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물에 잠기던 날|동생의 변화|기생충의 영화 스타일

나의 일상 여행기. (71)

by Chris
그림: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바다 위의 폭풍우 (rainstorm over the sea) 1824-1828 | ※ 집이 물에 잠겼던 그 시간은 하늘이 땅을 모조리 집어 삼키던 날의 아침이었다.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사라진 일기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틀 전을 위한 글을 남겨야겠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 더듬는 것은 같은 사실을 두고서라도 처음과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저께의 기억에 오늘의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부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어제 적었다가 삭제된 글과 유사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 현재로선 그것을 알 수 없는데, 처음부터 무엇을 어떤 생각으로 쓸지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서사적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은 이미 과거의 것이지만, 그 사건들에 부여하는 의미는 바로 현재의 것이다. 나는 단지 사실로서의 '나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 시점에 의미가 되는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내 미래의 겪을 비슷한 일들에 영향을 끼치기 위함이기도 한다.

이 글은 전혀 새로울 것이며, 나 역시 굳이 어제 썼던 것을 최대한 복원하자는 마음보다도 그 마음을 버리고 오늘에 맞는 새로운 글을 쓰자는 마음으로 임할 것이다.




그날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동생은 출근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다. 전날에 조금 늦게 잔 터라 피곤했지만, 익숙해진 기상 패턴으로 동생이 깰 때 함께 눈을 떴다. 혼자 사는 방의 조용한 모습이 아니라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가 함께 있는 이 광경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집은 생기가 넘쳤고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우리 집에서처럼 잠잠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이었다. 나는 동생은 샤워하려고 들어가려는 동생을 보며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라고 말하고 화장실에 들어갈 시늉을 했다. 동생은 웃으면서 바빠 죽겠는데 장난하지 말라고 나를 나무랐다. 나는 그게 더 재밌어서 몇 차례 그의 분주함에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이 집에는 내 방에는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의 바람, 커다란 베란다 너머에서 들어오는 충분한 햇살과 온화한 풍경, 그리고 사람이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은 살 수 있다 치더라도 나머지는 방의 크기나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집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한다면, 충분한 햇살을 받을 창이 있어야 하고 그 창밖의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켜줄 만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머물다 갈 수 있는 충분한 크기여야 했다. 의식주가 사람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거니와 특히 집은 더욱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집이 복잡하거나 어지럽혀 있으면 나 역시 그 마음이 복잡해지고 정돈이 되어 있다면 마음 역시 그러한 느낌을 받는다. 집이 비좁으면 나 역시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느낌을 받는다. 물론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온화한 마음과 평정을 유지하고 다짐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보이는 집안의 풍경은 언제나 내 마음의 약한 부분부터 뒤흔든다.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고자 하는 까닭은 그 집이 부의 척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는 단칸방의 저렴한 집에 살고 있으며 언제까지 이 삶이 계속될지 의문인 채로 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작년보다 좀 더 나은 햇살과 풍경을 가진 집이며 더불어 그 크기도 좀 더 커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집조차 고맙다. 그 시절의 집은 반지하에 창문이라고 가로세로 폭이 약 50cm 정도 되는 창틀이 짝으로 달린 집이었다. 크기는 책꽂이에 책상, 그리고 침대 하나를 놓으면 간신히 이동할 수 있는 작은 공간 정도가 다였다. 나는 그곳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내가 집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그 건물의 관리자로서 무료로 숙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내 몸 하나 누울 공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보다 더 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으며, 신경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까닭은 잠을 자는 것 외에 집에서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면 학교나 커피숍을 갔고, 운동하기 위해서 헬스장이나 운동장을 갔으며 굳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조차도 다른 장소에서 했다. 사실, 그래서 집이 좁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내 작업실은 학교의 라운지나 커피숍이었고 서재는 도서관이었으며 연습실도 외부였다. 집은 오로지 잠을 자거나 컴퓨터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장소 이외는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안빈낙도와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온 우주가 내 집이며 어둠 속에서 별과 달이 내 이불이라, 나는 집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물론 이 삶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면 언제든 있어도 좋다는 그들의 말에 나는 매번 '집을 알아볼까?' 하다가도 편안한 지금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여름이 오고 그날 엄청난 비가 내리고 말았다. 친구 집들이로 지방에 있었던 날이었다. 바로 그날, 비가 억수로 쏟아져, 나는 처음으로 수해라는 것을 입어봤다. 그리고 제법 만족스러웠던 내 집이 비참하게도 빗물과 하수도에서 역류하는 검은 물에 잠기고 만 것을 보았다. 책들이 잠기고 물건들이 둥둥 떠다녔다. 단 몇 분 사이에 쏟아진 엄청난 비 때문에 집 앞의 커다란 하수구조차 그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밖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물은 삽시간에 앞 도로 주변의 건물들의 지하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으나 친구네 집에서는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인천 지역에 쏟아진 폭우를 아침 뉴스를 통해 접하고, CCTV를 켰을 때 지하 복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을 보았을 때, 그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CCTV에는 한 사람이 뛰어나와 여기저기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곧바로 사장에게 연락했지만 아직 그는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최대한 빨리 올라간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다시 다른 방에 사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이 잠겼어요. 물이 갑자기 불어나더니 집 앞이 강으로 바뀌었어요." 그에게 최대한 빨리 올라가는 중이고 사장도 지금 그리로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집 앞에 들어서서 계단 아래를 바라보니 물이 방문의 손잡이까지 차 있었다. 아래층의 전기 차단기를 확인하니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내 방의 창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 손으로 열어보니 방에는 물이 바깥보다는 적었지만, 무릎까지는 찬 것 같았다. 가벼운 물건들은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옷가지들도 마찬가지로 떠다니고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옷가지를 보기 전까진, 이러한 곳도 내게는 감사하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심지어 돈을 아낄 수 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폭우는 이러한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고 그간의 만족감은 그저 당신의 환상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좁은 방에 있던 몇 년 동안의 살림살이는 다른 방들에 비해 더 많은 양이었고 그 양만큼이나 피해 액수는 정부 보상으로는 턱도 없었다. 옆 방의 친구들은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을 좋아하기도 했는데, 그 까닭은 작은 기숙방에 사는 학생들이었던지라 가져온 물건도 그리 많지 않았고 각자 자기 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중요한 물건은 물에 잠기기 전에 미리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나만, 살림살이가 지나치게 많았고 전날 밖에 있었기 때문에 미리 대응하지 못해서 피해가 더 컸었다.

보상은 피해액에 따라 다르지 않았고 100만 원씩 일정했다. 인천 주안은 피해가 더 컸다고 하던데, 나보다 더 피해를 본 사람도 마찬가지의 보상액이었을 것 같아 그냥 감지덕지하고 받았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수많은 피해 속에서도 나를 도와주려고 온 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수고로 나를 아껴주는 고마운 이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들은 젖은 책과 가재도구를 옥상으로 가져다가 다 말려주는 수고조차 아끼지 않았고 여러모로 나를 위로해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비와 하수구가 섞인 물에 젖은 책을 말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페이지가 붙지 않도록 응달에서 며칠 동안을 한두 페이지씩 펼쳐가며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위해 그러한 행동을 아끼지 않았다. 동아리 방으로 가져와서 쭉 펼쳐 놓으며 공부를 하다가 틈틈이 와서 책을 말리고 있었다. (문득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일과 그들의 수고를 다시 생각하니 내가 참 그들의 고마움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비록 피해 속에서 현실이 시궁창일 수도 있음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 시궁창 속에서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위기를 이겨내 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비가 오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신경이 쓰였고 저녁에 비가 내릴라치면 잠을 못 자고 버텨야 했다. 그곳에 사는 중에는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올라치면, 일기예보를 예의 주시해야 했고, 그때와 비슷한 일을 겪기라고 할라치면 미리 문을 통제하고 그 앞에 모래주머니로 막는 듯, 예방조치를 다 했다. 그럼에도, 짜증스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이것을 십중팔구는 안타까운 자연재해라고 할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일까? 물론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앞의 하수구를 충분히 크게 하던가 혹은 한 곳으로 모이는 하수구를 한 곳에 모두 모이게 하기보다 분산을 하게 했다면? 또는 이것이 최근에 엄청나게 많이 지은 커다란 건물들이 많아져 건물이 있는 쪽의 지반이 가라앉아서 생긴 문제라거나 혹은 그런 건물들이 빗물의 분산을 막아 이렇게 된 거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들을 하다 보면, 이러한 재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대비를 못 하거나 부동산 경기 부양정책의 하나로 허가를 너무 많이 내준 게 이러한 사달을 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그때 이후로, 집은 리모델링을 거치고 다시 깔끔한 방이 되었지만, 정이 떨어졌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예전보다 집에 대한 만족감은 없었다. 오히려 언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할까 고민이 더 들기도 했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수입이 없던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있는 게 최선인 것 같았고, 나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곳에서 계속 산 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 탓에 오히려 행복 주택이나 정부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주택 지원 정책에 대해서 생각도 못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 나이 때의 다른 이들이 생각할 재테크나 집에 대한 소망 따위는 하나도 없었고 마찬가지도 정보 따위도 얻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어떠한 계기로 그 이후에 그 방을 나오고 나서야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돈을 내고 사는 방에서 있고 나서야 정부에서 지원하는 전세 정책이 참 좋은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여하튼 지금의 집은 그때 비해 더 좋으며 3층이라 비 걱정도 없다. 그전보다 매달 내야 하는 돈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매일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다른 사람을 데려와 가볍게 술 한잔할 정도로 조금 더 컸으면 하는 것과 창문 밖의 풍경이 탁 트인 시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것과 햇살이 적절하게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점이었다. 특히 첫 번째가 이루어진다면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을 것 같아 아쉬웠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독서나 취미 활동을 함께할 모임을 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방에 초대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 안에 들이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내 방이 작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항상 여운처럼 남는다. 그래서 머지않아 꼭 이 정도 크기 이상의 방에서 살기를 바란다.




동생을 보내고 한적한 방 안에서 선풍기를 미풍으로 맞으며 한숨을 더 잤다. 자고 일어나니 작은 방 안의 세상은 평화로웠다. 밥상을 꺼내고 침대 아래에서 앉아 그 전날을 기록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한참을 쓰다 보니 커피가 당겼다. 원래 계획으로는 집 앞 커피숍으로 가서 글을 쓰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물을 끓이려고 했으나 마땅한 게 없어서 사기그릇에 수돗물을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텀블러에 베트남 커피를 붓고 따뜻한 물을 부으니 베트남 커피 특유의 구수한 향이 방안을 감쌌다. 커피를 한잔하면서 다시 글쓰기를 재촉했다.

1시가 넘자 동생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점심은 생일 선물로 받은 치킨 쿠폰으로 치킨을 주문했다고 좋아했다. 치킨을 뜯으면서 동생이 타지에 와서 회사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하여 기뻤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8~9개월가량 되는 것 같았다. 비록 계약직에 토요일마저도 격주 오전마다 출근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으며 잘하면 정규직 전환도 노려볼 만했다.

처음에는 전혀 새로운 일에, 눈치까지 봐야 해서 내심 걱정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생은 마음을 바꾸고 보다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한 전환은 한순간에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로 사람들도 그가 밝아졌다고 칭찬했다. 매일 꾸준히 운동도 하고 보컬 레슨도 받으면서 자신을 가꿔가고 있었다. 흥청망청 자신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가지고 무엇인가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노력이 필요한 일은 점진적으로 노력해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위한 결정은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너무 지나치게 생각만 하고 있으면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시간만 보내게 되며 오히려 만성화되어 노력도 결정도 못 하게 된다. 동생은 한순간에 자신의 삶을 자신감 있게 살고자 결정했으며 그 결정에 후회 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로는 이 결정은 정말 어느 순간에 이루어졌다. 노래를 좋아하는 그는 이따금 자신의 노래 영상을 녹화하여 유튜브로 전송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유명 사이트에 가끔 자신이 노래하는 모습을 올리는데, 그때에는 꽤 겸손한 척(?)을 하며 "잘 못 불렀는데…"와 같은 말을 펼치며 글을 올렸다. 한참이 지나고서 노래에 달린 댓글을 보았을 때 그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거기에는 "자신감이 조금 더 있었으면…"과 같은 댓글이 꽤 많이 달렸었기 때문이다. 노래 발성의 방법이나 칭찬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자신의 자세나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통해(심지어 얼굴을 모자이크로 가렸음에도) 자신감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동생은 일상에서도 자신이 없이 지내던 모습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드러나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동생은 정식으로 보컬 레슨을 받으려고 학원을 등록하고 평상시의 모습에도 조금 더 자기 다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원래 조용한 성격이 아닌데도 몸에 맞지 않게 얌전하게 행동하다 보니 더 주눅이 들어 보였던 것을 스스로 떨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또한 이제 슬슬 일과 인간관계가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상에서조차 스스로 주눅이 들어 보이도록 했던 말과 행동을 버리고 당당히, 마치 지금의 나에게 하는 듯하게 대했더니 많은 사람이 전보다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생이 나는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이곳에서 뼈를 묻을지 혹은 계약직으로 끝을 맺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 자기 다운 모습을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는 황무지에서 그 자신을 꽃피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는 실로 개척자였다.

치킨을 다 먹고선 자리에 다시 앉아 마저 글을 썼고 동생은 위에서 컴퓨터를 했다. 동생은 본 적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BJ들이 게임을 하며 잡담을 하는 영상을 보여주는데, 당최 재밌는 것을 모르겠다. 화면은 삼 분할로 되어 있고 왼쪽의 가장 큰 화면에는 게임 영상, 우측 상단에는 채팅방 영상, 하단에는 BJ의 게임을 하면서 말하는 영상이 녹화되어 있었다. 실시간은 아니며 트위치라는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된 것을 녹화하여 다시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게임을 하면서 BJ가 주로 지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 하는 영상이었는데, 상단의 채팅 창에는 'ㅋㅋㅋ'과 같이 웃음을 표현하는 글로 도배되었다. "이게 재밌냐?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 차라리 네가 더 웃긴 것 같아."라고 말을 하면, 동생은 재밌다고 웃는다. 그러면서 이것도 아무나 이렇게 쉽게 하는 건 아니라고 이 사람은 재능이 있는 거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10만 구독자를 갖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한편 보여준다. 그것으로 밥벌이하기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영상이며 결론은 돈을 목적으로 시도하면 오래가기 어려우며, 좋아하는 것을 계속 올리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파워 블로거'가 되기 어려운 까닭에 대한 이야기와 비슷했다. 사실 모든 일들, 특히 자기 자신이 개척해야 하는 일이라면 새겨들어야 할 말이긴 했다. 직장 생활을 때려치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자 한다면 한동안은 돈보다도 열정이 필요했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업종적 차이로 인한 구체적인 생각을 뺀다면 백종원이 골목 식당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쉽게 보지 말 것.', '원칙을 지킬 것', '꾸준히 공부할 것.', '일을 하고 있다면 쉽게 발을 담그려고 하지 말 것.' 등등.

세상에 쉬운 일이 없고 운에만 기댈 일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자신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운으로 성공하면 그것이 저주가 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저녁이 되자 동생과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생충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 심취하여 마치 달팽이 기생충처럼 숙주를 지배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내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보고 난 이후에는 서글픈 감정만 들뿐이었다. 나는 어쩌면 고리오 영감이나 테레즈 라캥을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의 젊은 시절에 살던 집이 떠올라 씁쓸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또한, 보는 내내 일전에도 이야기한 조셉 콘래드의 말, "예술은 매 한 줄마다 (예술로서) 정당화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장면과 대사 가득했다. 이야기에 사회적 의미를 비교적 쉽게 담는 것 그리고 연극적 미장센보다는 현실적인 느낌의 연출은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예술의 길에도 다소 맞아떨어졌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며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의 마지막 연출을 보는 듯했다.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와 더불어 여운을 주는 것이 딱 그의 스타일과 비슷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영화 토론 모임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치 있다 싶은 영화들을 보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큼 영화에 재미를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서 모임을 준비하는 데까지는 힘이 들긴 했으나 분명히 그때처럼 영화에 대해 이론적으로 많이 배운 적도 없던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훗날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이야기로 영화를 제작할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떠할까? 아마 단순히 글을 쓰는 것과 또 다른 재미가 있으리라. 나는 지금 내 나이에서, 내 능력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내 실력을 보여줘야 할 상태이며 노력하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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