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살아가게 하는 것

나의 일상 여행기. (41)

by Chris
표지 그림 : Disappointed. (Young Man) 1891 Giclee Print by Ferdinand Hodler | Art.com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 역시
서로 돕는 데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하루를 시작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하는 일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커피를 내리는 일과 온라인으로 모집한 기상 모임」 회원들에게 모닝콜을 해주는 일이었다. 그들이 고맙다고 말하고 메신저 앱으로 기상 인증을 해주는 걸 뿌듯해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혹시나 누군가 "왜 귀찮게 그런 일을 하느냐?" 라고 물어본다면, 내가 새벽 5시나 7시에 꾸준히 일어날 수 있던 까닭이 바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들에게 도움을 줄 때 그들 역시 내게 도움을 준다. 내게 부여된 모임의 운영자라는 책임과 모닝콜을 해줘야한다는 의무로 인해 나 역시 모범이 되기 위해 올바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게 그렇게 할 이유와 동기를 제공하며 우리 모두는 그 시간을 통해 많은 성취를 이룬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가야 할 이유 역시 서로 돕는 데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가령,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모임을 통해 얻는 동기를 얻을 수 있다. 아이는 부모에게 생존을 위한 양분을 얻는다면 부모는 아이로부터 행복감과 같은 감정적 위안을 얻는다. 살아갈 이유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겪을 수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며 동기이다. 이러한 이유가 없다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죽은 인간의 상태와 같아진다. 키에르케고어의 말에 따르면 생물학적 죽음은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진짜 죽음의 상태가 아니며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진짜 병이라고 했다. 이는 잠시 왔다 가는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며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 상태의 최종 단계일 것이다.

다시 자신에게 묻는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살아갈 이유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하는가? 종교 시대에서처럼 누군가 부여해주는 당연한 공통의 이유는 찾을 수 없을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세상이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희망은 그 병을 고칠 치료제일 것이다. 어떤 희망을 품고 사는 것, 종교인에게는 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이르고 부모에게는 나의 사랑 덕분에 자녀가 아프지 않고 바르게 자라는 것, 노력은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것 등등…. 이러한 희망은 살아갈 힘이 된다. 희망이라는 치유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종교적 사상과 같이 인간을 무조건 속박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옆구리에 시장기를 느끼는 것처럼 일시적이며 지속적인 보충이 필요하다.

살아가는 이유를 이처럼 생각해볼 때, 나의 모닝콜과 같은 자발적 행동은 경제적 이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까닭은 자신이 기대하는 어떤 희망을 성취하는 데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기대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 미래적인 것이 바로 희망이다. 젊은이들은 이 희망이 많다. 그러나 늙어갈수록 과거를 추억한다. 그렇다면 살아갈 이유가 재미라고 것도 희망과 관련되어 있는가? 그리고 나의 행위인 모닝콜로부터 얻어지는 동기부여도 살아갈 이유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재미는 즐거움이며 일종의 쾌락이다. 그 쾌락은 자신이 기대하는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때 얻어지는 감정이다. 기대하는 바가 기쁘게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서로 돕는 행위가 살아갈 이유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 행위 가운데 동기 부여를 얻고 그것을 통해 변화하는 날 발견한다면 그것은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되며 그것으로 살아갈 이유가 된다. 그러나 거기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면 그저 몸짓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요는, 살아가는 것은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그 연료를 주입하는 것이다. 이 연료는 어떤 행위에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할 때 만들어진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든 술잔이 그의 거룩한 피가 되고 빵이 그의 몸이 된 것도 그가 그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를 먹고 마신 자는 누구나 그를 자신 안에 둔다는 희망을 얻었다. 희망은 힘이 세다. 그 힘이 내가 살아갈 이유이다. 그리고 의미를 잊지 않은, 삶의 반복적 행위와 끊임없는 노력은 그만큼의 희망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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