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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May 08. 2020

내가 이런 일을 할 줄 몰랐다

누구나 그랬으리라

아직 학생일 무렵. 많은 걸 습득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 들었던 교수님, 선배님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저것 하다 보니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이것은 꽤나 인상적인 조언이었다. 당시의 나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한 가지에 집중하고 달려가야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이나 열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히 열정이 뛰어난 학생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분명한 목표의식과 열정이 없었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소한으로 두고 싶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수의사로서의 길은 다양하다. 일반인들은 단순히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수의사를 떠올리지만 수의사가 할 수 있고, 수의사만이 할 수 있고, 수의사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모든 직군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직종이나 장점과 단점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6년의 수의과대학 교육과정과 군 복무 2년을 포함해 20대의 80%를 경제적 무능력자로 살았다. 여유롭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 경제적 능력을 취득하는 일이 중요했다.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하고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했던 이유도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수의사로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자아실현의 욕구가 뒷받침되어 감사하게도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는 안도함도 있었다.  


세상을 향해 나가는 첫걸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울 것이다. 그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대학원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게 대학원은 지적, 시간적, 경제적 사치라고 생각했다. 6년의 공부는 충분했다 자위했고, 비경제인으로서의 8년이란 시간도 아까웠다. 내 힘으로 최소 x억은 모아야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30대까지도 공부를 하고, 그만큼 경제적 상황은 더 안 좋아졌으며, 통장에 돈 한 푼 없이 용감하게 결혼을 했다. 10년이 지나 돌아보니 참 용감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 측면에서는 무식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여전히 나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경제적 독립을 꿈꾸지 못한다. 나와 가족이 겨우 건사할 정도의 경제적 활동은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제 직업 없는 경제적 독립을 꿈꾼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자택 근무를 하고 있다. 좀 더 효율적인 자택 업무환경을 만들겠다고 트리플 모니터를 설정하고 이메일을 확인한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아도 1-2주는 버틸 수 있는 냉장고의 음식이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있다. 신체적 활동이 그다지 요구되지 않는 사무직은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수의사의 삶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20대에 나는 마흔 살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의대 가서 의사가 될 거예요. 젊을 때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마흔 살 이후에는 여행이나 다니며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라고 말하던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가 생각난다.


'장래희망과 15년 이후의 나의 모습을 나누어 봅시다'라는 주제로 앞에 나와 교탁에서 발표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년이 지난 현재 고등학교의 모습과도 별 차이가 없으리라. 그 친구는 결국 의대를 가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여유롭게 세상을 누비고 있을까. 이 사회가 말하는 가장 성공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소유했으니 말이다.


의사가 아니더라도, 2-30대에 한두 푼이라도 더 모아서 부동산으로 이익을 좀 챙겼다면 더 풍요로웠을까. 최소 5년 전에 서울에 작은 아파트라도 한채 사놨다면 지금보다 훨씬 부자였을텐데 말이다. 그랬으면 경제적 독립에 더 가까웠을까. 최소한 럭셔리 세단 한대쯤은 고민 없이 뽑을 수 있지 않았을까.


...


나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하게 될까.

분명한 것은, 마흔 살에도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삶이 꽤나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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