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창조성|전문가의 자질

나의 일상 여행기. (74)

by Chris
그림: https://ai.googleblog.com/2015/06/inceptionism-going-deeper-into-neural.html |※ 인공지능이 꾼 꿈의 저작권은 인공지능에게 있을까?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필립 K. 딕의 소설 중에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라는 소설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이 소설의 제목은 내용만큼이나 상당히 흥미롭다. 전날 저녁에 아르바이트하러 간 길 위에서 본 유튜브는 이것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알다시피 구글의 인공지능 딥마인드 기술은 인간뿐 아니라 인공지능이 창조의 영역에서도 활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가령 기존의 음악들을 딥러닝 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조한다든가, 새로운 어떤 문장을 작성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아직은 인간의 창조적 수준에는 따라오지 못하여 어딘가 어색하고 인위적인 느낌이 나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로 볼 때는 근 미래에는 충분히 그 수준이 인간에 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글에서는 이 인공지능에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했다. 엄청나게 많은 패턴의 그림들을 입력하여 충분히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든 뒤에 하나의 사진을 보여주고 "사진에서 무엇이 보이든 그것을 강화해서 표현해보라."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명령을 받은 인공지능은 자신이 지금껏 저장했던 수많은 이미지의 정형화된 패턴으로 이 이미지를 강화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유튜브에서는 벌판에 나무 한 그루가 중앙에 서 있는 형태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는데, 인공지능은 동물의 형상이 섞인 추상화와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까닭은 실험에 이용된 인공지능이 동물을 구분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이미지에서 수많은 동물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훈련을 받은 인공지능에도 비슷한 실험을 하자 그가 기존에 집중적으로 학습했던 것을 투영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유튜브에서는 지평선의 그림이 탑으로, 나무가 빌딩으로, 잎사귀가 새의 모양으로 변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글은 한 가지 궁금증을 갖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 무(無)의 상황에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인공지능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를 궁금해한 것이다. 그 조건에서도 인공지능은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대단히 추상적인 사진들을 만들어낸다. 구글 엔지니어링 팀은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이 꾸는 꿈과도 같다고 이야기했다.

인공지능은 어떤 명령, 즉 조건을 입력해야만 저 이미지들을 뽑아내지만, 인간의 경우 별다른 명령 없이도 이러한 일을 꿈속에서 수행한다. 자동화된 어떤 프로세스가 잠을 자면서 깨어 있을 때, 보았던 이미지들을 처리하거나 기억화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꿈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꿈을 꾼다고 할 때,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꿈을 꾸게 되면 이러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일 뿐이지, 실제로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기억을 처리하는 일원화되고 자동화된 프로세스의 알고리즘을 부여받고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저러한 이미지를 자동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꿈이라고 할만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이미지는 창조성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을 하게 한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어떤 정보가 두뇌에 입력되어 강화하는 과정 중에 만들어지는 것인가? 나아가 그렇게 강화된 이미지를 어떠한 목적에 맞게 생각하여 만들어내면 그것이 창조인가? 정보가 많을수록 더욱더 창조적인가? 어쩌면 아이가 어른보다 더 뛰어난 창조성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새롭게 보고 느낀 세계의 수많은 이미지에서 나름의 패턴을 찾는 과정과 동시에 무의식에서 그것들을 조합하고 강화하는 과정들을 무수히 하기 때문인가? 어른의 경우에는 이미 충분히 입력된 이미지들 속에서 동일한 패턴들을 찾고 그 패턴을 구분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아이는 그 패턴의 구분이 어른보다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패턴화하지 못한 모호한 이미지들을 재결합하거나 강화하여 새로운 무엇인가로 만들어 내는 게 오히려 어렵지 않은 것 아닐까? 창조성의 비밀은 수많은 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필연적으로 우리의 오감을 통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보들을 처리하는 프로세스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정보량보다 몇 개의 이미지로라도 그 인상이 강렬하다면, 해당 이미지가 기억에 저장될 것이고 그 과정 중에 강화된 이미지들이 창조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다시 현실의 다른 이미지와 결합하거나 그 자체로 새로운 이미지를 강화하는 등의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독서와 생각하기, 그리고 글쓰기의 과정 중에 하게 되는데, 가령 보았던 책들에서 구절들이 현실에서 인식한 것들과 결합하여 어떤 생각을 만들어낸다. 이 생각은 때로는 의식적이며 또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데, 그것을 글로 쓸 때는 여러 생각 중에서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기거나 각각의 글을 쓰는 어떤 기준에 따라 선택되고 만들어진다. 이렇게 쓰는 과정 중에서도 생각은 계속 바뀌고 분화하는데, 그것은 글을 쓰고 지울 때도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여하튼 한 권의 책을 봐도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여러 권의 책을 보아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책이라고 여기고 본다면, 마찬가지로 단 하루의 현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패턴화 된 여러 날의 현실을 보면서도 그보다 생각을 적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인공지능이 저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하는 점이다. 예측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무엇을 주로 학습한 인공지능이냐에 따라 어떤 이미지를 중심으로 만들 것인지는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어떠한 그림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낼 것인가조차 완벽하게 맞출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면 통계적인 가능성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양자 역학의 논리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내가 글쓰기를 할 때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이런 방식의 글로 표현하게 될 때, 그 창조의 오묘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신에 대한 생각이 들었는데, 신이 있고 그가 모든 것을 안다고 할 때, 그 신은 분명 시간마저 아우르는 상위 차원에서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가능성으로 남아 있으나 미래에는 이미 결정된 사실을 보고 우리에게 일러주는 존재일 것이다. 만일 신이 이미 존재하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단지 우리 세상의 프로그래머처럼 지금의 결정 과정을 거칠 때 발생할 수 있는 유사한, 그렇지만 결코 똑같다고 여길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이미지화하여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스터디룸을 갔을 때도 한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전날 늦게 잠이 든 터라 피곤함이 가시질 않아 거의 한 시간을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그럴 바에는 조금 늦게 일어날 생각으로 침대에서 자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침대에서 자면 한 시간이 아니라 10시간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아침에 7시까지 등교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저버리게 되는 꼴이었다. 그래서 애당초 잠을 자도 이곳에 와서 자자고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인공지능에게 내린 명령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새로운 생각과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이미지는 인공지능의 그것이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이 초현실주의적 느낌의 그림은 아니고 그저 지나간 기억의 단면들을 회상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화된 생각과 결합했다.

필립 K. 딕의 작품 중에 유빅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는 그 작품을 오로지 우뇌로만 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떠오르는 이미지화된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작품으로써 내려갔다는 의미일 텐데,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스럽게 언어화되는 과정 중에 좌뇌의 기능을 막을 수 있을까? 그저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손가락에서 텍스트로 전환할 수 있을까?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한 번 그런 방식을 직접 따라 해봐야겠다.

오전 내내 피곤해서 '과연 오늘은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윤이라도 눈앞에 있으면, 그 친구가 공부하는 모습에 자극이라도 받을 텐데, 면접을 보러 간 터라 혼자 오전을 이 작은 공간 안에서 버텨야 했다. 안 되겠다 싶어 세수도 하고 커피도 한잔 탔지만, 한번 온 피곤함은 쉽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제저녁 늦게 잔 까닭이 어쩌면 외로움이 가득한 밤을 뭐라도 좀 더 채우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니, 예전에 한 친구에게 들었던 '의미가 없어서요.'라는 말이 계속 귓전을 맴도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게 의미가 없어서요.'라는 그의 말과 어제의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동반한 이미지가 한데 묶여, 오전의 글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어제나 그 전날에는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때에도 어떻게 글을 썼지?'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럴 때는 잠시 글을 쓰는 것을 멈추고 상윤이와 대화를 한다든지, 아니면 자주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재밌건 흥미로운 글을 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을 정리해 주었던 것 같았다.

실제로 잠깐잠깐 인터넷으로 의미 없이 글을 눌러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잠시나마 속으로라도 깔깔댈 때면, 일단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었다. 한 5분, 10분 정도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글쓰기를 반복했다. 내가 할 방법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12시 40분 정도가 되어, 가방을 챙기고 운동 도구들을 들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매번 하는 운동이지만, 할 때마다 헉헉댄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비교적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좀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자극을 받아 타바타 이후에 다른 운동들도 함께 했다. 특히 복근 쪽에 자극이 덜한 것 같아 복근 운동에 조금 더 신경을 썼는데, 부상의 위험 때문에 몇 년간 안 하던 윗몸 일으키기를 다시 시작했다. 스피커에서는 한 5~6년 전쯤에 왔을 때 들었던, 그때 유행하던 노래가 아직 계속 나오고 있었다. 옛날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에도 이곳에서 운동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한창 운동을 지금보다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 2시간가량을 운동에 소비했고 꽤 식단 관리도 열심히 했었다. '만약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헬스장에 다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보다 내 몸은 나아졌을까?' 그때 이후로 헬스장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아침 운동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함께 운동해 나갔었다. 결국, 계속 운동은 해온 셈이며 운동 방식만 맨몸 운동과 코어 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때 비하면 체력적으로는 더 좋아진 게 아닐까 싶으나 멋진 몸이라는 관점으로는 나빠진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지금의 운동 방법은 지금의 체력을 유지하고 건강한 몸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 번 정도는 멋진 몸을 다른 사람 앞에 뽐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있어 이 일에 충분한 시간을 들일 만한 자신이 없었다.

근래에 유튜브에서 운동 방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담긴 강의를 본 적이 있다. 근육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설명은 특정 부위를 기르기 위하여 어떻게 운동을 하는 게 효율적이며 부상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지를 알려 주었으며,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동작에도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 사람의 몸을 보면서도 '전문가'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론적 지식에서도 '전문가'의 냄새가 느껴졌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전문가'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는 셈인데, 그 자신도 해당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만한 외관을 갖췄고 다른 사람에게 그 원리를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실제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를 알려줄 지식을 갖추었으며 꼭 피해야 할 중요한 실수나 오류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의 분야에서 그 외관은 그 사람의 몸이며, 과학자에게 그 외관은 자신이 과학자임을 입증할 인증서와 같은 것들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판단할 이러한 외관이 없더라도 '전문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으면 다수의 사람에게 자신이 '전문가'임을 입증하는 것은 비교적 긴 시간과 검증이 필요하다. 정리하면, 전문가란 다수의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게 있고, 그 원리와 응용을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있으며, 큰 시행착오를 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헬스장을 그만두고 아침 모임을 조직한 까닭 중 하나는 바로 모임의 지도자가 되면 나도 이런 '전문가'적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남들을 가르치려면 내가 더 공부해야 하므로, 실제로 가르치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라, 저 유튜브처럼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각 운동 동작의 기본 메커니즘과 초보자들이 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려줄 수 있었다.

운동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하나 보여주었다. 일전의 환불 업체의 사장에게서 온 '…만약 불법이 있다면 수일 내 규정대로 하시길 바랍니다.'로 끝나는 협박 같은 문자였다. 일전에도 전화해서 돈을 달라고 할 때, '법을 다 지키고 사업을 하느냐, 너희는 뭐 안 그러는 줄 아느냐'라는 식의 말을 하더니, 마지막 문자까지도 이런 문자를 보냈다. 아마 물건을 직접 받으러 오겠다는 말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사장님이 직접 오는 것을 원치 않아요. 물건과 돈만 주고받으면 끝인데,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얼굴을 보자고 그래요?"라고 말하고 배송비와 보관료를 받지 않는 대신 오지 말라고 이야기했었다. 아버지도 원치 않는 바였으며, 혼자 일하시는데, 그런 몰상식한 사람을 따로 대면하게 하는 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이런 생각을 조금 달리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우리도 몰랐던) 인터넷 사이트에 걸려 있는 오래전에 폐업한 아버지의 사업자 번호를 확인하고 아마도 우리가 폐업한 상태에서도 계속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나 역시 이런 문자를 본 후, 아버지 사업체가 있는 주소를 검색해보고서야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업자 등록번호가 잘못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아버지께 연락드리니 오래전에 폐업했던 것이고 지금은 새로운 사업자 등록번호를 부여받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아마도 오래전 사업체가 은행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경매로 넘어갔을 무렵의 일인 듯싶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렵다는 것은 알았어도 빚만 잔뜩 지고 경매로 사업체가 넘어갈 정도로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들들이 감당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당신이 다 짊어지신 것이었다. 훗날 그때, 또는 그 이후 아버지가 그토록 힘들어했다는 사실,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때, 매번 낚시를 하러 가셨다. 우리는 아버지가 낚시라도 하는 것을 보며, 아버지더러 더 힘들게 살지 말고 즐기며 살라고 말했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그렇게 하겠다고 내색 없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마음의 상실감, 좌절감이 컸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심지어는 낚시를 하시다가 저 호수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들로서 너무나도 죄송했다.

저 사람을 어찌해야 할까? 아버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해서 심통을 부리는 거라고, 내버려 두라고 말했지만, 너무나 화가 났다.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듯하고 자기의 잘못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문득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응징을 하려거든 복수심마저 들지 못하게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어설픈 관용으로는 그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차라리 공정위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현금 영수증조차 없는 거래 내역에 대해서는 세금 포탈 혐의로 신고했어야 옳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 자신이 돈을 입금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서로 이런 일은 잊고 다시 벌면 되니까 열심히 다시 살아보자고 했던 것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잠시 시원한 방바닥에 누워 동생과 연락하면서 이 사람에게 연락해서 항의해야 할지 아니면 이러한 협박성 문자에 대응하는 제재조치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밥 생각도 잊고 집에 있는 구운 달걀 2개만 달랑 들고 월천 라운지로 향했다. 자리가 모두 채워져 있었지만, 잠시 뒤 한 사람이 나가고 그 자리를 재빨리 차지했다. 오전에 못다 쓴 글을 쓰다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한 부분과 그것을 응용하여 쓴 나의 글을 인용하다가, 두 문장이 가진 느낌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 보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한 무력감이 그때에는 큰 생각 없이 내가 혹은 나의 소설적 자아가 느끼는 무력감으로 치환하여 쓴 것이었지만, 그 묘사를 좀 더 유심히 보고서 이 무력감의 근원은 서로 다른 곳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마땅한 용어일지는 몰라도 전자는 '가스등 효과'적인 무력감이며 후자는 '번아웃 증후군'적 무력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문장을 통해 그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그림의 붓 터치만큼이나 섬세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문장을 곱씹는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문장에 담긴 감정을 이해해보려는 것이며 예술로서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부분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문장의 비교를 통해 나는 어쩌면 책을 감상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한 듯하다.

오전에는 '오늘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오후가 되니 비교적 술술 풀려 분량에 대한 기록을 경신하고야 말았다. 분량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마치 거울로 몸의 변화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것만큼이나 속물적인 일이기는 하나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며 바로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쁨쯤 있으면 어떠랴? 아니, 현재로선 그런 기쁨이라도 있는 것이 내가 글을 계속 쓰는 원동력이 된다.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기대한 목표치 혹은 그 이상을 채웠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만으로도 '의미가 없다'라는 생각보다 '하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을 준다. 그리고 목표 달성 이후 다음 목표를 설정하는 힘이 된다. 나는 쓰는 인간이며, 그것으로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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