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 같아!"
지터벅 안에서 사람들과의 신뢰가 조금 더 싹트고 스스럼없이 상대를 대할 수 있을 무렵, 조금은 가까워진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볼 때, 나는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하고 있었구나.'
한동안 잊고 있던 생각이었다. '마음껏 한다'라는 말…. 오래전 책들을 읽어보겠다고 하루 8시간 이상을 책과 씨름하거나 글을 써보겠다고 하루를 온전히 보내버리던 시절 이후로 '마음껏'이라는 말은 접어 두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때의 '마음껏'이 나의 시간을 온전히 내 의지로 쓸 수 있다는 의미였다면, 지금의 '마음껏'은 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도 내 삶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누군가에게 손 벌리고 살 수 없기에 시간의 구애를 받지만, 내가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주도적으로 즐기고 누군가나 무언가에 구애를 받지 않으니 실로 ‘마음껏’이었다.
"크리스님은 지금의 선택에 아쉬움이 없지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다시 이렇게 살 것 같아요."
불과 2년 전, 이들과 같던 지터벅 시절에 동기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마음껏 살던 내 삶에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이 갖지 못한 무지개를 그리워하는 법이니까. 언제나 자신의 그림자는 가깝고 어두우며 무지개는 멀고 아름다운 법이다. 고개를 늘 무지개 쪽으로 들이민다고 해도 그림자는 언제나 나를 따라오며 고개를 돌리면 바로 내 발밑에 맞닿아, 나를 끌어내리려고 기다리고 있다. 다만, 이제는 혼자서도 바닥을 내려다보지 않을 유연함이 좀 더 생겼을 뿐이다.
"춤을 출 때, 바닥을 보지 마세요. 상대의 믿고 눈을 보거나 인중이나 어깨 등을 보세요."
처음 지터벅을 배웠을 때, 처음 들었던 이 조언을 나 역시 눈앞의 팔뤄를 향해 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자꾸 무의식적으로 고개는 내려간다. 다시 한번 괜찮다며, 웃으며 나를 보라고 이야기해준다. 지터벅 시절 눈을 보라던 상대의 말에,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만다. '그래도, 나처럼 노려보는 사람은 없구나!' 어색한 듯 바라보는 두 눈에 무지개가 보인다.
이 댄스를 처음 대하고 상대와 소셜을 할 때, 두 마음이 언제나 경쟁을 했다. 하나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불신, 다른 하나는 나를 이해해주겠지라는 믿음 간의 싸움이었다. 동기나 가까운 사람, 혹은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에게는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마음으로 스스럼없이 대했지만, 점점 더 시간이 흐르고 노란색의 초보 배지를 벗어버리고 나면, 초보인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런 나를 어찌 생각할까?'라는 마음이 더 커졌다. 그런 근심 걱정 속에서 억지로 의지를 일으켜 자리를 박차고 적극적으로 잘 모르는 이에게 춤을 신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감, 즉 자기를 믿고 계속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좁은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런 흔들다리 위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게 함께 건너고 있던 동기였고, 쌤과 돔이었다. 아마 이들도 그럴 거라고 믿는다.
4.
4주 차가 지난 어느 날, 고라니, 사냥꾼 커플이 보충 연습을 하고 싶어 연습실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벌써 연습실이라니!' 놀랍고도 기특(?)해서 잠깐 시간을 내어 들렀다.
"스윙 댄스 재밌지?"
연습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재밌냐는 질문을 던졌다.
"응. 정말 재밌어. 중고등학교 때 수업 끝나고 저녁에 모여서 함께 춤 연습하던 그때 같아서 좋아."
"맞아. 이곳에 있으면서 춤 자체만큼이나 좋았던 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처럼 여러 사람과 허울없이 지내면서 밤 새워가며 연습했던 기억이었어. 그리고 누군가 바리바리 가져온 간식을 먹거나 끝나고 뒷풀이를 하면서 깔깔 웃어댔던 경험이지."
그의 말에 나도 웃으며 공감한다는 듯 말을 했다.
그의 대화에서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삶의 의미에 관한 책이 떠올랐다. 삶에 의미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상태일까? 수전 울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이 어떤 대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뭔가에 빠져 있거나 열광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때, 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뭔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고 있는 모든 또는 대부분의 활동에서 지루함이나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수전 울프 '삶이란 무엇인가' 中
그는 지금 이 춤이라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며, 그 순간에 내 마음과 같았다면, 함께 한다는 것에서 공감대와 더불어 소속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게 삶의 의미이든, 혹은 재미있는 경험이든, 혹은 무엇이든, 추억할만한 무언가로 기억되었으면 싶다.
5.
6주간의 지터벅 수업도, 공연 준비도, 그리고 공연도 다 끝이 났다. 몇 날 며칠을 보내다가 첫 공연을 끝마쳤을 때, 공연을 끝냈다는 시원한 감정과 동시에 허무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던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그때 난 다시는 이런 걸 하지 말자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졸공 이후, 이들도 감정이 이상하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옛 추억이 떠올라 첫 졸업 공연 이후에 소회를 쓴 글을 찾아봤다. 거기에는 노희경 작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글과 함께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조금은 지루하고 단조로웠으나 평온했던 일상이 깨지고 내 시간을 졸업 공연과 그 안의 사람들에게 내맡기자 나는 행복해졌다. 그러나 반드시 와야만 했던, 이 시간에는 그에 못지않은 허전함이 있었다. 다시는 이런 것 따위는 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만 하고 싶어졌다.
'다음에는 그저 가볍게만 하자. 빠져나갈 틈도 만들어놓고 나를 지키자.'
내 마음 한편에는 노희경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또다시 그 행복을 갈망하며 모든 걸 내던지는 한 여자가 있었다.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라고 했던가? 두 번, 세 번의 경험을 거치고 졸업 공연 이후에도 또 다른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 또한 지금의 허무한 감정 이후에도 남아있는 발자취가 헛된 것이 아님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금 더 마음을 열어 과거의 내가 쓴 글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시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시간의 점에 관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일부 발췌》
19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간의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노희경 작가의 그녀 역시 그러한 힘이 있었기에 쓰러지지 않고 계속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의 점들을 이어 붙여 영원을 수놓을 하나의 별자리를 천천히 그러나 계속 만들어 보려고 한다. 모든 별자리에 각각의 사연이 있듯이, 시간의 점을 이은 별자리에도 어떤 사연이 붙을 것이다. 첫 만남의 점, 만나서 함께 하던 시간의 점, 함께 공연 연습을 하던 점, 서글프지만 이별을 준비하던 점, 그 모든 점은 다른 점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무수한 밤하늘의 별들처럼 우리의 기억을 수놓을 것이다.
눈을 감고 두 달 동안의 시간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이 있다. 그 눈망울 하나하나가 내게는 값진 시간의 점들이다. 내가 그런 시간의 점들을 가진 것만큼 각자의 눈 속에는 또 다른 무수히 많은 시간의 점들을 창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을 비롯한 내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타인의 시간의 점들을 발견하게 될 때, 나는 우주의 경이로움을 발견한 듯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따금 타인의 음성으로, 이미지로, 글로, 웃음과 몸짓으로, 그리고 아주 때로는 서글픈 미소로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적는 이 이야기들과 생각은 바로 그 점들을 잇는 여러 노력 중 그저 하나일 뿐이다.
늘 그렇듯이 모임이 계속되는 와중에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또 새로이 만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인생의 갈림길에서 이 길을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모든 것을 잊고 언제 이것을 했냐는 듯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때, 바로 이러한 기록들이 나를 비롯한 떠나간 이에게 커다란 추억과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가장 서글픈 어느 저녁에,
밤하늘의 빛나는 별자리의 일부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당신이었음을,
결국엔 알아차리게 되기를 바란다.
이들에게도 내가 그러했듯, 이 시간의 점들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고,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생각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