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눈 속의 사냥꾼 중 일부(Hunters in the Snow (Winter)_, 1565, oil on wood, 162 x 117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 ※ 마의 산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보스의 요양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그저께 쓴 일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썼을 때, 처음과는 다른 글을 쓰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분량과 생각이 더 늘어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글쓰기 연습의 한 방법을 찾은 듯한데, 나처럼 하나의 소재를 붙잡아 쓴 다음 그것이 삭제되었다고 생각하고, 될 수 있으면 다음 날 새로운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이는 비록 하루 전이지만 해당 소재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생각을 덧입히는 방법으로 생각의 폭을 좀 더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더불어 다시 쓰는 글은 삭제된 그날 바로 쓰는 것보다 다음날 쓰는 게 좋은 듯싶다. 그 까닭은 글이 삭제된 이후에 바로 같은 내용의 글을 쓰게 되면 아직 이전 글의 잔상이 강하게 남아 있어 새롭게 생각하려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저장 실패로 인한 분노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 그 마음으로는 전보다 좋을 쓰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다음 날이 아니라 며칠이 지난 이후에 글을 쓰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한참 지나 똑같은 글을 다시 쓰고자 한다면 기억이 상당 부분 많이 지워져, 기억 위에 새로운 생각을 더해 글을 쓰기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 연습이든, 나처럼 갑작스럽게 지워지거나 저장 문제로 공들여 쓴 글이 없어졌다면, 다시 그 글을 쓸 때는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하루 정도 두는 것이 좋다.
이렇게 쓰는 것을 생각하면 포토샵의 레이어 기능이나 캔버스 위에 유화를 덧칠하는 과정이 떠오른다. 레이어 기능은 하나의 레이어 위에 다른 이미지가 담긴 레이어를 함께 조합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완성도 높은 그림을 만든다. 캔버스의 유화 역시 완성도 높은 그림을 위해 물감 위에 다른 물감을 덧붙이는 식으로 할 수 있다. 남아 있는 생각에 다음날 다른 생각을 덧붙인다는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글쓰기 훈련과 비슷하다. 이러한 훈련(?)은 내게는 참으로 신선한 방법이기도 했으며 훗날 누군가를 가르치게 될 때 쓸 방법의 하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의 글쓰기를 통해서 나름의 수많은 글쓰기 훈련법을 발견하곤 한다. 그중에 하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인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비전문적인 글쓰기를 원하는 분들이 활용할 수 있느냐가 고민 중 하나이다. 개요를 짜고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짜임새 있게 만들기는 하며 좋은 글쓰기 훈련법이기는 하나, 비전문적인 글쓰기 또는 수필이나 에세이를 편하게 풀어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적어가는 글쓰기는 중구난방 하거나 두서가 없을 수는 있으나 그 의식 속에 들어오는 한두 개의 소재를 잘 잡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어나가다 보면 글이 된다. 음식으로 치면 레시피와 과정이 다 있는 요리와 소재만 있을 뿐 즉흥적으로 만들어가는 요리와의 차이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고 댄스로 치면 몇 가지 패턴을 이미 주고 그 안에서 조합하는 댄스와 그저 즉흥적으로 주어지는 댄스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더 좋다고 여기기는 어려우며 잘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즉흥적인 것이 더 어려우며 기본적인 배움 이후에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 즉흥적이면서 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개요를 짜 보고 익숙하거나 비교적 쉬운 소재를 두고 연습하거나 숙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연습이 된 사람은 개요를 짜지 않더라도 여러 문장과 문단을 구성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저 가벼운 댄스파티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가벼운 식사에서는 어려운 댄스나 어려운 레시피를 따라갈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즉흥적으로 만들어가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춤추는 것과 먹는 것도 이럴 수 있는데 글쓰기라고 그렇게 못 할 게 뭐가 있는가? 의식의 흐름은 바로 그런 즐거운 글쓰기 방법이다. 전문가에게는 글에 날것의 신선함이나 생각을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며 비전문가에게는 지나친 고통 없이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글쓰기는 올림픽이 아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할 필요까지 없으며 그저 그 일을 함으로써 일상의 즐거움과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 일상의 사물을 만날 때,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따라가면서 그 의미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며칠 전에, 아침에 길을 가다가 화단 위의 꽃을 단 몇 초 동안 바라보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꽃으로부터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에 갔을 때, 새롭게 만든 화단을 보여주시고 좋아하시던 모습과 꽃을 받고 좋아하던 식당 이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꽃을 좋아하던 소녀 시절의 그녀들을 떠올리며, ‘그녀들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혹자는 그들이 나이를 먹고 주름이 생기면서 고생하며 걸어온 삶의 궤적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연민과 사랑에 대한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여자가 나이에 상관없이 꽃을 좋아하는 까닭과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이 의식의 흐름은 감각기관이나 자신의 직관으로부터 들어오는 현재의 생각이 과거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만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어렵지 않은 방법이며 일기나 하다못해 낙서를 통해 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라도 훈련해온 방식이다. 그래서 개요를 짜는 방식보다 쉬울 수 있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어렵지 않게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방법은 많은 작가가 강조하는 "일단 써라!"에도 잘 부합한다. 쉽게 말하면, 그냥 일상을 보내다가 아무거나 눈에 들어오는 거 하나를 집은 다음에 생각의 꼬리를 물어 나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제의 글과 삭제된 그저께의 글을 그렇게 연달아 쓰고 나니 전날 저녁에 느꼈던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분노의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분량의 글을 쓰게 된 터라, 뿌듯한 감정마저 느꼈다. 분량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는 있으나, 가시적으로 들어오는 만족감의 척도는 분량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통계치를 웃도는 분량을 쓰게 될 때 한계를 넘어섰다는 만족감은 마치 운동에서 한계를 넘어설 때 느끼는 희열감과도 같았으며 이러한 성공이 다음 단계의 분량을 목표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분량이 중요한 게 아닐까? 규격이 있는 시나 혹은 단편의 경우에는 분량보다도 담고 있는 의미의 중요성이 더 중요할 것이다. 충분히 사색하여 글을 썼다면 분량보다 질적인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생각해볼 때 깊은 사색의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고 설령 가졌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시간을 또 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사색을 했더라도 글로 그것을 의미를 담아 좋은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혹시나 그런 상황이라면, 일단 많이 써보고 생각을 계속 덧입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신이 그러한 처지라면, 사색의 과정을 따로 거치기보다 쓰면서 생각하고 또한 많이 쓰는 게 좋은 문장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글은 하나의 현상에 대하여 생각의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으므로 긴 분량의 대부분은 글을 쓰면서 여러 생각을 담게 된다. 그 가운데에는 깊이 있거나 폭넓은 생각이 있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만족감은 글쓰기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는데, 분량은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 독서 모임을 하면서 한 분기에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이나 혹은 감상을 적어도 한 편의상 의무적으로 쓰도록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까닭은 단순히 책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일이지만, 책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담는 것은 책에 대한 감상과 느낌을 더욱더 오래 가질 수 있도록 하거니와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통찰을 담은 책을 보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통해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이때에도 요청했던 것은 단순히 몇 줄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닌 최소 A4 한 장 이상의 글을 써주기를 요청했었다. 그 까닭은 앞서 언급한 것과도 유사한데, 두꺼운 책이 가진 의미와 자기 생각을 시처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일뿐더러 대체로는 수박 겉핥기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충분히 자기 생각을 따라가고 그 책을 자신의 다른 직간접 경험이나 사회의 수많은 현상과 접목해서 바라볼 때,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분량은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두 편의 일기를 다 쓰고 나니 거의 1시가 다 되었다. 7시부터 거의 쉬지 않고 약 6시간을 내리쓴 것이다. 영어 모임을 없애고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짐을 정리하고 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갔다. 가는 길에 상윤이에게 철봉 운동을 할 때 쓰라고 준 운동 밴드를 써보고 마음에 든다는 연락을 받았다. 혼자 운동을 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나 보조 기구가 없다는 점인데, 이러한 밴드는 그 점을 보완해 주었다. 특히 철봉 운동을 할 때, 충분히 철봉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바른 자세를 잡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도구였다. 과거 아침 운동모임을 조직했을 때, 필요 때문에 구매한 것 중 같은 종류의 밴드가 2개가 있길래 그중 하나를 상윤에게 주었다. 밴드를 착용하고 철봉을 10개까지 했다고 좋아했다.
헬스장에 도착해서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서 바로 타바타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하면서 조금 더 덩치를 키워야 하는지, 식단을 짜야할지 고민스러웠다. 사실 고민이라고 하기보다 그렇게 해 먹는 데에 따른 귀찮음이 더 컸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매일 가격 파괴 분식점에 가서 밥을 먹는 게 편했다. 또한, 이 일이 집에서 이루어질 게 뻔한데, 아마도 그 까닭이 식단을 만들어 먹기를 더 귀찮게 여기는 이유 같았다. 아마 특정 공간이 가지는 공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령 장례식장은 죽음의 공기를, 도서관은 사람이 없더라도 학습의 공기가 있다면, 내 방은 귀찮음의 공기를 있는 힘껏 풍기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공기는 외로움마저 담고 있어서 그 방에 들어가면 무기력해짐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잠을 잘 때는 좋을지 모르나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서는 될 수 있으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이었다. 한때는 그 공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나 이미 몸이 그 공기에 적응해버려 조금만 방심하면 그 공기가 이끄는 대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머무르는 각각의 공간은 이처럼 저마다 서로 다른 공기가 있다. 방의 공기를 이렇게 만든 것은 좁은 방 자체의 특성일까? 혹은 내 천성과 잘못된 습관 탓일까? 후자라고 여기지만 전자도 무시는 못 할 듯하다.
운동을 끝내고 박카스 두 병과 피로회복제 한 알을 들고 가격 파괴 전문점에 들렸다. 그리 많지 않은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으로 가니 이모가 안 바쁘니까 안 해도 된다고 웃으면서 밀쳐낸다. 나는 힘으로 버티면서 이거라도 하게 해달라고 조른다. 그렇게 실랑이하는 중에 이모에게 주문이 들어오는 틈을 타 수세미를 들고 설거지를 했다. 이모는 주말 점심때 밀려드는 손님이 너무 많아 나를 기다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천안에 있는 동생 집에 있었다고 말하며, 엄마를 보듯 안쓰러운 듯 이모를 보았다. 혼자 일하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날 한 끼도 못 먹고 설거지는 손도 못 대고 있다가 아는 박스 줍는 이모 한 명이 왔길래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모, 내가 혹시 어제처럼 다른 곳에 있는 거 아니면 갈 테니까, 바쁘면 전화해요."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예전부터 몇 번을 당부했지만, 사실 전화를 받은 적은 재료가 떨어졌는데, 일하고 있어 움직이기 어려우니 재료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적 말고는 없었다.
설거지를 도와주면서 냉모밀을 부탁했다. 이모는 작은 손이 늘어난 건지 보기에도 많은 양의 면을 성큼 집어넣는다. "이모 너무 많아. 나 배 터져!"라고 하소연을 하지만, 모밀은 배가 빨리 꺼진다고 괜찮다고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요리를 하신다. 인사처럼 되어버린 하소연이고 반쯤은 진심이 담긴 하소연이지만, 그 하소연 속에는 나를 생각해주는 데에 따른 고마움도 담겨 있다. 그래서 생각대로 족히 2인분은 될 법한 양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다 먹어버린다. 먹으면서 이모는 김밥도 한 줄 먹으라고 금세 만들어 주신다. 오늘은 이거 한 끼로 버텨도 될 만큼의 양이었다. 나는 그것마저 맛있게 다 먹어버린다. 실제로 맛있기도 하거니와 이모의 고마움이 느껴져 다 먹어버리지만, 이러한 행동은 앞으로 이모가 나를 위해 음식을 해주는 기준이 될 것이었다.
"언제나 많다고 하면서 맛있게 다 먹을 거면서!" 많이 준비된 음식을 보면서 친구 대용에게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면 언제나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동생 역시 그런 말을 비슷하게 했다. 그리고 이모는 행동으로 보인다. 어디서나 들어온, 안 먹을 듯하다가도 막상 해주면 ‘다 먹는다.’라는 친구의 말을 미루어 보건대, 잘못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을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너무 많다고 하는 내 말도 진심이며 이미 눈앞에 있는 음식을 전부 맛있게 먹는 것도 진심이었다. 건강한 몸을 가꾸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운동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음식을 먹는 것, 특히 많이 먹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 남기는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내 입장은 음식을 주문하기 전과 음식이 나온 후로 태도가 바뀐다. 주문하기 전에는 되도록 소식까지는 아니더라도 건강한 음식, 적당한 양의 음식을 바라는 것이고 나온 후에는 그저 맛있게 먹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 다른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내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즐기려는 태도에 가깝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최선을 다해 요구는 하나 이미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순응하고 즐기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음식에 대한 요구가 번번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모네, 대용이네, 동생 집에 가는 것은 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음식을 먹게 되는 것과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으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내 의지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다 먹고서 나는 이모에게 인사를 하고 햇살이 가득한 밖으로 향했다. 길은 한산했고 따스한 햇볕이 얼굴에 닿으며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월천 라운지로 향하는 길에 가볍게 흔들리는 햇살을 머금은 녹색의 나무들을 보았다. 뿌옇게 보이지도 않고 제법 선명한 모습으로 살랑거리는 저 나무들은 햇살을 머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캠퍼스에 있는 곳곳의 나무들과 벤치, 그리고 햇살은 이 공간에 있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여유와 계절의 행복감을 만끽하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도시의 고층 빌딩과는 다른 여유로움이 이 공간 곳곳에 물들어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 책을 읽기는 너무 아쉬운 날씨라서 전자책을 들고 바깥 벤치에 앉았다. 길을 오가는 여러 사람의 밝은 모습 때문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책을 보다 말고, 지나가는 사람을 잠시 관찰하다가 그냥 맑은 하늘 한번 쳐다보고 눈을 감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피로감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이런 공간에서 고독의 얼룩이 남겨지지 않게 나보다 손이 작은, 뽀얀 손을 가진 누군가의 깍지를 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컵밥을 즐기고 있는 맞은편의 저 연인들처럼 밥 한 숟갈에도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스무 살의 연애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머릿속에는 그런 연애를 그리고 있었다. 언젠가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있던 공원의 흔들의자에 나란히 앉아 별과 달을 바라보며 소소한 이야기를 했던 그때처럼, 다시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런 게 있어야만 봄날의 이 선선하며 아름다운 날씨를 제대로 누릴 것 같았다. 그 사람의 무릎에 베개를 하고 바람이 실어오는 봄의 냄새와 그녀의 몸 냄새를 함께 맡으며 가볍게 입맞춤하는 날이 다시 왔으면 싶었다. 그게 바로 청춘이었다. 청춘은 봄날의 연애와 같은 것이었고 무르익는 것 말고는 중요한 게 없는 그런 시기였다. 지금은 내 옆에 누군가라도 있다면 사랑에 빠지기 참 좋은 날이었다. 그 사람에게 길가에 핀 저 꽃을 보며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고 '참 예쁘다'라고 말하고 싶은 날이었다. 나는 더는 감상에 젖기가 싫어 다시 라운지 안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보려고 꺼내 둔 <스피노자의 뇌>를 보다가 오래간만에 소설을 읽고 싶었다. 무슨 책을 볼까 하다가 올리버 색스의 책에 언급되어 있던 다른 여러 책 가운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올랐다. 평상시에도 읽고 싶었지만, 다른 책들을 보느라 못 보고 있었는데 이참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첫 문장은 신문 기사를 보듯 매우 무미건조한 어투로 쓰여 있었다. 편견에 가깝다고 생각되나 이러한 어투는 내가 가진 독일인에 대한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해주었다. 문학마저도 건조한 느낌의 신문 기사처럼 쓰는 이 수법은 보기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느끼는 목마름 같았다. 그 기분에 당장 물이라도 한잔 마셔야 할 것 같은 갈증이 일었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머리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범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강조함에 따라 인물에 대한 지나친 묘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같았다. 아마도 그 까닭은 인물 묘사를 거의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가 주인공의 감정을 좀 더 이입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가령 어떠한 게임, 특히 1인칭 시점의 게임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자신의 이름으로 수정은 가능하다) 그 인물의 인상이나 특징은 서술되지 않는다. 그저 화면상에 대략 어떻게 생겼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만 있을 뿐이며 그것조차 마을을 돌아다닐 때 작은 캐릭터로 묘사되거나 혹은 게임을 하면서 이벤트 중간에 나타나는 얼굴의 외곽과 머리카락 정도만 표현될 뿐이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캐릭터가 자기 자신과 동일인처럼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특징이 묘사되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런 효과를 노려 독자가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거나 충격을 느끼게 하고자 함이 아닐까? 물론 첫 문장 및 단지 앞부분의 몇 장만 보고서 판단한 셈인데, 편견일 수도 있으며 앞으로 그의 모습에 대한 특징이 서술될지는 모를 일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러한 편견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이 책을 볼 예정이다.)
책은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인물의 얼굴이나 몸에 대한 묘사는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움직임과 그들 주변에 있는 인물들, 그리고 행동, 심지어 소품들까지도 세세히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루할 정도로 길어지는 묘사와 감상들은 그 의식의 흐름을 집중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이내 지루해져서 책을 덮을 수 있도록 유혹했다. 거의 모든 고전이 그렇겠지만, 특히 요즘같이 이야기의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추세에서는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은 아니겠다 싶었다. 서술 방식도 그러하지만, 책의 두께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여하튼 내 최대 장점 중 하나는 참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인내를 갖고 천천히 웃으면서 보기로 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을 텐데, 이 산도 천천히 올라 정복하면 그만이었다. 아직 봄의 시간은 넉넉했으며, 그 시간이 지나도 햇살은 여전히 내 머리맡을 비출 터였다.
시간이 지나 저녁 9시가 되자,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올랐다. 길 위에서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영어 방송을 들었다. 오전 10시의 영어 모임을 없앴으니 이제 이 길 위에서 반드시 방송을 듣고 공부를 해야만 했다. 모쪼록 바라는 건 게으름을 피하는 것이었다. 글쓰기로 인한 성취만큼이나 영어로 인한 성취 또한 얻고 싶었다. 내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순해졌으니 단순해진 만큼 더 충실히 살아보고 싶었다. 지금 그 자체에 만족하는 그것만큼이나 지금의 발걸음이 가까운 미래에 보상이 될 수 있었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