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여행기. (73)
※ 보쉬의 이 그림을 볼 때, 나는 어쩌면 저 그림이 서로 다른 시기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마치 영화 '콘스탄틴'에서처럼 같은 시공간,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상상할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쓰다 보면 어제의 일 중에서 '이거는 꼭 써야지.' 생각했던 것을 잊고 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런 일은 잦은 편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일부러 펜을 들어 그 생각을 붙잡으려고 메모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까닭은 비록 그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다른 일들에 관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전날의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각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때문이다.
생각은 흐르는 것일까? 어제 <마의 산>을 보다가 시간의 환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과학 유튜브 채널에서 관련 영상을 보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내용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우리는 3차원적 존재이기 때문에 매 순간, 현재라는 특정 시간의 한 단면만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도 시공간에 존재하는 물질들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일까? 과거의 어느 시점에 'a'라는 생각을 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도 'a'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생각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보면 뇌의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 자극이라고 한다. '생각'이라는 것을 이러한 물질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다른 물질처럼 이 전기 자극이라는 물질의 이동 역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기 자극으로부터 두뇌가 처리해야 하는 시간까지를 고려한다면 생각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 없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빛보다 빠른 물질이 없으므로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장담을 했다고 하더라도, 혹시 그보다 빠른 물질의 발견하여 미래로 갔다면, 미래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인가?
분명, 과거의 생각은 과거에 묶여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생각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묶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거라는 시간 안에 묶여 있는 생각은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 비유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처럼 생각의 흐름도 비유적인 표현일 뿐인가? 혹은 생각이 행동까지 이어지는 모든 과정 가운데 어느 특정 부분의 순간 속도가 빛의 속도를 앞지른다고 가정한다면? 그래서 현재 시점에서 내가 하는 생각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행위이며 나의 미래에 즉각적이며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쓸데없는 생각들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침부터 졸린 머리를 가볍게 휘젓는다. 커피 한잔과 함께 전날의 기억을 더듬어 갔다. 이 더듬는 행위는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보다는 전체를 만진 코끼리를 자기 손으로 그려보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릴 당시에 생각이나 관념에 따라 중요한 것을 과장해서 집어넣을 수도,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 것을 과감하게 생략하며 그릴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시점에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사실주의적이나 인상주의적으로도 혹은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 특히 요즘의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책과 예술이다. 가령 전날의 어떤 장면을 상기하다가 과거에 보았던, 혹은 근래에 보고 있던 어떤 미술 작품을 상기하게 되거나 특정 책의 구절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의 경험과 예술 작품이 유사점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상반되는 느낌이라 그럴 수도 있다. 전에 본 예술 작품이나 어떤 구절의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그것을 의식하고 일상의 장면과 어떻게든 연관을 지어 끼워 넣을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나도 모르는 충동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예술로서 일상을 해석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일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프레임 중에는 예술과 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일상의 다른 여러 경험도 어제의 장면에 영향을 미친다.
매일 아침, 어제를 기록하는 까닭에 대해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 까닭 중 하나는 거의 변화가 없는 일상이 어떻게 매일 다른 의미가 있는가를 보고 싶어서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일들의 3차원적 단면이 거의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에 우리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각각의 단면이 다른 느낌이 있음을 보이고 싶었다. 우리의 잃어버린 세월 또는 시간 가운데에서 어느 기억에 남는 특정한 시간만이 추억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루가 우리에게는 의미이며 생의 기쁨으로 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의미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생의 의지를 붙잡도록 하고 미래를 기대하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비록 하루가 시궁창일지라도 나는 생각하는 인간임을 자각하도록, 불행이나 행운 따위도 언젠가는 지나가지만, 그 안에서도 의미가 있음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하루들의 연속을 통해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에게서 나오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눈을 감거나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어제의 이미지들은 자판을 통해 글이 된다. 그리고 이 글은 내 머릿속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아마 이 이미지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겠지만, 이 글이 존재하는 한, 기억을 쉽게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점이 기록된 글은 그 시점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다만 나는 그 시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날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까닭은 이 생각들의 특정 시간의 주인으로서만 남아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과거의 모든 시점에 존재할 수 있는 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라는 거대하고 투명한 프레임 위에 몇 개 이상의 레이어를 쌓아 올려도 그 하루라는 그림이 어떤 위화감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현실 이전의 모든 과거에 관한 이야기이며, 어느 페이지를 둘러보아도 상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 내 이야기에서 시간은 사실 결코 중요한 게 아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아마 내 하루와 그다음 날의 하루는 마치 다중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단 하나의 하루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매일’이라는 프레임을 하나의 우주에 길게 펼쳐놓아 마치 60 프레임의 애니메이션처럼 보이도록 할 수도 있지만, 각각의 하루의 장을 60개의 우주에 끼워 넣어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교한 작업에도 사실을 기록해야 할 의무로 인하여 주말의 약속 등에는 어쩔 수 없이 평상시와는 다른 하루를 끼워 넣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아침의 기록은 졸리지만 않다면 매우 즐거운 일이다. 적어도 피로감만 없다면 말이다. 다행인 것은 요즘에는 될 수 있으면 저녁때 오자마자 자려고 하는 습관을 붙여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단지 앞으로 우려가 되는 것은 더위와 모기이다. 선풍기를 하나 사야 될 텐데 요즘에는 무엇 하나 사는 것이 귀찮다. 단지 10분, 20분 정도의 시간을 들이면 되는 일이지만, 이따금 이런 결정들이 귀찮을 때가 있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 역시 요즘에는 시간을 들여 구매하는 게 귀찮다고 말한다. 그래서 링크까지 알려주고 구매까지 다 신청해서 입금만 하면 될 것도 까먹고 있다가 취소된 적도 있다. 마치 마감이 다가올 때까지 미뤄두고 있다가 마감 바로 며칠 전에 간신히 글을 완성하는 작가처럼 그렇게 빈둥대다가 목전에 다가왔을 때에서야 비로소 필요한 물건을 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결정이나 노력에 대해서 미리 하지 않고 미뤄둘 수 있을 때까지 미뤄두다가 하게 되는 심보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위기의식이 없어서일까?
글을 쓰고 책을 보는 일 이외에는 게으름이 극도로 높아져 모든 것들을 미뤄두고 있다. 방 청소, 빨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선풍기를 사는 일까지도 게으름으로 미뤄두고 있다. 그것을 하지 않거나 없어도 아직은 지낼 만하기 때문이며, 아주 조금 괴로울 뿐이지만 이조차 만성화되어 버틸만하다. 습관화된 게으름라는 걸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 문제는 이런 게으름이 삶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이러한 게으름은 매일 조금만 신경 써도 될 일들을 계속 쌓아두고 나중에 처리하는 습관의 다른 이름이며 아주 특이하게도, 적어도 나에게는 큰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에는 보이지 않고 고작 10~20분 미만 정도의 사소한 시간을 할애하는 일들에서 발생한다.
앞의 큰 시간은 스케줄에 정해져 있는 시간을 말하거나 내가 매일 해야 할 일로서 어느 정도의 시간적 부피를 지닌 일들을 말한다. 가령 글을 쓰는 일은 오전 한나절 이상을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고 운동 시간은 샤워까지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책을 읽는 시간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은 그 이상의 시간적 부피를 요구한다. 또한, 이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구획이 정해져 있는 것들이다.
혹시 내가 충분한 시간적 부피를 가지지 않고 따로 스케줄을 만들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면, 이러한 사소한 일들을 한데 모아 시간적 부피와 스케줄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만약 이를 '잡일 시간'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정해진 시간 동안에 청소와 빨래, 물건의 주문, 기타 등등의 일들을 빠르게 처리해버린다면 어쩌면 나의 게으른 습관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매일 1시간씩 구획을 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점진적으로 잘못된 습관을 고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가령 하루에 담배를 한 갑 피우던 사람이 다음 달에는 10개로 그다음 달에는 5개로 점차 줄여서 결국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다짐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건강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담배를 끊는다'라는 다짐을 결국 먼 미래에 맡기는 것이다. 그 미래에 어떤 사정이 생겨 차일피일 미루다가 계속 담배를 피울지 어찌 알겠는가? 차라리 이 자리, 현재 시점에서 담배를 모조리 다 잘라버리고 독하게 마음을 먹다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담배를 무는 게 과거의 다짐을 깨뜨렸을지라도 다시 현재 시점에서 새롭게 다짐하며 심기일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나쁜 습관의 끝과 좋은 습관의 시작은 그렇게 독한 다짐과 실행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령 새해를 맞이하여 헬스장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 차일피일 미룰 거 없이 바로 등록을 하는 게 좋고 취미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으면 바로 시작하는 게 좋다. 현재의 결정은 '1'과 '0' 뿐이며 미래의 결정은 그사이의 확률적 가능성일 뿐이다.
어제의 일기는 전날보다는 빠른 12시 40분쯤에 끝이 났다. 문밖을 나서니 점심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이 일찍 끝난 김에 점심에 바쁘다고 하소연을 하던 가격 파괴 분식점 이모한테 갔다. 와서 이모에게 인사를 하고 보니 생각보다 분주하지는 않아 보였다. "오늘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네?" 이모에게 물으니 이모도 오늘은 한산하다며 나더러 요즘은 아직 애들이 많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나는 웃으면서, "너무 바빠서 이모 힘든 것보다 그래도 좀 한산한 게 낫지."라고 하니까, 이모는 그래도 조금 힘들어도 사람이 많은 게 낫다고 했다. 이모는 "적으면 새벽에 사장이 와서 하소연할 텐데 그 소리를 짜증스럽게 듣고 있으니 차라리 지금 바빠도 고생하는 게 낫지." 말하면서, 하소연하는 사장을 생각하는지 인상을 구긴다. "많이 벌면 돈도 없는데 재료가 많이 나간다고 지랄해, 적게 벌면 적게 번다고, 월세와 재료비 빠지면 자기 주머니에 몇천 원 남는다고 지랄해, 우리가 바보인 줄 안다니까."라고 내게 조금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러면 차라리 장사를 말던가, 이건 뭐 어쩌라는 건지." 이모의 볼멘소리에 나는 웃으면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맞장구를 쳐준다.
이러한 말들은 흔한 인사말과 같은 거라서 나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맞장구를 다른 형태로 쳐줄 것이다. 혼자서 12시간을 일하는 이모는 이로써 조금이나마 피로를 없앨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 병원에서 노인들의 병을 다룰 때, 단순히 병의 진단과 처방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든 이야기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듯, 이모로서는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뿐 아니라 기꺼이 이모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된다. 이모의 애환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이는 어쩌면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해주었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외로운 당신의 고민과 일들에 대해서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줬어야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부모님은 여느 부모님들이 다 그렇듯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 힘든 과정들에 대해서 자녀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혹은 내가 굳이 알아보지 않았던 죄도 있겠지. 그렇다 보니 오히려 내 부모의 사정은 잘 모르는 이가 되어버렸지 않은가? 이 이모가 겪는 사정은 그리도 잘 알아서 심지어 내 부모에게 이 분이 겪는 슬픈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냐고 조언까지 구했다. 그러나 정작 내 아버지가 겪고 있던 그 수모와 괴로움은 몇 달간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엄마를 통해서야 알게 되지 않았던가? 등잔 밑은 언제나 어두워 그 밑을 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밑을 유심히 바라봐야 한다. 가족이 내게 굳이 알리지 않거나 숨기려는 어두움을 대할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모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또 설거지를 내가 한다, 만다는 것으로 실랑이를 좀 벌이다가 소고기 비빔밥을 먹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가 날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커다란 소고기 비빔밥이었다. 밥을 먹고 월천 라운지로 들어갔더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테이블이 없는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먼저 빼앗길 새라 그 앞에 서 있었다.
자리는 뜨거운 태양이 들어오는 자리라 꽤 더웠다. 더위를 잘 참는 성격임에도 블라인드를 좀 내려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없는 자리를 힘들게 맡았으니 덥다고 뺄 일은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준비해온 삼구짜리 콘센트를 꽂고 거기에 노트북과 휴대폰, 그리고 이북을 충전할 수 있는 플러그를 꽂았다. 전자기기가 많아지다 보니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서 작업하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필수였다. 심지어 근래에는 멀리 있는 곳에서 전기를 꽂아 쓸 수 있는 4미터짜리 리드선도 하나 준비해 어디서든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두었다.
아마 만약 누군가 내 가방 검사를 한다고 하면 이러한 독특한 물건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웃을 것이다. 대체로 요즘에 가지고 다니는 물품들은 이러한 전자기기들이 많은데, 언급한 콘센트나 리드선을 제외하고도 일단 윈도 노트북, 안드로이드 태블릿, 이북은 필수이며 영어 모임을 위해 쓰던 MP3용 휴대폰, 블루투스 스피커와 이어폰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셀카봉이나 항균 칫솔 케이스 등도 매일 가지고 다니는 물품들이다. 요즈음에는 이북으로 보는 책들이 많아 책을 잘 가지고 다니지는 않지만, 독서를 종이책으로 하면 종이책 한두 권도 들어가게 되어 가방이 꽉 찼다.
창가 쪽 자리에 그렇게 앉아 한동안 책을 읽으니 상윤이가 옆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내게 도넛을 꺼내 준다. 도넛에는 커피가 잘 어울릴 거 같아 겸사겸사 상윤이를 데리고 저렴한 커피숍으로 나갔다. 1,900원짜리 3샷 커피를 구매하여 나눠 먹자고 하고 하나를 구매한 뒤에 돌아와 텀블러에 좀 따라 두고 그에게 다시 줬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커피는 가루 커피의 맛을 잊게 할 정도로 맛있고 청량했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내게는 커피만큼 정신을 맑게 해 줄 음료도 없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저녁 늦게 반장님이 타 주신 커피를 마시고서 날을 샌 경험이 있으므로, 예전보다는 마시는 양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한잔의 커피는 언제나 유혹적이라 벗어나기 어렵다. 적어도 군대 다녀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커피의 매력에 빠질 줄은 몰랐다. 하루에 적어도 서너 잔씩은 먹는 커피는 오전에는 활력을 오후에는 여유로움을 줬다.
오후에는 <마의 산>을 읽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지옥을 여행하는 단테와 그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생각난다. 책에서도 내 생각과 유사하게도 그의 정신적 스승이 될 세템브리니는 주인공을 '지옥을 여행하는 오디세우스'라고 일컬었다. 그 까닭은 병원이라는 공간 특히 깊은 산속에 있는 병원은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공간과 비슷하며, 주인공은 그저 사촌을 만나기 위한 3주간의 여행과 요양차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환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사회의 시간과 달라, 3주라는 시간은 그저 순식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책의 서술 방식은 굉장히 사실주의적으로 장면의 디테일을 살리려 공을 들인 느낌이다. 그렇다 보니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은 적으며, 대화의 방식보다 서술하는 방식이 많고 대화도 독백처럼 길게 이어지는 글들이 많았다. 지금까지의 흥미로운 부분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다. 어느 한 장면을 보여주고 그 장면이나 등장인물의 상태를 쭉 설명하거나 그들이 장면에 등장하는 어떤 것에 관하여 그 역사나 주인공의 생각을 쭉 나열하는 방식은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방법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량이 많기는 하나 참을성 있게 계속 읽어봐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노트북으로 발췌와 발췌에 따른 생각을 함께 적어 나갔다. 아침 강독회를 운영하면서 얻게 된 건데, 책을 읽으면서 한 문단이 끝나면 토론이나 질의응답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모임의 리더로서 어떤 질문을 할지 각 문단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아마 이러한 방식이 독서를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적어도 발췌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발췌하는 까닭이나 생각을 적게 된 것이다. 또는 매력적인 소설에 따라서는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소설의 상황을 나만의 문장으로 재구성해보거나 소재를 달리하여 이야기를 써보기도 하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시간은 충분했다. 침대에 길게 누워 두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시간, 긴장을 풀 시간, 휴식을 취할 시간. 하지만 저녁마다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고단하게, 낮 동안 자신이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창문에서 저 창문으로 배회하게 만드는 이 불안정한 무기력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느끼곤 했던 무기력이었다. 』
해당 문장은 저번에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1장의 일부인데, 나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바꾸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이 매트리스로 파고든다는 느낌이 들면서 나른함이 온몸을 감쌌다. 이렇게 휴식을 취할 만큼 전날 잠을 충분히 못 자거나 혹은 바쁘게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공허함과 함께 오는 무기력감 때문이었다. 눈을 감으니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약속 시각 직전까지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휴식을 취하는 침실 안에서 불안정한 무기력감을 느끼는 장면에 대해, 나는 나의 방에서 겪은 공허함이 느껴지는 무기력으로 바꾼 것이다. 물론 사강의 문장에서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데에 따른,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정한 무기력이라면 내 문장에서는 그저 공허함과 피곤함으로부터 느끼는 무기력감이다.
이 차이는 사강의 책에서는 주인공인 폴(여성)이 로제와 그의 사랑을 계속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 그로 인해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게 된 그 상황들을 현재 시점에서 묘사하는 무기력감이라면 나의 문장에서의 무기력감은 나 자신이 느꼈던 혹은 소설적 자아의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원치 않는 직장 생활에 시간을 좀먹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나 삶에 공허함을 느낄 때, 나타나는 무기력감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문장을 재구성해보거나 재구성한 문장과 원래 문장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는 것은 책을 이해하거나 문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독서 모임이 되었든, 글을 쓰는 행위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지나가기보다 조금은 신경을 쓰면서 섬세하게 바라볼 때, 하나의 문장에서조차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하게 된다. 이는 어떠한 책이 모든 문단과 문장에 의미를 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으로 작가가 생각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한 문장이 그곳에 존재하는 까닭에 관한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읽힌 문장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의미 없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신의 뜻에 부합하는 문장이 된다.
하나의 문장조차 그러한데, 그 문장을 창조하는 내 생각도 신의 뜻일까? 혹은 다른 의미로 연속된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필연과도 같은 것일까? 나는 내 생각이 필연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 필연인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우주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팽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의 생각이 빅뱅이라면 그 생각의 조각들이 빛의 속도로 퍼져 생각의 우주를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수많은 기호로 가득 찼을 내 머릿속의 우주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영진이가 함께 따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독서 토론 모임의 형태를 보드게임에 비유하여 설명하려는 그의 생각이 재미있었다. 그는 하나의 보드 게임을 하나의 독서 토론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보드 게임은 다양한 책이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게임이 서로 다를 게임의 룰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책들은 서로 다른 형태의 토론 게임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보드 게임은 젠가나 할리 갈리와 같은 쉬운 게임이 있는가 하면 루미큐브나 아그리콜라와 같이 머리를 써야만 하는 조금은 어려운 게임이 있는 것처럼 책도 연령대나 수준이 있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쉬운 게임을 숙지하게 되면 어려운 게임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비유에 대하여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형태의 독서 프로그램이 있다면, 위의 각각의 책이나 책들의 수준에 관한 프로그램을 다른 접근법으로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해온 한 두 개 정도의 일반적인 독서 토론 프로그램의 형태에서는 저러한 생각의 접근법은 책에 따라 토론 모임의 룰을 바꿔 모임을 참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독서 토론이 아닌 각각의 개별 도서에 따른 독서 행위(방법)를 게임으로 여긴다면 어땠을까 싶다.
예를 들면,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격주에 한번 정도 참여하여 토론하는 모임이 있을 때, 책에 따라 모임 진행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토론 모임에 관하여 일반적인 형태인 발제 및 토론만을 할 뿐이며, 독서 모임에 참여할 때 미리 알리지 않는 이상, 대체로는 이러한 모임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책은 바뀌어도 그러한 토론 게임의 룰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물론 사전에 다른 형태의 모임을 계획하고 만들거나 일반적인 형태의 모임으로 운영을 하다가 사전에 다른 방식을 제안할 수는 있다.)
나는 다른 접근법으로 일반적인 독서 토론 모임을 보드 게임의 예로 든다면, 형태를 갖춰 상대와 토론을 하는 것이 일종의 보드게임이 되는 것이고 독서라는 행위 자체는 게임에 참여하려는 당사자들이 사전에 룰 북을 숙지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비유에서는 충분히 그 룰을 이해하거나 읽어본 사람이 모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룰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게임을 더 재밌게 참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 함께 참여하여 게임을 하게 될 것이다. 모임 자체의 룰도 있는데 이는 게임 모임에서 가지는 기본적인 에티켓과 같다. 이 모든 것들은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기 전에 숙지해야 하는 것처럼 토론 참여자들이 사전에 숙지하고 와야 한다. 이러한 비유에서는 토론만이 오로지 게임일 뿐이다. 물론 내가 했던 수많은 모임 가운데에는 룰의 방식이 강독과 토론이 혼합된 형태에서 즉흥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도 있었다. 이 또한 해당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사전에 그러한 방식임을 숙지해야 할 룰이다. 이와 더불어 그에게 모든 보드게임이 그렇듯 독서 토론 모임 역시 초반에 그 방법(룰)을 잘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 룰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구성원 모두의 협의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길 위에서 영어 공부를 할 시간을 놓치고 결국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나는 웃으면서 "오늘도 너한테 말렸다."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도 역시 유익한 시간이었던지라 정류장에서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보내줬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겼고 홀로 캠퍼스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