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라는 것 / 공간의 무질서와 무기력증과의 관계

나의 일상 여행기. (36)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비나 눈이 세차게 내리는 날보다
애매하게 내리는 날이
사고의 확률은 더 높다고 한다.


비나 눈이 세차게 내리는 날보다 애매하게 내리는 날이 사고의 확률은 더 높다고 한다. (이영남, 김광원, "기상요소와 교통사망사고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국경찰연구, 제6권, 제3호(2007년 겨울), p.143) 세찬 날에는 운전을 더욱 조심하거나 아예 차를 끌고 나가지 않지만, 애매한 날에는 그런 생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집이 학교에서 먼 사람보다 집이 가까운 이들이 지각을 많이 했다. 그 까닭은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한번 버스를 놓치면 어쩔 수 없이 지각인지라, 상당히 주의하지만 가까이에 사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험감독이 있어서 아침에 일어났으나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더구나 집 바로 앞 학교에서 진행되는 거라 다른 날보다 더 여유가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언젠가 한 번은 늦잠으로 큰 사고를 치는 날이 올 수도 있고 바로 오늘일 수 있다는 생각과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는 생각이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학교인지라 피곤함은 시간적 여유로움에 더 손을 들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눈을 비비니 7시 30분이었다. 7시 4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샤워를 하기엔 무리였다. 대충 머리 감고 세수만 한 채로 길을 나섰다.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아직 본부장은 오지 않았다. 조금 기다려도 오지를 않자 이상하여 예전에 이 학교를 맡았던, 다른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더 기다리니 그분이 도착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대충 입은 정장, 그리고 옷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저분한 흰색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아무렴 어쩌랴, 이 시간이면 시험을 준비하는데 전혀 무리 없을 시간이었다. 조금 걸리는 것은 아까 전화를 걸었던 전 본부장이 이 본부장의 상사라는 점이었다. 그분께 전화를 드리고서야 배송된 택배 상자 위에 붙어 있는 연락처를 발견했다. 문득, 나의 눈썰미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앞을 내다보려면
현재 눈앞에 있는 작은 것들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센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일 처리를 하더라도 원활하게 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앞을 내다봐야 한다. 그리고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설정해야 할 것이다. 나의 센스는 해당 학교를 담당하던 이전의 본부장에게 연락하여 자신의 연락망으로 호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각자가 다른 당사자들로부터 받을 비난까지는 고려하지 않고 시급한 상황에서 일단 연락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택배에 있는 수령인의 연락처를 고려하지 못한 점도 한몫을 했다. 만약 눈앞의 택배를 좀 더 세심하게 봤더라면 연락처의 존재 여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는 앞을 내다보려면 현재 눈앞에 있는 낱낱의 작은 것들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들이 전체적인 상황의 파악과 앞으로의 미래에 벌어진 일과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때, 무슨 일을 하는 게 좀 더 최선인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다른 본부장에게 전화를 건 것도 내가 인지하는 정보 안에선 분명히 최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차선이었을 뿐이다.

모두가 시험을 보러 들어가고 난 복도는 한적함마저 감돌았다. 흐린 날씨도 개고 상쾌한 하늘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창밖을 보며 생각해보니 이 일도 한 6~7년가량 한 것 같다. 그동안 일당은 단번도 오르지 않았지만, 지금의 내 상태로선 이마저도 감사하다.


돈이 없으니 좋은 점이 있다면,
주변에 친한 사람의
특별한 날이나 부탁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돈이 없으니 좋은 점이 있다면, 주변에 친한 사람의 특별한 날이나 부탁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대용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제일 우선순위로 여기고 전화를 받는다든가, 친구가 결혼하면 어떤 일을 도맡아 하던가, 프러포즈를 하는 친구를 위해 영상을 만들어 준다든가 하는 그 사람에게 의미가 될만한 것을 해준다. 선물의 경우에도 나름의 의미를 담을만한 것,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선물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점이 관계를 좀 더 돈독히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껏 인간관계에서 크게 끌려다니거나 상처를 받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꽤 감사할만한 도움을 받곤 했다. 지금의 이 일도 그러한 일 가운데 하나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홍 선생님은 이렇게 주말에 일이 있는 날이면 꼭 내게 연락해주신다. 물론 나의 노동에 따른 댓가지만 별다른 요청이 없어도 신경을 써 주시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공간의 무질서는
계속 증가하는 중이었고
이것이 나의 죽음과도 같은
무기력증을 낳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1시였다. 커피숍이라도 갈까 했지만, 침대에 누운 게 역시 화근이었다. 내리 2시간가량 잠을 자고 일어났다. 옷가지들과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방 안 구석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비치는 오후의 빛이 부유하는 먼지들을 비췄다. 안 되겠다 싶어서 팔을 걷어붙이고 창문을 열었다. 바닥의 쓰레기들과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빨랫감은 세탁기에 넣었다. 책장에 수북한 먼지까지 치우고 나서야 청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매일 깨끗한 방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꾸준히 청소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들이 하기 싫어졌다. 나는 내 공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공간은 누구 하나 초대할 수 없을 만큼 비좁았고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들은 그 공간을 더 좁게 만들었다. 나는 널려 놓은 것들을 정리해야 했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려야 했으며 처분해야 할 것들을 처분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이들은 내 모든 공간을 잠식해 버릴 터였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비단 자연계뿐 아니라 나의 공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간의 무질서는 계속 증가하는 중이었고 이것이 나의 죽음과도 같은 무기력증을 낳고 있었다.

슈뢰딩거는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에 대하여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즉 죽음이라는 최대 엔트로피 상태를 피하기 위해 음의 엔트로피, 즉 질서 있는 유기화합물을 섭취하여 낮은 엔트로피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내 공간의 엔트로피가 계속 낮은 엔트로피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 까닭은 공간의 질서를 부여할만한 것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누군가는 가능한데 왜 난 그게 어려울 것일까? 왜 난 불필요한 것마저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안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버릴 결심을 하는가? 왜 난 쉽게 버리지 못할까?

버린다는 것이 익숙지가 않다. 정리하는 것도 그렇다. 30년 이상을 넘게 살아왔지만, 아직도 버리는 것도,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차라리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좀 더 편하다. 그리고 이러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처리해 버릴 것이다. 긴 시간을 들여, 오늘같이 날씨가 나쁘지 않고 햇빛 사이로 먼지가 부유하는 날, 바닥에 설 자리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날에 모든 것들을 정리해 버릴 것이다.


'그래도 아직 정도면 괜찮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조금 쉬고 있다가 깜짝 놀라 시계를 본다. 아직 아르바이트 출근 시간이 아니다. 길을 떠나기까지 약 20 여분의 시간이 있었다. 유튜브를 보며 한참을 웃는다. 길 위에서 영어 공부를 한다. 애들과 함께 아르바이트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배터리가 충전이 안 돼서 꺼졌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왔다. 길 위에서 달렸다가 걷는다. 잠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내일 모임에 대하여 잠시 생각한다.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어져 도착하면 치맥 한잔을 하자고 마음먹는다. 치킨 반 마리에 맥주 한 병, 콜라 작은 거 한 병, 라면까지 배부르게 먹는다. 속으로는 '운동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다. 의지는 있지만, 아직 변화할 준비가 다 되지는 않았던가 싶다. 내 의지는 방을 치우는 데에는 유용했으나 꾸준히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에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나 싶다. 혹은 터질 것 같은 내 배를 만져보며 '그래도 아직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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