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시간의 극복 방법/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나의 일상 여행기. (33)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애매한 시간보다는
아예 불안한 시간이
나을 수 있다.


애매한 시간보다는 아예 불안한 시간이 나을 수도 있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창밖으로 환한 빛이 들어와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보았다. 6시 40분쯤이었다. 대충 옷 입고 세수만 하고 나간다면 6시 50분에도 가능했기에 다시 누웠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자야 했다.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잠들다가 눈을 떴다. 6시 46분이었다. 눈을 감았다. 한참 지났다고 생각해서 불안감에 눈을 뜨니 48분, 다시 감고 뜨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52분을 조금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일어나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했다. 차라리 일어났을 때 씻고 조금 더 여유 있게 준비해도 될 텐데, 매번 그 마지노선까지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시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예정된 많은 약속들이 그런 식으로 처리되었다. 나는 애매한 시간부터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텼고 그러다가 결국 늦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차라리 어제처럼 온 신경이 위기를 알리는 불안한 시간부터 시작하면 그전까지는 잠이라도 편히 잤을텐데, 애매한 시간으로부터의 시작은 불안감을 만성처럼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 애매한 시간의 불안감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특히 만성적으로 늦어서 사람들로부터 지각쟁이 취급을 받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며, 단번에 인식의 전환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차라리 예정 장소까지 적어도 1시간 이상 일찍 가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는 아마 작년 말부터 시작한 방법인데, 조금 먼 곳에서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을 때 한두 시간 미리 인근 커피숍으로 가서 기다리는 방법이다. 이러면 10분, 20분의 애매한 시간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 1시간 내지는 2시간이라는 시간은 적어도 무언가를 진득하게 하기엔 꽤 괜찮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닥칠 수 있는 뜻하지 않는 않은 일로 늦을 염려도 없다. 누군가 만날 때 근처에 미리 와 있으면 자기가 기다리는 인근 커피숍으로 오게 할 수도 있는 등 상황을 내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다. 애매한 시간도 아니고 불안한 시간도 아닌 일찍 온 시간부터 예정된 시간 전체가 나만의 시간이 된다.

물론, 그것을 일상의 모든 크고 작은 약속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떠한 일 바로 다음에 다른 일들이 자리하고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허둥지둥하던 아침의 경우 취침이 나의 일이었고 바로 다음 일이 기상 후 바로 상윤이를 보는 것이었다. 이때 가장 좋은 것은 약속 예정 시간과 직전의 일인 잠 사이에 간격을 가능한 한 넉넉히 두는 것이다. 혹은 차라리 잠을 쪼개 학교 책상에서 잠드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잠이라는 건 누워서 편안하게 쉬지 않으면 피로가 쌓이는 것이므로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결국, 넉넉한 간격을 두고 미리 가 있으려면 전날 일찍 자고 한시간 일찍 나서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일 수밖에 없다. 애매한 불안으로 아침부터 지각할까봐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야 그게 낫다. 그 뿐만 아니라 새벽만 되면 머리가 마비되어 하게 되는 의미 없는 여러 허튼 짓(?)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학교에 와서 인증샷을 찍으니 딱 7시였다. 오늘은 상윤이도 늦을까 봐 뛰어왔다고 한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보니 정신없이 뛰어온 것 같았다. IT 카페에 자리를 잡고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나는 '부분과 전체'를 그는 비문학 언어영역 문제집을 보았다. 실증주의 비판에 대한 부분이 나왔다.

하이젠베르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이다.' 등으로 말할 수 있는 실증주의적 사고관이, 부분으로서 오로지 입증 가능한 것만 논하고 그를 통해 전체적 연관성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과, 과학에서조차 추상적이며 모호한 언어가 아닌 명료적 언어 사용만을 요구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다며 이들을 비판했다. 책을 읽으면서 철학의 실증주의가 무엇인지, 왜 그와 같은 사고관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책을 보면서 이에 대해 뚜렷하게 든 인상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였다. 장님은 거대한 코끼리의 부분만을 만질 수 있으며 오로지 만진 부분을 통해 그것의 특징을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코끼리의 길쭉한 코 일부를 만진다면, 아마도 그는 코끼리를 뱀과 같이 긴 동물이라고 여길 것이다. 또한, 거대한 몸통을 일부를 만진다면 벽과 같은 형태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유추를 과학으로 본다면, 자연의 극히 일부분을 통해 물리 법칙을 발견할 때, 전체와의 관련성을 고려한다면, 과학자들은 코끼리와 같은 오류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는 그러한 전체적인 연관성을 고려하다 보니 알지 못하는 것을 만든 존재자가 필시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으로써 창조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증주의는 마치 법적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처럼 실제 증거가 있는 것만 논하자는 것이 된 것이 아닐까? 그로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심증에서 기인하는 오류를 배제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채택이 아닐까 싶다. 코끼리를 만질 때 만진 부분에 대한 언급 이외에 가려진 부분에 대한 추측이나 애매모호한 추상적 말들은 삼가고 오로지 사실로서, 그리고 검증 가능한 것들만을 논하자는 측면인 것이다.

런 점은 정밀과학으로서는 좋은 접근법 아닐까? 하이젠베르크는 개체에 대한 세심한 정확성과 언어의 극단적 명확성은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과학의 수많은 업적은 정확성과 언어의 명확성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상상력에 기인하는 것도 또한 알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할지라도 그 개체 간의 연관성에 관한 수많은 추측과 논박 속에서 과학의 나침반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거대한 망망대해 위에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곳까지 가고자 오로지 나침반에 의존하고 있다. 바로 그 나침반이 바로 이러한 위대한 연관성에 대한 상상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까닭은 그가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자로서도 확률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로운 현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밀과학의 이러한 태도를 보며 역사학에 있어 두 견해인 '사실로서의 역사'' 해석으로서의 역사'가 떠올랐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마치 실증주의자들의 견해처럼, 말할 수 있는 사실들만을 다루고 있다면, 해석으로서의 역사는 사건과 사회의 연관성을 위한 하이젠베르크적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들이 마치 상충되는 것처럼 배우지만, 상보적이며 역사적 사실 간의 관계 속에서 마치 양자역학에서와 같은 확률적 법칙을 파악하게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냉철하고 정확한 사실'로서 학문을 받아들이되 그것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적 사건과 원리에 대한 어떠한 연관성에 관해 토론하고 고찰해야 한다. 그것이 금지된다면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처럼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나침반을 잃게 될 것이다.


"충만만이 명석에 통할 수 있으며
심연 속에 바로 진리가 숨어 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하나 더 있어서 적어둔다. "충만만이 명석에 통할 수 있으며 심연 속에 바로 진리가 숨어 있다."라는 공자의 말이다. 그는 이 말이 경험을 충만을 의미하는 것뿐 아니라 어떤 현상에 대하여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다른 여러 종류의 '개념의 충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언가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여러 종류의 개념으로 하나의 현상을 설명할 때 가능하며, 진리에 이르는 깊은 이해는 심연, 즉 깊은 사색을 통해 가능하다. 나의 독서는 충만을 위함이며 나의 고독은 심연을 향해있다.

이모네로 가서 밥을 먹고 집에 들어오니 피곤이 밀려왔다. 침대에 가로로 누워 있으니 나른함이 온몸으로 밀려왔다.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면 아마 한두 시간 그냥 흘러버리고 말 것을 알았지만, 온몸은 그런 나른한 잠을 요구했다. 몸을 침대에 푹 담갔을 때, 약간의 어지러움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약간의 현기증으로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 조금 들었다. 하이젠베르크 때문인지 전자구름이 떠올랐다. 전자의 위치가 원자 안에서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개념이고 그 자체가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내 깜깜한 꿈속에서는 전자들이 구름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조그만 전자들이 솜사탕 같은 구름 위에서 위아래로 빠르게 헤엄친다. 아무래도 저 이름 안에서 전자는 전자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물질, 분자, 원자, 원자핵, 소립자, 쿼크와 랩톤.

이들은 한 알의 모래에서, 아니 그보다 작은 공간에서 이미 우주를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우주 밖에서 한 알의 모래 위에 살고 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의 개념은 사라졌다. 우리는 먼 곳과 가까운 곳 그 중간 어디에서 양쪽을 보고 자연을 관찰한다. 문득 와각지쟁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며 나는 달팽이의 뿔 위에서 티끌이 되어 서 있다. 달팽이의 뿔보다 작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고 아프게 하는 것일까? 서로 사랑해도 모자란 시간인데…. 잠시 떴다가 다시 감았더니 우주가 펼쳐진다. 다만, 별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다. 뭔지 모르는 붉게 보이는 잔상이 심연에 머무른다.


"경제학자들은 과학자인 척하는 걸 좋아한다.
나도 종종 그러기 때문에 잘 안다."


눈을 뜨니 휴대폰은 2시 20분을 가리켰다. 아직도 핑 도는 느낌이 조금 있다. 편안하게 누운 상태가 아니어서인지 또는 아침나절에 마신 커피 두 잔 때문인지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몸이 회복되는 느낌도 들었다. 이게 식물처럼 쭉쭉 자라는 느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키가 더 자랄 것이라는 환상은 없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키가 좀 더 커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아침과 같은 뭉그적거림이 다시 시작됐다. '일을 위해 바로 일어서야 한다.'라는 마음과 '회복을 위해 좀 더 자자'라는 마음이 부딪힌다. 하지만, 반드시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는 상태에서 바지를 벗고 다리를 올려 반듯하게 눕는다. 아침에 개지 않아 어지럽게 놓인 이불에 다리가 닿자 사각거리는 감촉과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선선한 촉감이 무척이나 기분을 좋게 한다. 감싼 이불에 다시 온기가 돈다. 시원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대로, 이대로, 내 팔 위로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나와 같이 숨을 쉬는 누군가가 있다면 좋을 것을.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 주변을 엷게 간지럽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렇다면 난 행복감에 젖어 보통의 삶을 살았을 것을.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책임질 사람이 없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가 없으며 돈이 없으며 직업이 없다.

다시 자리를 박차고 옷을 입고 약간은 몽롱한 상태로 길을 나선다. 비가 내려 사람들이 다 커피숍으로 도망쳤는지 전날보다도 분주하다. 어제 앉았던 1인용 소파 자리마저 없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벗어나 월천 라운지로 자리를 옮긴다. 다행히 괜찮은 자리가 있다. 그 자리 정도면 충분히 커피숍 자리를 대체할 만했다. 텀블러에 커피를 타고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면서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아마 오늘은 8시가 넘어서 마무리를 할 것 같다. 혹은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상윤이에게 연락이 왔다. 갑자기 세계 과자가 먹고 싶어 오는 길에 자주 먹는 과자 2개만 사 오라고 2,000원을 온라인으로 보냈더니 하나만 사 왔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앞자리에 앉히고 나는 계속 휴대폰으로 일기를 썼다. 잠깐 그가 펼친 책을 보니, 노동 수요-공급에 관한 그래프가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몇 가지 그래프와 수식이 보였다. 문득 "경제학자들은 과학자인 척하는 걸 좋아한다. 나도 종종 그러기 때문에 잘 안다."라던 그레고리 맨큐의 말이 떠올랐다.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수학적 언어처럼 경제학을 다루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함에 따라 어떤 현상을 마치 고전 물리학의 법칙처럼 여기지만, 경제학은 경제학일 뿐이다. 자연과학처럼 자연계의 현상에 대하여 삼자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경제 현상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현상에 관여한다는 차원에서 비과학도의 시각으로는 관찰자와 관찰 도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던 양자역학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수학과 그래프를 이용한식으로 나름의 객관성을 얻고자 하지만, 가설과 검증을 통해 법칙화하는 자연과학의 이해와는 달리 법칙화한다고 해도 매번 틀리는 경제학이, 도리어 경제 현상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때로는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만의 학문적 카르텔을 형성하려는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물론 그들이 그런 의도가 있다기보다 지식의 성체를 계속 쌓다 보니 어느새 기독교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마치 하늘 높이 치솟게 되어버 거대한 고딕 양식의 건물처럼 된 것이겠지만….

일기를 다 쓰고 나니 9시가 다 되었다. 거의 그쳐가는 안개비가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린다. 더는 내리지 않겠지. 집에 돌아와 따뜻한 잠바만 챙겨입고 아르바이트하러 길을 나선다. 비가 얼굴에 흩날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길 위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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