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여행기. (8)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아침 7시에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이런 시험감독 일에는 6시에는 일어나야 했는데 바로 집 앞이라 조금 더 늦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이것도 거의 7~8년 했는데, 일당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물론 지금도 좋은 아르바이트는 맞지만, 물가 변동 폭에 따라 조금 올려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일하면서 짬짬이 일기를 썼다. 요즘에는 일기를 1시간 이상씩 쓰는 듯싶다. 그래도 쓰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재밌다.
월말이라 매일 출석 체크로 적립해놓은 전자책 적립금으로 전자책을 샀다. 매일 적립 시 보통 5,000~6,000원가량 되는 터라 제법 책 살 때 쏠쏠했다. 그러나 사는 책이 주로 고전 위주라 해당 분야에서 전자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근래에는 도서 쇼핑에 시간을 들이는 것도 일반 쇼핑만큼이나 귀찮은 일이었다. 예전에는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 많이 구매도 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렇게 많은 책을 보진 않는다. 한 달에 많이 봐야 4권 정도 보는 것 같다. 그것도 소설류나 얇은 책이 있다면 가능한 것이지 요즘 연이어 보는 책들은 보통 두께가 제법 되는 게 많았던지라, 쉬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발췌독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다상량과 다작을 실현하기 위해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4권도 많은 편이었다. 좀 더 정진하려면 시간 관리를 지금보다 더 잘할 필요가 있었다.
"여가 시간을 가지려면 시간을 잘 써라." 벤저민 프랭클린이 했던 말인데, 비단 여가뿐 아니라 무슨 일이든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꼭 생각해야 할 말이었다. 시간을 잘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을 잘 쓴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흔들리는 공허한 마음을 잘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여기의 여가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일이 존재하는 빡빡한 삶의 상태 가운데 쉴 수 있는 시간이다. 할 일을 제치고 온종일 여가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가로서 책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로 시간을 잘 써야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터득한 나만의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인터벌 독서법’이다. 뽀모도로 학습법에서 따온 이 방식은 25분 읽기, 5분 휴식의 방법으로 25분 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게 도움을 준다. 나는 예전부터 집중력이 그리 좋지 않아 30분이 넘어가면 산만해지는 편이었다. 보통 수업시간의 반절인 25분은 30분에 비해 심리적으로 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치 1만 원과 9,900원의 차이랄까?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쉬는 시간 10분의 2배 조금 더 되는 시간이다. 학창 시절 우리의 쉬는 시간이 그토록 빨리 흐르던 것을 생각하면, 25분은 정말 버티기 쉽게 느껴진다. 그것을 네 번 하고 나면 2시간이 금방 흘렀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좋은 도구라 할지라도 사람의 의지를 보조할 뿐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2시간 만큼은 철저히 독서를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나서는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바로 집에 갔다. 혼자인 것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챙겨 먹으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올라버린 물가 탓에 밥값이 기본 6,000원부터 시작하는 터라 집에 들어가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집 안에 있는 나는 밖에 있는 나와 달라서, 공부하기를 생각했다면 그 공간에 되도록 들어가지 말아야 했다. 특히 쉬는 날에는 더욱 쉬고 싶어지는 게 집의 단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대충 라면과 밥을 해 먹었다. 어머니가 두 달 전에 보내주신 황해도식(?) 깍두기를 이제서야 꺼내 보았다. 김치가 적당히 잘 익어 맛있었다. 집 밥을 먹으면서 홍진이와도 잠시 이야기했던 집 밥 모임을 생각해봤다. 점심에 각자 집에서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는 것이다. 서로 준비한 도시락을 함께 나누는 것은 온정이 넘치는 행위이다. 먹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무엇을 준비해오고 함께 나눌 때, 생각만 해도 따뜻함이 올라오는 듯했다.
인터넷에서 맞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남자의 꽃 선물에 여자가 감동을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었다. 거기에 출연한 한 여성은 자신은 남자가 가져온 꽃 하나에 감동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쭈뼛거리며 꽃을 주문해서 자기 앞으로 가져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생각나기 때문에 감동한다는 말을 했다. 도시락을 준비해온다는 것도 바로 이런 마음마저 나눌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집에 와서 간단히 방을 정리하고서 그냥 쉬었다. 넋 놓으며 의리로 봐 오던 드라마의 마지막 편을 감상했다. 지난 회차가 괜찮았던지라 이번 화는 기대도 안 했다. 역시 기대를 안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연성은 둘째 치고 캐릭터들의 뒷정리를 제대로 안 하고 빨리 종영해버린 느낌이라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시청률 저조로 처음의 기획과는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의 화면에 대고 주인공이 말하는 장면은 무슨 1960년대 김기영 감독 판 하녀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듯했다. 오마주인가? 아니면 연출 부족일까?
아르바이트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서 취침을 했다. 일어나고도 몸이 축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피곤했던 것일까? 정신이 피곤했던 것일까?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영진이와 함께했다. 주로 독서 모임에 대해 대화를 했다. '독서 모임의 인적 성장이 모임의 발전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나는 그에게 “신실하게 신을 섬겼던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 혹은 이후 초기 기독교 시대와 엄청난 신도 수를 자랑하는 현대 기독교 시대 중 어떤 것이 더 (종교적으로) 좋은 시대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질문을 던진 까닭은 영진이가 기독교(가톨릭)에 대한 지식이 많기 때문이었다.
아마 학문적 성취로 보나 신실한 사람들의 숫자로 보나 현대 기독교 시대의 절대 인구가 초기보다 많을 것이다. 굳이 현대가 아니라 16세기쯤으로 설정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의 의미나 믿음의 상대적 크기로 본다면 다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의미가 퇴색하고 권력과 결탁하면서 타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까닭 중 하나는 초기 기독교의 의미를 되새기고 예수와 제자들의 시대의 믿음으로 되돌아가고자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독서 모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적 성장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인적 성장 외에 그 모임이 가졌던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되면 인적으로 증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를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인구의 증가와는 별개로 그것에 대한 의미를 구성원들이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현실에 맞게 노력하고 창조해내야 한다. 진보는 방향이 있으며 그 방향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을 때, 초기 믿음의 방향과 일치해야 한다. 그 방향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발걸음을 해야 한다. 때로는 달릴 수도 또는 걸을 수도 있으나 우리는 그 방향이 맞는지 때때로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걸어온 길의 발자국과 그 발자국이 시작된 곳을 돌아보면서 짙은 안개로 뒤덮인, 내 앞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헤쳐 나아가야 한다. 바람은 언제나 등 뒤에서 우리를 떠밀고 왕국에까지 이르는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