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말초적 욕망의 소비/고독과 중독을 이겨내는 것들

나의 일상 여행기. (32)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이를테면 난 말초적 욕망을
유튜브를 통해 소비하는 것이다.


눈을 뜨니 6시 55분이었다. 너무 놀라 씻지도 않고 대충 옷과 가방만 챙겨 간신히 집을 나셨다. 어제 2시가 다 되어 잔 게 문제였다. 저녁 시간이 되면 내일에 대한, 당장 무엇을 할지에 대한 생각이 정지하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주로 12시 이후에는 유튜브를 보는데, 생각을 마비시키고 오로지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다는 의미에서 어쩌면 중독일는지도 모르겠다. 유튜브에서 아이돌 영상이나 또는 자동으로 관심사를 찾아주는 연관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때로는 같은 영상이 연이어 나오는데도 그냥 보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게 바로 이런 의미인지 그렇게 보다가 시계를 보면 금방 1시가 넘었다. 거기서 멈추면 다행이건만 과거의 반성과 교훈은 잊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는 실수를 되풀이했다. 그렇게까지 안자고 버티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그 시간까지 책을 읽는다면 지식에 도움이라도 될 텐데,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일들일수록 시간을 버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재밌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모든 외설적인 것들이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중독적 증상에 빠져들게 하는 것처럼 이 또한 그러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미는 생각하고 탐구하면서 발생하는 재미와는 다르다. 이는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말초적 쾌락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거나 대체로 약한 고통에 강한 쾌락을 동반한다.

이를테면 난 말초적 욕망을 유튜브를 통해 소비하는 것이다. 온갖 자극적 영상과, 연이은 연관 영상들은 마약처럼 우리의 생각을 좀먹는다.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가장 큰 까닭은 마음이 허전해서가 아닐까 싶다.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분명히 우리의 마음에 블랙홀과도 같은 구멍이 있어 자꾸 그 공허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다른 사람과 행복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관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위로받고자 한다.


일전에 어느 교육 유튜브에서 중독에 관한 쥐 실험을 본 적이 있다. 철창에 갇힌 쥐에게 코카인이 든 물병과 일반 물병을 함께 두었더니 거의 모든 쥐가 죽기 직전까지 약물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들에게 쥐 친구들이 함께 있는 놀이공원을 만들어 즐기게 해 주었더니 반대로 대부분의 쥐가 약물을 강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 방송에서는 쥐가 아닌 인간을 상대로 한 유사한 상황을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헤로인에 중독된 군인의 사례였다. 방송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 중 헤로인에 중독된 숫자가 20%가 넘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에서는 이들이 다시 돌아올 때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들 가운데 95%는 집에 돌아와 약물 사용을 멈췄고 심지어 재활원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방송은 가족과 좋은 친구들과 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다른 사람과 행복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관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위로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http://issueinside.co.kr/bbs/board.php?bo_table=gallery&wr_id=4702)

나 역시 유튜브에 강박적으로 빠져드는 까닭이 어쩌면 건강하지 못한 관계나 소통 부재의 위기 신호이지 않을까? 마음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외롭고 고립된 긴장 상태에서 이러한 쾌락을 쫓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형태의 재미 추구는 아마 대체로 이러한 현상의 반영일 것이다.


"전문가란 해당 분야의 모든 지식을
통달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해당 분야의 가장 큼직한 몇몇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상윤이는 이미 먼저 IT 카페에 와 있었다. 커피 내기 때문에 제시간에 오긴 왔지만 피곤함을 가눌 수 없었다. 커피로 졸음을 좀 깨우려 했으나 쉽지 않아, 잠시 상윤이의 다리를 베개 삼아 쪽잠을 청했다. 한 20분 정도 자고 나니 상쾌해졌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하고 가루 커피를 뜨거운 물에 타서 한잔 마셨다. 정신이 좀 돌아와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다시 펼쳤다. 책을 매일 한두 시간씩 본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수십 페이지가 남아있다. 저번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책 자체도 담고 있는 내용이 챕터마다 다르고 그 부분 부분들이 과학 뿐 아니라 종교, 역사, 사회, 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이 폭넓게 연결되기 때문에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요즘의 독서 방식이 발췌와 발췌에 따른 자기 생각, 그리고 참조할 만한 도서들을 적어 나가거나 해당 도서에서 생각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다시 발췌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예전에는 '발췌한 양에 비례하여 생각을 기술하자.'였는데 그렇게 했더니 발췌량을, 기술할 생각의 분량에 맞춰 조절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발췌와 생각을 자유롭게 하되 충실히 기술하자.'로 타협했다.

생각을 충실히 기술하는 것은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를 확인할 방법일 뿐 아니라 다른 책과 또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폭을 확장하기에도 좋은 방법이다. 이는 책에서 저자의 연구나 생각이 다른 책이나 경험 또는 사회의 현상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살피도록 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사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유추의 범위를 확장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속도인데, 책을 빠르게 해치우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다소 힘들고 지루함과 생각하기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방법이다. 또한, 운동과 같은 꾸준함이 요구된다.

우리는 사회든 과학이든 또는 오랫동안 발전해온 어떤 학문이든, 평생에 걸쳐 연구해도 전체의 한 단면만을 간신히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조차도 요즘 시대에는 극히 세분화되어 자기 분야에서 한발만 밖으로 나가도 잘 알기 어렵다. 이는 전문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책에서 닐스 보어는 ‘전문가란 해당 분야의 모든 지식을 통달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해당 분야의 가장 큼직한 몇몇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찰이라는 것은 자신이 연구한 부분을 통해 사물 간의 연관성을 살피고 그를 통하여 전체를 유추할 수 있으며 사고 과정에 발생할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식.
GTD (Get Things Done)


책을 읽고 나서 점심을 간단하게 다이어트식으로 먹고 나서 운동 기구를 들고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매번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저녁 12시 쯤에 운동했었다. 문제는 이러면 십중팔구 아침 7시까지 등교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운동을 어찌할 지 고민이 들었다. 그런데 친동생이 어제, 저녁 술자리 있음에도 운동을 못할까봐 회사에서 오자마자 바로 시작하고 술을 마시러 나갔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떻게든 운동을 빼먹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 생각에 감명을 받아 '나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을 꾸준히 해보자!'고 다짐후 이 시간에 도전을 해본 것이다. 조금 덥긴 했으나 운동을 하고 씻으니 졸음도 달아나고 점심때 시간 낭비하는 것도 적은 것 같았다. 단점은 아무래도 한낮에 운동장에서 하는 거라 이렇게 매일 한다면 앞으로도 더위와 싸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문득 GTD(Get things done) 방식이 떠올랐다. 일들을 모조리 한곳에 모으고서 시간에 맞춰 일들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빨리 처리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놓쳐서 일을 못 한다는 핑계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 운동 방식은 저녁 12시에 맞춰서 하고 있었는데, 이 시간이 지나거나 사정이 생기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시간에 하고 싶어도 마땅한 시간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가 동생의 말 한마디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 일을 동생의 경우처럼 우선순위로 두자고 마음 먹으니, 쉬려고 하거나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려할 때 운동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간은
고독마저도 잊게 해줄 정도로
엄청나게 값진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고 커피숍에 갔더니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문득 조앤 롤링처럼 매일 같은 커피숍의 같은 자리에 앉은 나를 상상했다. 스타벅스는 늘 분주하니 일찍 오지 않는 이상 같은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나만의 자리에 앉아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어디에 앉아야 할까 찾다가, 생각해보니 휴대폰으로 내리 글을 쓴다면 굳이 테이블이 있는 책상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낮은 테이블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생각보다 푹신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글을 내리써 가며 전날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곱씹었다. 전에 테이블에서 할 때는 학생이 되어 공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으니, 한 여름날에 무더위를 피해 커피숍으로 피서를 온 느낌이었다. 올해 여름에도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그저 더위를 피해 이렇게 작은 나만의 소파 위에서 글을 쓰고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의 글쓰기는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글쓰기가 아닐까? 여름에는 출판물을 만들어야만 한다. 아니 그전부터 그 일을 착수해야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통장에 적어도 이러한 행복을 유지할만한, 혹은 깨뜨릴 수 없을 정도의 돈은 있어야만 했다. 남들에게는 그토록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출판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글 속도라면 아마 한두 달 안에 1권의 책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을 하려고 계획해야 한다.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간은 고독마저도 잊게 해줄 정도로 엄청나게 값진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이 시간만큼은 삶의 모든 고민을 잊게 했으며 오로지 내가 살아 있고 또한 생각한다고 여기게 했다. 이는 독서만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기쁨이었다. 마치 창조주가 된 것 같았으며 공상으로 끝나던 것들을 붙잡아, 나만의 작품을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감상하고 기뻐해줄 누군가를 생각하니, 벌써 무엇인가를 이룬듯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저 그 옆에 기댈만한
누군가가 한 사람쯤 있다는 것.


저녁은 상윤이와 오랜만에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어느 시절에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먹었는데 함께 먹을 사람이 거의 모두 떠난 뒤로는 자주 즐기지 못한 음식이었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식단 관리는 자발적이라기보다 반강제적(?)이기도 하다. 돈이 없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니 결국, 집에서 먹게 되는 것이다. 혼자 먹으니 음식을 조리하기가 귀찮아 닭가슴살과 계란을 제외한 음식들을 모조리 생으로 넣고 갈아서 먹는 것이다. 이렇게 먹으면 식사와 설거지를 포함하여 20분 안에 끝낼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반강제적 식사 덕분에 졸지에 주변 사람으로부터 식단 관리를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요 근래, 자극적인 음식을 잘 안 먹어서인지 조금은 매웠지만 맛있었다. 혀끝을 아리는 매운 기운을 줄이려고 단무지를 몇 번이나 리필해서 먹었다. 단무지를 씹으며 상윤이에게 잠시 단무지의 유래에 관해서 물었다. 단무지가 '다꾸앙'이라는 스님이 일본을 유랑하면서 무를 오랫동안 먹으려고 절여서 가지고 다니던 것이 그 유래라는 글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사는 정확한 시기는 모르나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사람이라고 했다. 단무지의 유래가 일본인이 아니라 결국 한국인이라는, 일종의 민족적 자부심을 은연중에 내포한듯한 글이었다. 물론 나도 그런 자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족으로 그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 것이다.

일본의 만행에 분노하며 그들과 싸움에서는 무엇이든 지지 않으려는 민족 의식, 그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의 일부가 사실 우리 조상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일종의 문화적 우월감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유래나 역사를 전달할 때에도 단무지나 왕벚꽃처럼 그 근본이 우리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자부심을 느끼고 이에 대해 말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저녁을 먹고 상윤이와 헤어지고서 집으로 향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감정적 유대를 사실상 단절하고 오로지 이 친구와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행했던 학창시절의 단조로운 일과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이 과히 나쁘진 않았다. 특별한 게 없더라도 그저 그 옆에 기댈만한 누군가가 한 사람쯤 있다는 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문득, 결혼이라는 게 단순히 사회적 계약일 뿐이라는 사고 이전에 서로 이처럼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를 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사회의 가장 최소 단위를 이루는 계약의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언젠가 떠나도 울타리 안의 그대만큼은 떠나지 않겠지.'라는 믿음과 선언이 바로 결혼의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약한 내 울타리 안에서 있는 이 친구에게 항상 고맙다.

어쩌면 지금 난, 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모든 사람을 밀어 내고선, 이기적이게도 그들이 힘들더라도 울타리를 넘어와 주기를 또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그립다. 오랜 시간 같이 있어 줄, 나의 약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홀로 앉아서 까닭없는 한숨을 쉬는 내게 서슴없이 다가와 줄, 고생했다며 말하며 어깨를 감싸 안아줄, 한 사람이 무척이나 그립다. 그 한 사람만으로도 나는 모든 중독을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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