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젖어든다는 것|불편함의 심리|병의 찬미에 관하여

나의 일상 여행기. (75)

by Chris
그림: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 연작 판화, <궁핍>(1893)| ※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도 병과 죽음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인가?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하루 24시간 중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에 쉼 없이 글을 쓴다면 어떨까? 어제저녁에 자기 전에 잠시 인터넷을 하다가 나에게는 익숙한 이름인 팝핀 현준의 인터뷰 영상을 우연히 보았다. 그는 힙합 문화를 두루 알고자 한다면 힙합의 4대 요소인 'MC(Mic Checker), B-Boy, DJ, graffiti'를 하나라도 등한시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음식 문화를 예로 들면서 김치 맛은 먹고 느껴야만 아는 것처럼, 힙합은 외우거나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문화이기 때문에 거기에 젖어보고 느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세계 정상급의 예술가나 운동선수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종목에 따라 기술을 배운 것도 있지만, 그전에 그 계통의 문화에 젖어들었기 때문에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하려는 글쓰기 혹은 좀 더 나아가 문학이라는 장르에도 문화라는 게 있을까? 만약 힙합의 4대 요소와 같이 문학이라는 장르를 오롯이 느끼려면 혹은 궁극적으로는 창작 문화를 느끼려면 어떤 요소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단, 비교적 뚜렷한 카테고리를 가진 문학이라는 장르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문학 진흥법 제2조 제1호에서는 「"문학"이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작품으로서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말한다.」라고 명시했다. 이것을 팝핀 현준의 말에 대입하면 문학은 이 다섯 가지를 충실히 느껴봐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다음으로는 내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좋은 글쓰기, 창작이라는 것을 하나의 문화로 여기고 오롯이 느끼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 북송시대의 문장가인 구양수는 좋은 글을 쓰려면 삼다(三多)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쉼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젠가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잘하려면 많이 해야 한다. 열심히 한다는 가정하에서 '절대 시간'은 숙련을 위한 중요한 지표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글쓰기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많이 써봐야 실력이 는다. 그리고 그것은 많이 생각하는 데에서 나오고 제 생각에 도움이 될 책도 많이 봐야 가능한 일이다.

이는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해보고 먹어보고 느껴야 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써 볼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구양수는 자신의 삼다(三多)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다상량(많이 생각하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다시 삼상(三想)론을 펼친다. 삼상이라는 마상, 침상, 측상으로 말 위에서, 침대 위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도 좋은 생각과 문장을 구상하기 위해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쉼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활자화된 글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 수십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생각마저도 그 영역 안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삶 자체가 글을 위한 생각들로 가득 차는 것, 이를 실제 활자화된 글로 표현하는 것, 너무 자연스러워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행하고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글쓰기 문화를 느끼는 방법이 아닐까?

팝핀 현준은 문화는 느끼는 것, 묻어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화는 삶 그 자체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 독특한 향기가 자신의 신체에 묻어 들어가 있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각각의 문화가 가진 독특한 향기가 집단과 사회를 구분한다. 작가, 그것도 문학을 하는 작가로서, 나는 글쓰기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그리고 문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이 영역이 만들어내는 향기 속에 충분히 젖어 들어가 있는가? 밥 먹다가도 자다가도 혹은 화장실에도 아무렇지 않게, 쉼 없이 글을 쓰고 있는가?




스터디 룸의 예약이 모두 차 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아침부터 월천 라운지로 향했다. 어차피 오늘은 운동도 가지 않아 온종일 글을 쓰고 책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잠시 예약해서 쓰는 스터디룸보다도 좋은 선택일 수 있었다. 다만, 스터디룸에서는 재즈를 가볍게 틀어 놓는다든지 혹은 상윤이랑 조금 큰 목소리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라운지에서는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웠다. 아침에는 곧잘 피곤함이 밀려오는 데 어떤 잡음 하나 없는 침묵은 예상했던 대로 졸음을 밀고 왔다. 이번에는 창가 쪽 자리가 아닌 안쪽에 따로 마련된 개인 테이블과 편한 의자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문제는 이 자리가 쉬기에 더 편하다는 점에 있었다. 창가 쪽 자리는 의자도 약간 불편한 편이지만, 그런 점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다. 문득,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적당히 불편한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더 편한 자리에서 마음이 놓여 더 일을 잘하게 되는 예도 있을 것이다. 이는 나의 경험에 따른 견해일 뿐이다.

와신상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로선 적당히 불편한 것은 해야 할 일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좋은 도구이다. 조선 시대의 정도전은 어릴 때부터 공부할 때에는 언제나 의복을 단정히 하고 바른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결코, 누워서 책을 보거나 흐트러진 자세를 보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러한 불편함을 통해 학문하는 데 있어서 마음가짐을 달리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적당한 불편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며 비루한 신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신체의 편안함이 마음의 끈을 느슨하게 만든다. 적당한 불편함은 일종의 '넛지' 기능을 하여, 마음의 끈을 팽팽히 잡아당기라고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안 되겠다 싶어서 상윤이를 데리고 토스트를 먹으러 갔다. "어제는 왜 안 왔느냐고 물어보시던데요?" 문득 며칠 전에 상윤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즈음 자주 가기는 했으나, 그렇게 물어보시니 매일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부담이 느껴졌던 게 생각나, 걸으면서 "우리가 근래에 자주 가기는 했지. 그런데 그때 왜 안 왔느냐고 물어보시니 조금은 부담이 느껴지네?"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모 마음에는 우리가 단골이라 가볍게 물어본 말이셨겠지만 마치 우리가 매일 찾아올 거라는 기대감이 느껴져,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았다. 관계를 맺고 그것이 매 같은 시간 반복되다 보면 그 시간에 길들여지고 보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친구나 연인은 서로 암묵적이며 동등한 조건으로 길들여진 관계이지만, 판매자와 구매자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매번 8시쯤 가는 토스트 집에서 우리를 볼 반가움에 7시부터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매자인 우리로서는 그런 뉘앙스를 느낄 때면 이따금 도망치고 싶은 마음마저 들게 된다. 다양한 음식 중에 꼭 토스트를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을 뿐이거니와 1,500원대의 다양한 음식의 선택지에서 오로지 8시에는 토스트만을 먹어야 한다는 마음을 강요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단골집에 대한 정이 없다고 말할지는 모르나, 대체재가 많은 상황에서 선택의 권한을 제한하는 듯한 느낌이 들거나 혹은 그러한 부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판매자로서는 좋은 방식은 아니다. 스타벅스 사이렌 오더나 키오스크 등의 무인 결제 방식, 심지어는 옷가게에서조차 비대면 방식이 늘어나는 까닭 중 하나는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물론 나는 아직은 비대면의 방식보다도 단골의 정과 부담감 그 사이에 있는 게 좋다. 그녀가 하다못해 토스트 위에 야채를 좀 넣어 주실 수 있느냐는 나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준 까닭도 바로 이 정(情) 때문일 테니까.

토스트를 먹으며 다시 라운지로 돌아오면서 상윤이는 어제 본 면접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좀 잘 본 거 같아요. 그래도 준비했던 게 나와서 수월하게 P.T를 할 수 있었어요." 나는 그에게 무엇이 나왔는지 물었다. 그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드론 등을 이용해 공장 등의 환경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들의 편익을 분석하라.'라는 질문이 나왔다고 답했다. 이들을 통해 실시간 감시가 가능하다는 점, 환경오염 물질을 몰래 배출하기 전에 예측하여 막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쩌면 CCTV와 같은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인데, CCTV는 국민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범죄 사실의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범죄를 예방하게 하는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기술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을 줘, 그 범법행위 자체를 예방하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드론 기술은 인간이 직접 위험한 곳에 올라가서 문제를 확인해야 했던 일을 드론을 통해 쉽게 들어가 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이익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현재의 편익뿐 아니라,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이 이야기한, 우리가 '아는 문제, 모르는 문제를 넘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이바지할지 모른다.




다시 들어와, 졸음이 깬 상태에서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명색이 라운지인데, 너무 도서관처럼 조용해서 커피숍처럼 클래식이나 재즈 같은 것을 좀 틀어줬으면 싶었다. 화이트 노이즈는 학습에도 더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부보다 졸음이 오기 딱 맞았다. 내가 도서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조용함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데에 있다. 이렇게 지나치게 조용한 것을 싫어하는 까닭을 생각할 때마다 어쩌면 어릴 적, 집안 환경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집은 어릴 때부터 북적대거나 시끄러웠다. 초등학교 때에는 밤늦게까지 하는 식당에 밤낮으로 손님들이 가득 차 시끄러웠고 나이를 먹고서는 아버지의 석재 공장 옆에 바로 조립식 집을 지어 살았기 때문에 창문을 닫아도 돌이 톱에 갈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런 곳에서 얼마 전까지 살아왔다. 물론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는 학교 때문에 거의 나와서 살아야 했으나, 그때 이후로 웬만큼 시끄러운 곳에서도 잘 공부하고 잘 잤다.

엄숙한 침묵보다도 공간을 채워주는 무언가가 있는 게 좋았다. 영화「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임수정의 대사처럼, 내 주변의 공간을 침묵이 잡아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벼운 재즈를 틀어 놓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음악이 공간을 채워주었기 때문이고, 누군가와의 대화가 한동안 없더라도 그 음악 소리에 어색함을 없애줄 말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서관의 그 숨 막히는 침묵이 싫다. 키보드 자판조차 두드릴라치면 누군가가 인상을 쓰는 곳은 더더욱 싫다.

침묵이 감돌았던 아침의 라운지도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한둘씩 들어오더니 여느 때의 라운지처럼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래도 다들 공부에 집중하느라 침묵이 감돌았지만, 전보다는 나았고 나 역시 계속 두드리는 자판 소리에 이끌려 글을 마무리해가고 있었다.

상윤이가 먼저 일이 있어서 떠나고 나니 조금 적적한 기분이 들었다. 글을 마무리하고 밥은 먹고 왔는데, 책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곤함도 다시 밀려오고 입도 심심한듯하여 일어나 세계 과자 전문점에 들려 과자 한 봉지를 샀다. 한쪽이 치즈로 감싸 있는 네모난 비스킷이었다. 가격이 천 원이라 나쁘지 않고 커피와 궁합이 잘 맞아, 한 봉지를 샀다. 삶의 한두 가지 소소한 즐거움 중에는 이렇게 과자점에 와서 오백 원, 천 원짜리 과자를 커피와 함께 구매하는 것이었다.

돈을 벌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지출의 규모도 줄었다. 과자 같은 건 애당초 구매해서 쌓아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분에 장점도 있는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살찔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생활도 또한 단순해져서 중요한 일들에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최소한의 일을 하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이 내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시간 부자인 셈이다. 일로부터, 돈으로부터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우니 대체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고 삶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삶은 누구에게나 있을 본성의 약점, 추악성을 들춰보지 않도록 한다.

단지 돈을 벌지 않아 나쁜 점은 살아가며 앞으로 닥칠 슬프거나 힘든 일에 대비할 돈이 없다는 점이고 그중에서 제일 슬픈 것은 내 부모가 늙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점이 내가 돈 버는 것을 더는 늦추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지점이고 나를 알릴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힘이었다.

도박으로 모든 것을 탕진하고 빚까지 진 도스토옙스키처럼 돈의 결핍이 글을 쓰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다.

요즘 상윤이에게 우스개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강하게 할 뿐이다." 상당히 중 2병 서러운 이 말은 니체가 한 말로 유명하다. 니체가 해서 망정이지 아마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했을 법하다. 이 말을 곧잘 하게 된 까닭은 어떤 시련이나 결핍으로 하여금, 이 말을 선언함으로써 그 자체가 내 삶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시련은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며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운동과도 같은 것이 된다.




다시 돌아와 <마의 산>을 펼쳤다. 현재 가진 책으로는 상, 중, 하, 이렇게 세 권으로 되어 있고 상권의 1/3 정도를 읽는 중이었다. 책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병과 우둔함의 결합을 어느 정도 양식상의 오류, 자연의 미적 감각 결여, 그리고 인간 감정의 오류로 생각한다. 그가 생각할 때 병, 특히 심리적 문제로 오는 병은 섬세하며 신경질적인 사람에게 오는 걸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둔한 기질, 삶에 둔감하여 스트레스 따윈 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걸리는 것을 어떤 오류로 생각한다. 이 사람이 의사가 아닐뿐더러, 그때 시대를 고려해도 무식한 사람은 아닐 테니 그 말에는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희적, 혹은 철학적 농담 정도로 던진 말일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하나, 과거 우리가 예술가를 생각할 때 폐병에 걸려 기침하면서도 예술혼을 꽃피는 이를 떠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병이라는 육체적 결핍이 마치 고귀한 예술의 정신과 결합하여야만 한다는 미신, 천재 예술가는 요절한다를 넘어 요절해야만 천재 예술가라고 여기는 생각들은 총명함과 병에 대한 인과관계를 미묘하게 결합한다. 그러나 세템브리니는 이러한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것은 '미신이 가득한 시대의 이야기이며 조화와 건강이 미심쩍고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반면 허약한 것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특별 허가증과 같았던 암흑시대에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계몽이 이 그림자를 몰아내고 지금도 싸워가고 있다며 열변을 토한다.

병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병에 대한 낭만주의적 견해는 예전부터 있었다. 가령 폐병에 걸린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폐병 환자의 병을 사랑의 이야기를 붉게 물드는 요소로 만들며 그들의 총명함이 마치 이러한 폐병에서 나오는 듯하게 그린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병은 고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혹하고 슬프고 덧없는 것일 뿐이다. 폐병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병이며 퇴폐적이며 추한 것이다. 이러한 말이 병과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며, 병이 그 중심에 있는 게 아니라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스러운 이야기에 중심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자신은 진짜 병은 참혹하다는 사실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침투해 들어가는 그 병에 대한 감각은 마치 독처럼 그것을 맛본 우리의 사고를 무디게 하고 종국에는 현실에서의 병마저 아름다운 것으로 치부할지 모른다.

이러한 견해는 결코 이성적인 것이 아닌 악마적인 것이다. 그 그림자는 여전히 어느 세계에서나 도사리고 있고 그것은 언제나 매혹으로 다가오며 인간은 지금껏 늘 그렇듯 이 이야기에 눈물짓고 패배해왔다. 이성과 계몽은 이것을 이겨내며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그러한 줄거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삶에 관한 이야기로 바꿔내고 있다. 폐병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 죽어가는 스토리는 사라지며 암에 걸렸다고 해도 이겨내는 이야기가 많아지거나 타협안으로 끝을 모호하게 끝내는 게 바로 그 증거이다. 인간의 이성과 계몽은 병을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물리칠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이전에 읽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택한 남자>에서 편두통을 앓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중에서 빙겐의 힐데가르트(1098-1180)가 본 종교적 환영은 현대 의학에서는 편두통과 관련된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현상에 대하여 어떤 상관관계를 찾거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인간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환영은 영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학으로 볼 때 두뇌에 생긴 치료해야 할 병일뿐이다. 다만, 총명한 사람에게는 그 황홀한 이미지가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간질과 발작 증세로 고생하던 도스토옙스키도, 마찬가지로 그 질병을 통해 황홀함을 경험하고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병을 결코 우리는 찬미해서도 동경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행위는 과오일 뿐이며 창조성을 위한 그들의 수많은 노력에 대한 모독이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에디슨의 말에서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100퍼센트의 작품을 만들 때 천재조차도 엄청난 노력을 한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천재가 되는 것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 에디슨이 하고 싶었던 말도 후자에 가까웠다고 한다. 영감의 원천은 물론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예술가는 불을 태워서라도 마약을 먹어서라도 심지어 악마에게 손을 내밀어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원펀맨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그 만화에는 강해지고 싶어서 괴수가 되는 약(세포)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 인간임을 버리지만, 어떤 이들은 오로지 인간으로 남으려고 그것을 먹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

"그들이 만약 만화에서와 달리, 다른 인간을 공격하지 않고 오로지 강함만이 필요하다면 괴수가 되는 약을 먹는 선택도 존중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행동이 우리 자신에게뿐 아니라 우리와 관계된 이들을 변화시키기도 하듯, 인간성을 버리는 것은 악마적 기질만을 남겨두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어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인간성에 따라 그들의 힘에 책임을 지지 않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는 비단 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범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 세상 누구도 함께하길 원치 않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떠나 살 수 없고 결국 이 사람은 방구석에 결국 혼자 앉아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을 저주하고 쓸쓸히 죽어갈 가능성이 크다. 오로지 창조적 영감을 얻으려고 인간성을 버리는 행위가 위험한 까닭, 정신을 퇴폐로 이르게 만드는 게 위험한 까닭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것들의 유혹에서 이겨내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을 병적인 퇴폐로 이끄는 충동에서 싸워 이기고 선한 의지로부터 그 영감을 찾아내야 한다.



밖에는 오후 무렵부터 비가 쏟아지더니 저녁때도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소나기가 아니기에 영어 공부도 할 겸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걷지 않거나 영어 공부를 끝내지 못하면 하루의 마무리를 잘 해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친 하루도 아니고 불행한 하루도 아니었지만, 이 길 위를 걷는 것만으로 뭔가 위안을 얻는다. 그 길 위에서 집중해서 영어 단어와 문장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내가 열심히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내게 아무도 없더라도 이 길은 언제나 여기에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 길 위에서만큼은 쉼 없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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