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연(아이즈원)의 춤과 예술에 관한 단상.
나의 일상 여행기. (42)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훌륭한 예술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호랑이나 사자와도 같다.
존재 자체가 가진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우리의 삶은 그 노력만으로도 가치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남과는 다른 자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면한 눈앞의 것을 해결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을 꾸는 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가 된다. 조금 늦게 일어나고도 어제와 연관된 생각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대용네 집에서 잠을 청하고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유튜브로 아이즈원 영상을 보았다. 이쯤 되면 중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내가 보는 것은 선이 아름다운 채연의 춤 영상이나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녀가 걸어온 삶과 수많은 경연 영상들, 그룹 활동들, 개인 방송, 그녀의 동료와 함께하는 영상 등등. 그녀와 관계된 영상이라면 뭐든지 쉽게 클릭하여 본다. 좋은 것은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본다.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감동받은 적은 있으나 춤을 보고 울컥한 기분이 든 적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먹는 약(?)으로 인해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의 아름다운 춤은 마음을 끄는 게 있었다. 잘 추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을 끄는 춤을 추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춤으로 마음을 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슬픈듯한 춤이 아니라 격렬한 볼레로와 같은 춤이었다.
오래전에 본 어떤 책에서 누군가의 춤을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이끌려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되는 악마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춤이 퇴폐적이거나 악마적인 느낌이 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마법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예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로 예술을 접하는 관객의 마음을 이끌어야 한다. 훌륭한 예술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호랑이나 사자와도 같다. 존재 자체가 가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예술이 시작될 때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으로부터 사람들은 마음을 빼앗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특별한 예술로부터 주입되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이 예술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오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비록 통념적으로 부르는 예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예술을 접하는 타자로 하여금 '다르게' 보려고 노력할 때 가능하다. 예술의 주체성을 작품에서 자신으로 바꾸는 것이며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상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적극적인 예술 감상이다. 예술에 부여된 절대적 좌표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관점에 따라 볼 수록 예술은 그 가치가 무한해진다. 현대미술이 어려운 까닭은 절대적 좌표보다 자신의 상대적 좌표에 따라 예술의 가치가 다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훌륭한 예술은 태양처럼 빛을 내고 있어 내가 어느 좌표에서,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어도 직감하게 된다.(물론 사막의 뜨거운 태양아래 서 있는 사람이나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이 느끼는 태양의 가치는 다를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예술의 가치도 달라질 수는 있으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다.) 채연의 춤처럼, 임재범의 노래처럼, 다빈치의 그림처럼 그러하다. 우리 마음을 우리 스스로 움직이기 전에 자석처럼 움직이게 한다. 내가 채연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춤이 마음을 이끌기 때문이며 또한, 그 점을 본받아 나 자신의 많은 행위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 활동이 그녀의 춤처럼 되기를 바란다. 말투 하나, 손짓 하나에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녀의 모든 춤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매 순간 정당화되어야만 한다는 예술은 마치 사소한 행동 속에서도 자연계의 물리법칙이 엄존하듯, 그렇게 정당화되고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마저 춤을 춘다고 이야기할 때에는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계산된 예술이나 발언보다도 때로는 우연성에 기댄 예술에 좀 더 크게 감동하는 까닭도 그러한 우연성 속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채연의 우연적인 동작이 의도한 동작과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조화로운 전체가 되듯 우연성과 필연성이 그렇게 결합하여 일어나 손뼉을 치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예술을 만든다. 이는 나를 바라보는 부처님의 손짓이며 저 나무 끝에 걸린 잎사귀에도 적용되는 물리법칙이며 현란한 손발 짓에 함께 보조를 맞춰 움직이는 그녀의 생동감 넘치는 머리카락이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때로는 누군가를 향한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움직이고 싶지만, 그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미소만으로도 마음을 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커피숍 한쪽 편으로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로부터 울컥함을 느낀다. 나는 저주스러운 태양보다 따사롭고 평화로운 햇살이 되고 싶다. You are my suns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