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도 살아야만 하는가?

나의 일상 여행기. (43)

by Chris
그림 : <Automat> 에드워드 호퍼, 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1927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왜 그들은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느냐는 말이다.


오래간만에 늦게 깨어났다. 옆에는 아직도 동생이 자고 있다. 부모님은 이미 교회에 가시고 집은 온기를 담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전날 그리 늦게 자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전신의 나른함이 가득했다. 아침 식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서 조금 더 한가로운 아침을 보냈다. 아침의 기쁨을 느껴본 것이 얼마던가? 도시에도 똑같이 주어지는 아침이지만 도시는 언제나 분주하다. 도시는 분주함 속에 공허함이 있으나 시골은 조용함 속에 풍성함을 느낀다. 이것이 시골 생활에 대한 나만으로 추억이나 동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추억과 동경은 언제나 달콤한 법이니까.

점심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일어났다. 평소라면 아침이 주는 행복감이 죄의식으로 바뀌었을 시간이다. 무언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죄의식이 작열하는 태양처럼 선명해질 시간이었다. 그러나 고향 집에서는 그런 조바심을 옅게 만들었다.

동생이 준 밥을 먹고 몸을 씻고서 짐을 정리했다. 잠시 후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내가 간다니까 서운해하며 반찬을 챙겨주시려고 한다. 저번에도 싸 준 것을 하나도 먹지 않고 냉장실에 그대로 둔 게 생각나 극구 반대했다. 모든 것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어머니는 이거라고 가져가라며 내가 봉지 하나를 건네셨다. 서리태 콩가루였다. 내가 오늘 갈까 봐 아침부터 방앗간에 들러 갈아오셨다고 하는 말과 당장에라도 울 듯한 얼굴을 보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또한, 요즘처럼 아침에 밥을 잘 안 먹을 때 간단히 먹기도 유용했다. 그것마저 가방에 넣으니 등이 꽤 묵직해졌다. 가방을 메고 동생을 데리러 온 동생의 친구 차를 타고 익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바로 인천행 버스를 탈 생각은 없었다. 내일이 휴일이기 때문에 친구를 좀 더 보고픈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일하는 중이라 끝날 때까지 글을 쓰려고 인근 스타벅스로 갔다. 드라이브 쓰루인데 거기까지 들어가는 길이 길게 늘어져 있어 한쪽 차선이 막힐 정도였다. 사이렌 오더로 오늘의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글쓰기를 시작했다. 아침에 하지 못한 책 읽기에 대한 조바심 때문에 오늘은 글쓰기에 오랜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의식의 흐름에 맡기되 전날에 떠오른 생각 중의 하나만을 붙잡아 쭉 쓰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글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이 '왜 살아야만 하느냐?'이다. 왜 어린이날에 부모는 아이 둘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해야만 했을까? 왜 그들은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느냐는 말이다.

대학 시절 나한테 갑자기 청구된 엄청난 비용의 의료보험비를 보며,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는 통장과 체크카드가 모두 갑작스레 압류되었을 때 절망감과 더불어 죽고 싶다는 감정이 불현듯 든 적이 있었다. 모든 꿈을 한순간에 깨울 참혹한 현실이 눈앞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현실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꿈의 가능성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그저 꿈이 아니라 도피일 뿐이며 너의 현실은 참혹할 뿐이다.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죽고 나서도 현실은 바뀌지 않으며 남아 있는 이가 내 현실마저 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이다. 이럴 때 인간은 죽음마저 제 뜻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그저 절망 속에서 생을 이어간다. 아이와 함께 세상을 뜬 까닭을 많은 부모가 무책임하다며 비난하기보다는 그 죽음에 슬퍼하고 애도하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나 그와 같은 극한의 끔찍한 현실에서 인간이 광기에 휩싸이는 까닭은 매일 마주 보는 그 현실에 인간은 더는 꿈도 희망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추악하며 삶은 고통일 뿐인가? 그것을 인식해야만 하는가? 모르는 게 약이라고 어차피 한평생 살다 죽을 요량이면 끝까지 모르고 꿈만 꾸다가 사는 게 좋지 않은가?

"현실을 인식하라! 직시하라!"

그런 말들을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하는 것일까? 자신의 현실과 타인의 현실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말을 꺼내는 것일까?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살아남아 왕국을 다스렸을 것이다. 부처가 인간 세상의 참혹한 현실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왕으로 남아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고통, 고행을 다 감내하고서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보통의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인가? 성인이나 영웅만이 감당할 수 있는 성배가 아닐까?

현실을 직시해야 더 나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이 아닌 거대한 공동체나 국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가? 그 고통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개인에게는 꿈만 꾸고 고통을 외면하는 게 더 나은 것 아닌가?

신은 감내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신조차 부정 당하는 세상에서는 '감내할만한' 시련도 거짓이다. 신이라는 희망 내지는 환상을 대신할 것이 없기에 인간은 시련 앞에서 벌거벗겨져 희망조차 없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될 뿐이다.


왜 살아야만 하는가?
현실이 참담해도
그 까닭을 알아야만 하는가?
참담한 현실에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타인을 노예와 같이 지배하는 것은 그들에게 절망을 선물하는 것이다. 사형이 형벌로 무서운 까닭은 그들에게 이 땅 위에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절망을 주기 때문이다. 털끝만큼의 사소한 희망조차 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절망이 가득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 까닭은 현실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이 당장 꺼지지 않으며 사는 가운데 언젠가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살며 내가 죽고 싶을 때 힘이 돼 줄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 자체가 다시 살아갈 이유를 조금이나마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당장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살아야만 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 최악의 현실조차 시간이 흐르고 지나가면 희망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불씨는 거짓, 가짜의 불꽃이 아니라 진실의 불꽃이며 따뜻한 온기를 가진 불꽃이 된다. 현실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살라. 허황된 것을 벗어버리고 지쳐서 주저앉아 있어도, 살아만 있으면, 어느 날 누군가 저 먼발치 너머로 올 것이다. 그러고는 말하겠지. 물 한 모금 달라고. 가진 게 이것밖에 없을 때 나누는 물 한 모금은 천만금을 가지고 있을 때의 나눔보다도 더 값지다. 그리고 받은 자는 분명 당신에게 온기가 남아 있는 생의 불씨를 넘겨줄 것이다. 먼 미래에 눈이 멀 만큼의 찬란하게 빛날 불씨를 줄 것이다.

그리고 진정 국가는 이들이 그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지켜줘야 한다.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 이상, 비록 현실 따윈 동굴에 비치는 그림자일 뿐이더라도 개인이 살아 숨 쉬는 동안 그러한 왕국의 위엄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현실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다. 지옥은 절망만이 존재하며 천국은 끊임없는 희망을 개인에게 부여한다. 현실이 지옥이 될지 천국이 될지는, 이 땅 위에 시련이 있을지라도 다시, 또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이 있느냐에 달렸다.


누군가 제게
살아갈 이유가 뭐냐 물어보면
아마 '희망'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저녁에 어느 분께서 모 게시판에 삶을 돌아보는 글을 쓰셔서 댓글로 아래와 같은 생각을 남겨 두었다. 전날 아침의 생각과 더불어 일기의 연장선인 것 같아 아래에 쓴 글을 남겨둔다.


누군가 제게 살아갈 이유가 뭐냐 물어보면 아마 '희망'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정신적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해독제이며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니까요. 나이를 먹으면 서글퍼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살아갈 이유가 대체로 줄어든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스스로 찾지 않더라도 수많은 꿈이 있었고 그것을 기대하면서 힘든 순간들을 넘어설 수 있었지만, 삶의 시계가 오후 4시쯤으로 오고서는 그 꿈들의 많은 것들을 붙잡고 있기가 어려워졌으니까요.

내가 어느 시간에 서 있느냐를 아는 것은 중요하며, 그 시간에 과거의 아쉬움을 생각하기보다 그 시간에 꼭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내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 가장 좋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 테니까요. 그리고 제게 있어서 이 시간에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조금은 조용한 가운데 나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관계가 밖으로 향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안으로 향할 때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독한 순간을 조금은 더 즐기고 있네요. 그 고독이 조금 더 제가 살아갈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게 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어린 시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적은 양의 희망이며 가능성 또한 적어진 터라 어린 시절의 무한에 가까운 희망을 생각하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양의 희망이 제게는 정말 소중합니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당장 눈앞의 일들만을 처리하며 무의미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것이니까요. 아마 매일 절망감에 살았을 겁니다. 비록 지금도 가진 것도 없고 삶도 팍팍하지만, 아직도 전 할 수 있을 거라는, 행복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이 시간을 충실히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법정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고독은 옆구리에 스치는 시장기 같은 것이라고요. 희망은 바로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반복적으로 올 시장기에 필요한 연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섭취하지 않으면 고독은 고립이 되고, 결국 죽음의 상태가 될 게 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나이에 제한된 희망을 찾아 섭취하여 계속 건강을 유지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비록 10대, 20대는 아니더라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싶네요. 많은 유저분이 그러한 살아갈 이유를 계속 찾아서 섭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