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구별 / 인간의 존엄성.

나의 일상 여행기. (37)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하지 않음에도 월요일 아침에는 어김없이 분주해진다. 매일 아침 7시까지 학교로 가는 내기가 아니더라도 주말이 주는 기분과는 다르다. 신체에는 마치 월요일을 알리는 스위치 같은 게 있어서 일어나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 생긴다. 일을 그만두고서 느낀 즐거움은 월요일을 맞이하는 분주함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를 괴롭게 만들 사람도, 환경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일하는 시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돈이 없어서 조금 궁핍할 뿐이지만, 그렇다고 밥을 굶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분주한 까닭은 평일에만 적용되는 지켜야만 하는 시간표 때문이다. 나는 지난 금요일과 다를 바 없이 아침 일곱 시까지 학교로 가서 상윤이를 만나고 책을 읽고 영어 모임을 시작해야 한다.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영어 모임을 진행하고 끝나면 건강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내일 모임을 위한 자료를 만들고 시간이 된다면 운동을 한다. 이 과정은 몇년동안 익숙한 일이며 내가 잘하는 일들이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결코 괴롭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그리고 삶의 디테일은 매일 다르며 놀라울 정도로 매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의 수많은 연습 가운데, 어느 단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면, 즐거움은 극에 치닫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거의 모든 시간은 타인이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한다.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처럼 모든 노력과 시간은 다른 존재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한 게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 이외의 것들은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유저들조차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 온라인 세계에서 게임을 종료한다고 하더라도 게임은 유지되겠지만, 종료한 이상 그 안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은 내 관심 밖이다.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세상에서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나는 심즈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내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만 보지 않는다. 나라는 캐릭터를 움직이는 '정신'이라는 유저는 매일 분주하게 캐릭터를 키운다. 그 세계에서 월요일은 새로운 모험을 알리는 날이다. 새로운 스테이지 위에서 캐릭터의 성장을 위하여 분주하게 싸운다. 이 게임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상태를 수치로 알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점이다. 수치화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누가 개발해 줄 수는 없을까?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보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특정 능력을 최고 수준과 최하 수준을 정해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고 내가 위치한 수준이 어디인지를 생각한다. 다음 수준까지 올랐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를 만들고 평가한다. 이런 기준으로 만들면 인생 게임에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랐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객관적 지표를 어떻게 만들지가 관건이겠다. 내 능력치를 객관화할 때 필수로 입력해야 큰 능력은 지, 덕, 체, 통솔력(리더십), 협상력(정치력) 정도가 될까? 각 부분은 다시 세분화된 능력으로 구분될 것이며 세분화된 부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여러 활동이 될 것이다. 그 활동이 결합이 되어 세분화 된 능력이 될 것이고 그 부분이 모여 큰 능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를 합치면 바로 나라는 존재를 분별하게 되겠지. 결국, 나라는 존재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며,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 과는 관련이 없다.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귀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이라는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가? 사고를 확장하여 아무런 능력이 없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고 하면 이 존재의 가치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는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며,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 과는 관련이 없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마치 민족주의적 시각과 유사하다. 가령, 유대민족이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말할 때 같은 민족의 피가 흐르면 모두에게 성립하는 것이다. 이들 중 누군가가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건, 능력이 없건 간에 그것이 그 인간의 민족적 우월성을 방해하진 않는다. 인간은 존엄성은 사피엔스 종 전체에 해당하는 종족적 우월성이다. 이 기원을 과거에는 천부인권에 기대었으나 현대에는 종족의 뛰어난 이성에 둔다. 이러한 사피엔스 종의 권리는 경쟁이 될 수 있는 다른 종을 모조리 학살 후 지구라는 거대한 영토의 패자가 되고 지구적 시간으로 볼 때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 권리를 구축했다. 그 까닭으로는 우생학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폭력을 타계하기 위함도 있거니와 인류 자체가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대의 주장 조차도 불완전하여, 오래전부터 내려온 천부인권적 측면을 버리지 못한다. 또한, 여기에는 그리스도나 공자와 같은 성인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한 위대한 황금률 마저 단단하게 존재한다. 그리하여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혹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같은 유전 형질을 가지고 있는 사피엔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한 까닭에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느냐는 인간의 존엄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시대에는 영혼의 타락이었으며, 현대 시대에는 종의 생물학적 동등성과 개인에게 부여된 황금률이 있음에도 타인의 생을 자신의 의지로써 빼앗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재판으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인간인 심판관이 같이 종의 권리 박탈을 고려할 명분이 된다.


나의 존재 증명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와 관계있으며,
온 힘을 다하는 까닭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현대 사회에서 신의 존재 여부가 종의 존엄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나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하진 않는다. 어쩌면 '힘써 일하라.'라는 기독교적 미덕이 내 무의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나, 나로서는 단지 그렇게 하는 편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좋은 결과를 내왔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다. 하기야 게임과도 같은 내 세상에서는 개인의 노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나의 존재 증명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와 관계있으며, 온 힘을 다하는 까닭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며 잘 살았노라고 말하는 것을 '삶의 의미'라고 부른다. 우리의 노력은 그러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 이는 마치 원석에서 보석을 깎는 행위이다. 초보 세공사가 만든 보석은 그 가치가 떨어지겠지만 끊임없는 노력은 그 세공사를 장인으로 만들어준다. 우리는 게임의 캐릭터보다 복잡하며 여러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우리의 노력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도 영향을 미친다. 월요일은 그 노력의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시간이다. 또한,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나를 꿈꾸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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