면 되레 늦은 편이래요. 다른 도장은 3개월 정도 하면 기본적으로 1 그랄은 주는 듯하더라고요."

오래전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관한 동료 Y 군이 말한 게 문득 떠올랐다.

"승급하는 사람은 미리 알려주십니까?"

운동을 마치고 사범님께 조용히 여쭈어보았다.

"아니요. 따로 알려드리진 않습니다. 참여를 신청하신 분들 가운데 선발이 돼요."

사범님은 늘 그렇듯 웃으면서 내게 이야기해주셨다.

"승급식 날, 오세요? 저번에 친구와 여행 약속 때문에 못 올 수도 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Y군은 예전 대화에서 내가 말한 것을 떠올리고 다시 물었다.

"네. 그때 전후로 친구와 여행을 계획했는데, 따로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승급식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다만 그랄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생활체육으로서 접근하는 나로서는 승급은 마치 영어 회화 자격증에 적혀 있는 레벨과도 같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다만 그것이 갖는 무게감을 생각할 때, 나는 아직 부끄럽게도 승급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승급식 당일이 되고 우리는 본관에 모였다. 전 지부의 사람들이 흰 도복을 입고 삼삼오오 앉아 개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온 반가운 이들에게 인사를 한 뒤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뒤 승급식의 개회를 알리는 관장님과 지부장님의 인사가 있었고 이어서 승급 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흰 띠 1 그랄!"

호명된 사람들은 지부 사범님과 관장님 앞에 서 있었고 하얀 띠의 끝에 있는 검은 부분에 반창고를 하나 감아주었다.

"형님, 형님은 호명 안 되신 거예요?"

한 번이라도 이 친구를 스윕했으면 좋겠다 싶은 한 동생이 의외라는 듯 내게 물었다.

"응. 그런가 봐. 다행이야. 나는 아직 내가 받을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나와 같은 시기에 들어와 열심히 운동한 Y군이 못 받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코로나 등으로 인해서 6개월 기간을 아직 다 채우지 못해서 함께 못 받았나 싶기도 했다.

"그다음 흰 띠 2 그랄 대상자입니다."

흰 띠 1 그랄 승급 대상자 호명 및 박수 후에 이어서 흰 띠 2 그랄 대상자를 호명했다. 첫 호명에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과 Y 군의 이름이 불린 것이다. 2계단 상승이었다. 물론 기간으로 따지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뒤에 앉아서 내게 물었던 동생이 웃으며 손뼉을 쳐줬다. 다른 친구들도 우리를 보며 박수를 보냈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일어나서 사범님 앞으로 갔다. 그는 손에 있던 반창고를 떼어내 띠의 끝부분에 단단히 감아주었다. 짧은 몇 개월 동안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스쳐 갔다.

'나는 성실히 잘하고 있는가? 나는 충실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던 나의 노력을 믿을 수 있는가?'

천천히 감아주시는 저 흰 두 줄은 그것에 대한 사범님과 관장님의 대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두 줄을 다 감고 사범님은 축하한다는 듯 가볍게 포옹을 해주셨다.

"두 그랄이나 받을 줄은 몰랐어요. 2 그랄이니까 이제 2배로 노력해야겠어요."

"우리 나이에 지금 하시는 것보다 2배를 하시면 다쳐요."

사범님의 뒤에 계시던 관장님은 웃으면서 나를 가볍게 포옹하시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지금껏 그랬듯, 다치지 말고 성실하게 꾸준히만 하자.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에게 힘이 되었던 것들은 모두 네가 꾸준히 해온 것들이었으니까. 기본기에 충실하며, 교만하지 않고 성실하게…….'

무거워진 띠를 보면서 어린 시절에나 했을 법한 유치한 다짐들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렇게 승급식이 끝나고 띠의 색깔이 바뀐 이들을 축하하기 위한 소위 '띠빵'이라는 행사가 이어서 진행되었다. 새로운 띠를 받은 이 옆으로 수련생들이 양쪽으로 서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걸어가 천장에 묶여 있는 자신의 띠를 받아 다시 되돌아오는 행사였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다른 수련생들은 고생했다는 의미로 자신의 띠로 걷는 상대를 때린다고 해서 띠빵이라고 불렀다. 일종의 생일빵같은 행사인데,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오랜 시간 수련의 길에서 여러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띠를 쟁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띠로 때리는 것은 오랜 수련 동안의 고난이나 액땜과 앞으로 더 잘하라는 채찍질과 같을 것이며 위에 묶여 있는 자신의 새로운 띠를 스스로 풀어내는 것은 쟁취, 그 띠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새로운 수련의 험난함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자칫 폭력적으로까지 보이는 행위이지만, 새로운 띠를 받기 위한 주짓수의 긴 수련 과정을 감내하는 수련자로서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행사가 길어질수록 점점 정도를 넘어서는 듯한 폭력성에 조금 우려가 들기도 했다. 모두가 환호하는 상황에서 그 고통(?)의 길을 걷는 사람조차 야릇한 광기에 도취되어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심지어 상대가 반은 농담, 반은 실제인 듯 한 고통을 호소함에도 상대를 넘어뜨려서까지 그 상징적 행위를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이러한 폭력에 관하여 조금 심각하게 말하자면, 책에서 접한 파시즘이 떠오르기도 했다. 파시즘의 군중 심리, 어떠한 광기 속에서 폭력이 정당화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무감각해지거나 그것을 막지 못하게 되는 군중의 심리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한 폭력 행위가 평범해지고 그것을 무감각하게 방조하는 것, 한나 아렌트가 말한 어느 사회에 평범한 악이 존재하게 되는 과정의 단면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쥐고 있던 이 흰띠가 상대를 고문하는 채찍처럼 느껴져, 더는 '축하'라는 의미로 상대의 몸을 내리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멀리 있는 관장님의 눈을 보았다. 내 눈에는 그의 눈빛에서 '모두가 상황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점점 통제 범위 밖으로 향하려는 이 전통적인 행위를 멈춰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견딜만한 오래된 전통과 흥분한 군중의 폭력 사이에서 고민하는 듯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생각이며, 이 행사에서의 행위가 내가 과민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가 볼 때에는 이는 지나친 생각이며 상대가 견딜 만큼, 서로 즐길 수 있는 정도(정말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로 했으니 괜찮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게 한 가지 고민을 준 행사가 끝나고, 관장님은 옅고 부드러운 미소로 의미심장한 말을 하셨다.

"이 띠빵을 하면서 그게 과도해지는 것 같다고 문제를 제기하셨던 분이 가장 많이 때리시더군요."

야릇한 광기는 어디서나 존재하며, 그게 문제의식을 제기한 이들조차 점점 무디게 한다. 주짓수라는 격투기에서 무도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 폭력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운동에 도복과 같은 의상을 강조하고 무도라는 정신과 예의를 강조하는 까닭은 어쩌면 우리가 광기에 휩싸인 폭력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상징들이 아니었을까?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승급식과 띠빵이라는 행사의 인상이 계속 떠올랐다. 그 인상의 끝에는 그 폭력의 위험성을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나와, 동시에 야릇한 광기가 존재하는 그 길을 견디며 당당히 걸어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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