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기대하는 역할 / 사소함 속에 담긴 것들.

나의 일상 여행기. (40)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그러니까 난
어떤 의미로는 지금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다.


6시 45분쯤 일어나 뭉그적대다가 55분이 넘어서야 출발했다. 7시 정각에 도착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찍 일어날 생각보다 늦지 않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방식 탓에 급속도로 피곤이 올라왔다. 간신히 커피로 버티긴 하나, 확실히 글을 쓰는 능률이 이전보다 떨어진 것 같았다. 전날은 그 느낌이 최고조에 달았던 날이다. 피곤함이 가시질 않아 결국 오후부터 쓰기 시작하던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끝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침부터 상윤이를 보자마자 전날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피곤함이 가시지를 않아 쓰디쓴 가루 커피를 물에 적게 타 연거푸 마셨다. 커피가 답이 아니라 잠이 답이었으나 할 수 없었다. 절대 늦지 않겠다 다짐한 것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집중도 측면에서는 노트북보다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게 좋았으므로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데 집중했다. 전날의 기억을 되씹으며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이러한 일기를 쓰면서 재밌는 것은 하루 과거 시점의 사건과 그때의 생각이 엉키기도 하지만 지금의 생각이 엉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건의 재구성이랄까? 그래서 때로는 내가 하는 생각이 그 시점의 생각이었는지 애매할 때가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하루 전으로 돌아가 나를 보는 느낌이다. 영화에서처럼 과거의 사건에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에 의미를 덧입히는 것 역시 개입이라고 한다면 그 사건에 의미를 더하게 됨에 따라 현재의 내가 영향을 받는다. 가령, 그냥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누군가가 있었는데 하루를 기록하다가 그때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가던 게 떠오르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미래의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녀에게 반가움을 느끼거나 아는 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전날의 기억을 되새김질하지 않았더라면 얼굴조차 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난 어떤 의미로는 지금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다.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의 지점들을 매일 저장해두고 원할 때마다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선생이라는
명칭으로부터
기대하는 바를
마땅히 행하는 자들이다.


영어 모임을 시작하기 전까지도 계속 글을 썼지만, 기록은 아직 전날의 아침조차 떠나지 못했다. 처음의 생각이 꽂히면 그 생각의 흐름을 따라 연이어 다른 생각들이 떠올라 글을 이어갔다. 그 행위가 그 전날 아침에 발생한 일들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모임은 단 한 명만 오셔서 단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명이 오느냐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명만 있어도 모임 진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10명이든 1명이든 내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사람이 좀 더 많기를 바라는데 그 까닭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조금 더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만큼의 나에게 경제적 이득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일은 돈만을 생각했으면 절대 못 했을 일이다. 내가 이들을 통해 자극과 배움을 얻는다고 생각했기에 3년 가까이 이 모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들이 나를 점점 선생님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모임 운영과 진행을 꽤 원활히 하고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고 본다. 또 그들과 나 사이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아니며 그저 나 역시 나의 학습을 위해 같은 목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모임을 만들었고 자료를 만들어 공유하고 모임을 진행하는 대가로 소정의 참가비 청구했으며 조금 더 오래 공부한 경험으로 때때로 노하우를 알려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선생님이 아니라 코디네이터라고 말한다. 한글로는 모임 진행자, 모임장 정도 되겠다. 우리나라의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영어의 동일하게 쓰이는 단어보다 더 포괄적이다.

선생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선생의 역할일까?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연장자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교탁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때때로 매질을 가하는 학교 시절의 선생이 잠시 떠오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선생의 역할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선생의 역할을 생각할 때 학창 시절의 고마운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분이 떠오른 까닭을 연이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그 명칭으로부터 기대하는 바를 마땅히 행하는 자들이다. 내게는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국어 선생님이 그렇다.


모든 직업마다
그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이 존재한다.


모든 직업마다 그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이 존재한다. 그리고 직업마다 사회의 도덕성과 결부된 직업윤리가 존재한다. 선생님의 역할과 직업윤리를 잘 지켜온 사람을 우리는 존경한다. 이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라는 의미를 넘어 사회가 교육이라는 의미에 기대하는 행위를 바르게 행한 자이다. 이들이 존경받는 까닭은 그 역할과 직업윤리를 지키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윤리 의식이 낮으면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아지며 극대화되면 수치심을 잃어버릴 수 있다. 도덕 불감증의 사회는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이러한 일들이 많아지면 해당 직업 자체를 불신하게 된다. 직업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 직업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와의 관계와 유사하다.

여하튼 나에게는 선생님으로서 기대할만한 역할이나 직업윤리 따윈 없다. 물론 때로는 그들이 그런 역할을 기대할 때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나, 일시적이거나 전체의 역할 가운데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역할만을 가져와서 활용한다.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던 공자님 말씀처럼, 내게서 배울 점이 있어서 선생이라고 하는 거라면 나 역시 그들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는 누군가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나를 강사나 교사의 의미에서 선생이라 칭하는 거라면, 결코 나는 그 역할에 맞지 않는다.


그녀의 모습에서
가끔은 엄마를 발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임이 끝나고 가격 파괴 분식점으로 갔다. 한바탕 전쟁이 끝난 듯 테이블과 주방에는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여기 면에 물 좀 넣고 끓여줘!" 꽤 많은 양의 김밥을 말고 있는 이모가 다급한 말로 내게 말했다. 일단 가방부터 한쪽에 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이모가 시키는 일을 했다. 그리고선 테이블 위에 쌓인 식기를 주방으로 가져오고 설거지를 했다. 이모는 40kg도 안 되는 가냘픈 몸으로 매일 엄청난 일을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제대로 쉬는 날도 없이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이모는 반쯤은 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농담인 것은 알지만, 괜스레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했다. 엄마 같은 이모라 문득 다른 식당에서 바쁘게 이처럼 일하고 있을 엄마도 생각났다. 그저 단골집의 식당 이모일 뿐이지만, 그녀로부터 나는 엄마를 보고 있었고 그녀 역시 나를 일부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몸집이나 생김새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그녀의 모습에서 가끔은 엄마를 발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그녀를 돕는 것은 결코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를 통해 때로는 엄마를 발견하고 다른 친한 이모들을 발견하고 심지어는 친구마저도 발견한다. 수많은 기호를 발견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친하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수많은 다른 상(狀)들을 발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부분의 발견이 그 사람의 전체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요인이다. 누군가로부터 발견한 수많은 부분은 나의 눈과 뇌를 거쳐 가슴으로 향한다. 그리고 내 가슴에 뭉클한 의미로 남는다. 가슴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은 경험이다. 지식보다 의미이며 천(千)자문보다 만(萬)자문이다.


사소함 속에 담긴 진심을
나는 그저 사소함으로
치부하고 있을까?


그녀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상윤이에게 장난스레 "올 때 맛있는 거 사와!"라고 말했더니 도넛을 몇 개 사 왔다. 농담처럼 하는 말에도 귀담아들어 준다는 것은 마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마음이 고맙다. 나는 어떤 이들의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만약 농담 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그 진심을 귀담아 주고 있는가? 혹시 누군가의 농담 속에 담긴 고통과 슬픔을 그저 흘려버리는 건 아닌가? 사소함 속에 담긴 진심을 나는 그저 사소함으로 치부하고 있을까?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문득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생각난다. 사소한 농담은 가벼운 일상 속에서 묻어 들어오는 것이나 그 농담의 껍데기가 깨질 때 나오는 진실은 그 무엇보다 강한 폭발력을 가진다.

"웃음으로 진실을 말하려는데 이걸 어떻게 막습니까?"

불편한 진실을 담은 농담은 사회를 바꿔버릴 만큼 힘이 세다.


육하원칙에 따른 계획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계획을 만들기에 좋다.


무료 쿠폰을 얻었으나 뭘 마셔야 할지 결정을 못 해 결국 보류해 두고 다시 오늘의 커피를 주문했다. 졸음을 쫓고 일기를 마무리하려면 강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오늘의 커피에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레드아이가 제격이었다. 커피를 다 마실 무렵 오후 6시에 예정되어 있던 아침 기상 모임의 중간 만다라트 평가를 위한 오프라인 모임에 관하여 더 참여할 사람이 있는지 글을 남겼다. 개인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하여, 오기로 예정된 분들 중 2명이 불참 통보를 했다. 어쩔 수 없이 3명만 도서관에서 모임을 진행하기로 했다.

모임에서 각자 발표할 것은 목표한 계획이 얼마나 진전이 되었는지 중간보고를 하는 것과 각각의 계획들의 만족도, 계획 실행 중에 발생한 위기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기, 향후의 계획에 따른 만다라트 수정, 끝으로 50일간이 기상 모임 소회 등이었다.

대학생인 두 사람의 계획은 대체로 비슷한 편이었다. 크게 보면, 아침 기상, 학과 공부, 운동, 영어, 독서 등이 있었다. 한 명은 내가 제공한 만다라트 방식을 수정한 육하원칙에 따른 세부 계획서를 따라 계획을 세웠고 한 명은 하나의 목표에 세부 과업을 나열한 오타니 만다라트 방식으로 작성했다.

전자는 가령, "아침 기상"이라면 각각의 칸에 목표 - '생산적 시간의 확보' / 언제 - '아침 7시 기상' / 어디서 - '기상 단톡방' / 어떻게 1 - '일어나자마자 머리 감고 하루 계획 세우고 7시 30분에 식사' / 어떻게 2 - '1시 전에는 자기' / 피드백 - '저녁 피드백'이라고 구체적으로 작성했다. 즉 철저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수립한 것이다. 후자는 가령, '전공 공부'라면 공부해야 할 다양한 전공과목과 매주 리뷰나 과제, 퀴즈식의 세부 사항들을 집어넣는 식이다. 대신 요일별 시간표를 별도로 작성하여 과업을 언제 해야 할지를 집어넣었다.

"하나라도 잘하자!" 주의라면 전자의 방식이 좋을 것이고 매일 시간표대로 잘 시행할 수 있다면 후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방식으로 만다라트를 수정해 사람들에게 보낸 까닭은 계획은 구체적일수록 좋다는 격언을 믿기 때문이다. 육하원칙에 따른 계획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계획을 만들기에 좋다. 후자는 차라리 전공 공부에 대한 세부 과업들을 적어두기보다 그 부분을 별도로 만들어 놓은 시간표를 빼두고 목표를 무엇으로 두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완수할 경우와 못할 경우의 피드백을 어떤 식으로 할지를 적어두는 게 좋다.

둘의 만족도를 두고 이야기했을 때에는 전자의 계획 완수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으나 후자는 낮은 편이었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를 잘하면,
스스로 상을 주는 게 있어요?"


후자의 계획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실행할 과업들이 다들 무겁게 느껴졌고 재충전을 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멘탈 관리를 별도로 할 수 있을 수도 있으나 정기적인 것은 없었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는지 여쭈어보니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푼다고 했다. 그로서 자신의 감정에 위안을 얻으면 좋으나 개인적으로 술을 마시면서 푸는 것은 정기적으로 없앨 수 있는 방식이 아니며 공허함이 남는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에 화장실에 들어가 뻘게진 우울한 얼굴을 들여다볼 때면, 난 언제나 슬픔이 앞섰다. 나의 감정에 충만감이나 행복감을 주기보다 술을 통해 그저 우울을 덮어버리는 방법이었으며 그럴수록 더 공허해졌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를 잘하면, 스스로 상을 주는 게 있어요?"

앞의 계획을 세운 친구가 물었다. 그 말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당장 생각해본 것은 없지만, 그에게도 매번 자신에게 주는 작은 상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반복적이지 않은 일시적이거나 그러한 휴식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의 구절처럼 자신에게 사소하지만, 의미가 되는 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대가 이따금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위안이 되는 무언가가 되었으면 싶다.

시간이 길어져 두명의 이야기만 듣고 정작 내 발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질의응답만 받았다. 모임이 끝나고는 가볍게 치맥을 먹으며 채 나누지 못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먹고 나서는 코인 노래방에 가서 오랫동안 전해오던, 옛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괴롭지 않았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의 의미를 기억하고 서로의 갈 길을 향해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