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Dec 07. 2022

난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려워요.

1막 3장.

"지난 주에 배운 것들 복습부터 할게요."


3주 차 이후부터는 동작이 전과 다르게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내 손을 상대의 손이 아닌 등에 대야 하는 동작이 주를 이루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개인 일정으로 나오지 못한 게 아쉬워서 수요일 정기 모임에 나와서 배웠는데, 그때 상당한 당혹감이 일었다. '이건 그저 춤의 일부일 뿐이야.'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춤을 춰야 한다는 것이 신경쓰였고, 그 마음은 배우고 있는 춤의 동작 자체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당혹감과 어정쩡한 춤 자세가 나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먼저 다가가 쉽게 홀딩신청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걸 넘어 화려한 조명과 음악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도 들었어요."


지난주에 처음으로 스윙을 배운 한 리더 분이 이런 말을 했는데, 그런 기분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남들은 다들 화려하게 잘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잘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 춤을 추면 되레 상대에게 폐만 끼칠 것 같은 그런 기분, 배웠지만 기억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은 기분, 패배감 등등…. 

'현타라는 게 이런 건가 보구나.'

수요일에는 소셜을 하는 동안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감지라도 했는지 강사님이 나를 끌고 무대 위로 데려와 교정을 해주었고, 한 동기도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계속 홀딩을 신청했다. 또한, 다른 리더 동기는 잘 안 되는 동작에 관해서 물어보면 몇 번이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마음에는 손을 대는 것부터 시작해서 뭔가가 탁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의 경험은 다음 수업시간인 4주차 토요일에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잘하려고 하기보다 그저 즐기면 돼요."


2주차 지터벅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문자 그대로, 당연히 즐기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했는데, 어쩌면 그분 혹은 그 옆에서 이 말에 공감하던 다른 이들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을 겪고 나서 하는 말일까 싶었다. 말하자면, 이 취미를 오래 이어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잘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그저 아는 것을 바탕으로 천천히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를 하는 날이 온다’라는 의미를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일 중에는 다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는 게 많았다. 사실 오래 두고 하던 것들은 다 그랬다. 주짓수도 그러했고, 영어도 그러했다. 결국, 내 레벨 안에서 내가 못하거나 더듬거리면서 하더라도, 연습 시간에는 성실히 연습하고 활용시간에는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그저 즐기면 될 일이었다. 내가 방금 배운 것을 잘 못 하겠으면, 다른 것으로 그 시간의 공백을 메꾸면 될 일이었다. 

문득,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라는 공자님의 말씀은 하나도 배우지 않고 즐기기만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좀 더 알아보려 할 것이고, 즐기는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 삶 전체에 이를 녹아들게 할 것이며 끊임없이 그 끈을 이어나가면서 알고자 할 것이었다. 즐기는 사람에게는 어떤 기술이나 능력을 더 알고 덜 알고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지금은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계속 즐기는 와중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숙달하게 될 게 분명했다. 

'까짓것! 늘 그랬듯, 즐기자! 뭐, 못하면 어떠랴. 그 시간이 아쉽지 않을 만큼 성실하게 배우고 연습하고 나머지는 그냥 시간의 흐름에 맡겨! 안돼도 뭐, 이걸 이번만 하고 끝낼 건 아니잖아? 그럼 언젠가는 안되던 것도 되겠지. 늘 그래왔듯이 말이야.' 수요 정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그 생각이 맴돌았다. 


"지난 주에 배운 것들 복습부터 할게요."


4주차 동작은 예상대로 그 수요일에 배운 3주 차 내용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그보다도 쉽지 않았던 것은 상대의 등에 계속 손을 대는 일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댄 손은 모든 동작 자체를 어색하게 했다. 그러자 어느 한 팔뤄 도우미께서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을 건내며 내 팔을 잡아 등에 밀착했다.  

"자! 팔뤄의 등을 확실히 대 주어야 해요. 어색하고 부끄럽다고 애매하게 손을 대고 있으면, 리더의 신호를 읽지 못할뿐더러, 상대에게도 민폐가 돼요. 손은 등의 가운데쯤에 편안하게 대고 있어요."

"아직은 그렇게 하는 게 어색하네요."

"상대는 리더가 흑심을 품고서 손을 대고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차려요. 이따금 등을 쓰다듬거나 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런 무례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문득 처음 지터벅 스텝을 밟던 날, 내게 발을 보지 말고 상대의 눈을 보라고 말했던 분이 떠올랐다. ‘눈을 바라보라’는 별거 아닌 듯한 그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말로 인해 난, 나를 감싸던 어색함에서 벗어나 눈 맞춤으로 상대와 교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 들은 말 역시 그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 나 혼자 가지고 있었던 어떤 금기, ‘상대의 사적 영역 안으로 들어와 상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금물’이라는 그 금기를 조금 더 깨뜨리고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금 더 밀착된 거리 안에서의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상대와의 교감을 통해 춤을 더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손을 잡고 눈을 맞춤으로써 발생한 상대와의 거리가 사적 영역을 존중하는 친구 사이의 거리와 비슷했다면, 지금의 거리는 상대와 나 사이의 사적 영역으로 서로 발을 내디딘 거리였다. 그렇기에 상대의 그 안으로 발을 디디는 데 거부감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상대의 등에 손을 댄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강박은 지금의 수업 과정을 배우는 데 더디게 했다.

'생각해보면, 주짓수를 하면서도 여성 수련생과 매우 가까이에서 기술을 구사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걸 생각하면 되레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왜 지금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지? 결국, 어떤 곳이든 그곳에 맞는 규칙이 있고 이곳에서는 이게 바로 합의된 규칙이지 않은가? 나는 지금 무대 위에서 기술을 쓰는 중이다. 이 기술은 상대와 이미 합의된 기술이며, 이것으로 누구도 내게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확한 신호를 주는 것이 매너이며, 잘하는 것이다.'

등에 손을 대는 일이 일시에 해소되자, 기술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4주차의 핵심인 찰스턴은 예상대로 쉬운 동작은 아니었다. 특히, '프롬네이드(Promenade) 찰스턴'은 몸을 바운스 하는 리듬감을 계속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킥을 앞뒤로 해야 하는 동작이었다. 단어의 뜻대로 공원을 편안하게 거니는 동작인데, 어릴 적 동네 공원을 '랄랄라~ 랄라라, 랄랄 랄라라~.' 스머프 노래를 부르며 손은 좌우로 흔들며, 발을 차면서 앞으로 나가던 게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렇게 동작의 친근함이 생기니 배우기가 조금 더 편안해졌다. 좀 더 나아가 리더 강사님들의 동작을 보면서 한가지 더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바로, '펌프(Pump It Up)'였다.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500원을 넣고 몸을 움직이던 바로 그 게임의 한 동작이었다. 락스텝과 전진하는 킥스텝 이후 뒤로 가는 킥스텝이 마치 펌프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을 연속으로 밟을 때 쓰는 동작같이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찰스턴은 대각선 방향이 아니라 직선 방향이고 바닥에 발을 대는 게 아니라 떼고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펌프의 스텝이나 리듬감이 지터벅과 유사해 보이는 게 많았다. 심지어 맨즈 스쿼트 같은 동작은 펌프에서 쇼맨십으로도 많이 사용하는 동작이었다. 그렇게 동작의 유사성을 발견하자, 이 연습이 야간 자율학습 전에 저녁을 후다닥 먹고 친구들과 몰래 오락실에 들어가 즐기던 바로 그 게임이 되었다. 단지, 음악만 클론의 ‘Funky Tonight’에서 구호와 가수와 제목을 모르는 스윙 째즈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락-스텝, 킥-스텝, 킥앤 킥!스텝”

우리는 리더 강사님의 구호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목소리가 갈라질 것 같은 리더 강사님을 따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점점 하다 보니 마치 우리는 하나로 움직이는 군인같이 느껴졌고, 리듬감보다도 군인 정신에 걸맞은 씩씩한 소리로 계속 동작을 반복했다. 주변에는 하나가 된 목소리를 듣고 다들 웃느라 바빴고 어디에선가 우리를 향해 손뼉을 치기까지 했다. 


"락스텝! 킥스텝! 킥앤! 킥스텝!" 

"락스텝! 킥스텝! 킥앤! 킥스텝!"

"락!스텝! 킥!스텝! 킥!앤! 킥!스텝!"


찰스턴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약간의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강사님들은 일대 일로 우리를 봐주기 시작했다. 참으로 성실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동작을 보여주었다. 그 동작을 다시 따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리더분이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쉽지 않네요. 스텝도 잘 안되고요.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들어요."


동호회를 가입하고 지터벅 수강을 신청하기까지가 첫 번째 고비라면, 지금의 어려움과 어색함 그리고 부끄러움이 두 번째 고비가 아닐까 싶었다. 특히 배움 이후 끝나거나 학교 시험처럼 시험을 보고나면 땡 끝나는 게 아니라, 배운 것을 활용하도록 요구되는 소셜 시간이 있었다. 

내 동생도 나로 인해 지방에서 지터벅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도 처음 배울 때, 소셜 시간에 누군가 다가와서 홀딩 신청을 할 때마다 놀라 손사래를 쳤다고 했다. 수업 이후 모두가 나와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그 공간에서는 자신의 춤이 누군가와 비교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고 '잘 못 하면 어쩌지.' 하는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었다. 

전화로 자신이 다녀온 이야기를 전하던 동생의 그 과장된 표현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던 어느 동료의 말이 중첩되면서, 스윙을 즐기기까지 겪을 수 있는 하나의 장벽일 수 있겠다 싶었다. 끝나고 뒤풀이에서 이 이야기를 하니, 자신도 그런 적이 있다면서 공감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내게 그날의 깨달음을 준 한 분이 ‘그러니까 동기가 필요한 법’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동기가 필요하죠. 동기는 실수해도 이해를 해줄 거라 믿으니까요. 그리고 안되는 동작이라도 좀 더 편하게 해볼 수 있고요."

그러고 보니 지난 수요일에 내가 앉아 있을 때마다, 곁에 와서 홀딩을 신청한 동기가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잘 안 되던 동작으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고서 계속 연습을 신청했던 게 아닐까 싶어 고마움이 들었다. '나는 동기에게 먼저 다가가는가? 어쩌면 그저 도우미님들이나 강사님들에게만 그 책임을 맡기고 있는 건 아닌가?' 이는 우리 기수의 팔뤄 동기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강습 내용의 연습은 물론, 팔뤄와 함께 해야 하긴 하나, 그것을 넘어서 서로 의지가 되는 존재로서의 '동기'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존재로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도 역시 생각해볼 일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은 단지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느 집단에서 새로 들어온 한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고 그 공동체에 애정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 맡기기보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까운 동기의 관심과 노력이 중요하며 이와 더불어 당사자 본인의 태도와 노력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 자신도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누군가의 동기일 테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는 사람(人)이라는 글자처럼 똑바로 서 있는 자신의 몸을 기울여 서로를 받쳐주어야 한다. 소속의 욕구는 서로가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자리라 여길 때 발생한다.


뒤풀이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동기 외에도 동호회 안의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아졌다. 그중에는 춤을 출 때마다 꽃처럼 화려해 차마 초보자인 내가 먼저 다가가 지터벅을 요청하기 어려운 분들도 다수 있었다.

"이분이 그 분이셨어? 올리신 글 잘 봤어요."

"얼굴은 몰랐지만, 저희 단톡방에서 유명하세요. 글만 봤지, 누군지 몰라서 인사를 못 했네요."

춤을 출 때 붉은 장미꽃처럼 화려한 그분이 스윙 후기 중에 이런 글은 처음 봤다며, 얼굴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다른 분들도 웃으면서 글을 읽으면서 그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기뻐해 주셨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화려하게 춤을 추고 있을 때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마스크를 벗고 웃으면서 바라봐주니, 무척이나 선하고 인간적으로 보였다.

"너무 잘 추셔서 홀딩을 신청하고 싶어도 못했어요."

사실 아름답게, 또는 화려한 꽃처럼 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그 자체로 수줍은 고백처럼 느껴졌기에 '잘 춘다.'라는 담백한 표현으로 말을 건넸다. 

"다음 주 토요일에 홀딩 신청해주세요. 같이 춰요."

조명 아래 그림자마저도 화려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러겠다고 말을 했다. 웃는 얼굴에 하얀 초승달이 걸렸다. 

스윙이 난무하는 그 무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기만의 바운스가 있었다. 그것을 자기만의 바운스라고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 골반의 움직임, 무릎과 몸 전체가 스프링처럼 움직일 때 느끼는 동작의 바운스, 그리고 비교적 크고 명확한 손동작과 몸에서부터 손 끝까지 이어지는 선(線)의 움직임 등이 음악과 어우러져 어떤 독특한 리듬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 갈색 조명과 음악 아래에서 김연아처럼 피겨 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춤을 볼 때는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이 떠올랐다. 로트렉이 물랑루즈에서 캉캉 아니라 스윙을 보았다 하더라도 비슷한 율동감을 담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윙은 모네의 그림보다도 로트렉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강습이 끝나고 주변을 보니 제법 많은 사람이 창문 아래 일자형 의자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창밖은 어두워졌고 음악이 나오자마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소셜을 하기 위해 무대 위로 몰려들었다. 닉네임이 적힌 이름표를 받납하고 지터벅 초보임을 알리는 노란색의 배지를 받았다. 동호회 인이라면 초보 시절 한 번쯤 차 봤을 배지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멍청한 실수를 해도 용납이 될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다를 바 없는 배지였다. 누구나 다 초보자 시절이 있었고 그때를 상기해 상대를 배려하도록 하니, 얼마나 큰 권한이며 권력인가? 모든 게 용납이 되는 배지였던 것이다. 이 노란색의 동그란 배지를 단지,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병아리이다'로 볼 것인가, '실수를 해도 모든 게 용납되는 마패이다'로 볼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그전까지는 춤 잘추는 어른들이 두렵고 수줍음이 많은 소년의 눈으로 이 무대를 대했다면, 오늘은 촉법소년으로 이 무대 위에 서고자 마음을 먹었다. 당당히 무대에 올라서 처음에는 조금 친해진 동기들과 춤을 추고, 그다음부터는 보이는 족족 쉬지 않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홀딩을 신청했다. 이름도 모르는 팔뤄였지만, 모두 내 배지를 보고 흔쾌하게 받아주었고, 나는 어색함을 어떻게든 없애보고자 눈을 보고, 말을 걸고, 또 실수할 때에는 더 신나게 바운스를 타서 서로 깔깔 웃었다. 


"만일 실수를 하거나, 스텝이 엉키거나, 당신은 그저 스윙을 계속하면 돼요(You just swing on)."

영화 '여인의 향기'의 알파치노의 목소리를 떠올려가며, 'You Just Swing On.'만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계속 춤을 추었다. 이 말에 관해 잠시 이야기하자면,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의 대사인 "You just tango on."은 “그게 바로 탱고요.”라는 번역으로 유명하다. 마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한 말, “Here's looking at you kid.”를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로 번역한 것 만큼이나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하는데, “You just swing on.” 도 역시 그렇게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수하거나,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스윙이요.” 이렇게 말이다. 


얼마나 멋진가? 나는 지금 그런 스윙을 하고 있다. 이따금 실수도 하고 스텝도 엉키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극적인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는 '그게 바로 스윙'을 하는 것이다. 내 실수 덕분에 나는 박자에 맞춰 조금은 웃기는 임기응변을 하고 있고 그 덕분에 상대도 웃고 나도 웃지 않는가? 스윙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는, '이게 바로 스윙이지!'하면서 또다시 나름의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내린다. 나와 내 동기들은 무소불위의 노란 배지가 있다.


"난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려워요." 


거장 톨스토이의 책,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녀를 사랑했던 알렉세이 블론스키는 사교 모임에서 사촌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 우리는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다만, 노란 배지 아래에 이 말을 잠시 숨겨놓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은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눈앞에 주어진 수많은 기회를 놓쳤다. 어떤 선택과, 어떤 기회와, 어떤 인연을…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포기하기도 했다. 인생에서는 그러했지만, 스윙에서만큼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스윙은 인생보다 쉬울 테니까. 인생의 스텝이 꼬이면 고달프지만, 스윙 스텝이 꼬이면 이렇게 웃어버리면 되니까. 아니, 인생도 그렇게 그냥 웃어버릴까? 뭐,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웃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재즈는 아무리 생각해도 갈색이다. 갈색 조명과 갈색의 무대 바닥에 세뇌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날 보았던 춤을 멋들어지게 추던 그 리더의 스윙화가 연한 갈색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더라도 어쩔 수 없다. 식상할 수도 있지만, 재즈는 분명 갈색이다. 갈색 위에 검은색 그림자가 움직인다. 한 바퀴, 두 바퀴, 세바퀴…. 어둠 속에서 여러 크고 작은 선(線)들만이 움직이다.   

조금은 어정쩡해 보이는 리더의 자세마저도 갈색과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는 아주 멋지게 보인다. 이 정도면 웃음거리가 될 나조차도 저 짙은 갈색과 그림자가 멋지게 가려주지 않을까? 이 멋진 장면의 채색은 갈색으로 모두 칠해버리자. 갈색 조명, 갈색 바닥, 갈색 음악. 그리고 나조차도 갈색으로 칠하고 검은색의 그림자만 남겨놓자. 거기에 나는 없고 한껏 자유로워진 선과 그림자만이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그 그림에 선량한 눈동자와 등에 맺힌 잘 보이지 않는 땀방울만 몇 개 더하자. 나는 적어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그대여! 그대도 Swing! Brother, Swing! 

매거진의 이전글 Que sera, sera 어떻게든 되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