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은 수의학의 꽃이다.
가끔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임상 수의사가 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지.
함께 수의학을 공부한 동기들, 후배들은 이미 동물병원 원장님이 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임상 수의사로서 동물을 치료하며 생명을 다루는 최전선의 현장을 책임지고 있다. 가끔 티비 프로그램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올 때면 반가운 마음과 함께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단지 티비에 나와서가 아니라, 한국 수의학계로부터 단절된 몇 년의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은 그렇게 각자의 영역을 개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동물을 위해 열심히 애쓰고 힘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수의학과에서 공부를 할 당시, 교수님과 선배님들께 자주 들었던 말은
“임상은 수의학의 꽃”
이란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오늘도 동물병원에서 늦은 시간까지 힘쓰는 임상 수의사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임상은 환자인 동물을 직접 진료하고 치료하는 일을 말한다. 건강관리부터 질병의 진단 및 치료까지 동물 건강에 대한 모든 영역을 다룬다. 아픈 동물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수의학 전반에 대한 깊이 있고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단편적인 지식으론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없고 질병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러 가지 기계와 도구를 이용하는 일에도 능숙해야 한다. 의료기구 없이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픈 동물들을 데리고 오는 보호자인 사람들과 대화를 잘 하는 것은 특히나 중요한 능력이다. 전문적인 지식을 보호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야 하고, 아픈 동물만큼이나 아픈 보호자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동물병원 원장에게는 동물병원 운영과 관련된 경영학적 측면에서의 지식과 경험도 중요하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동물병원에서 임상 수의사로 일하는 것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종합 학문 세트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수의학과에 입학한 이유는 동물을 좋아해서였다. 의아한 점은, 생각보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고 수의학과에 입학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어떤 선배는 동물을 좋아해서 수의학과에 왔다는 말에 거부감을 보이며 단지 동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의사가 되는 건 아니다 라며 일장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 선배도 그때는 기껏해야 한 두 살 차이였으니 고작 20대 초반이었던 나이라 지금에서 돌아보면 치기 어린 행동이라 웃으며 회상할 수 있지만, 동물을 좋아해서 수의학과 왔다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인가 라고 속으로 반항했다. 물론 그와 반대로, 나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동물 사랑에 '미친' 학우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하게 한국 수의학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대학을 입학하는 나이인, 만 18세까지,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많은 동물들의 아픔과 고통, 죽음을 경험하였기에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의사가 되고 싶다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그랬기에 동물을 직접 치료하는 임상 수의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나의 직업적 진로였다.
졸업이 점점 다가오면 여타 과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의학과 학생들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수도 없이 한다.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이루어진 총 6년의 수의학 과정을 거치면서, 진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 6년이나 공부를 하는데 대학원을 가서 더 공부를 하고 학위를 취득하는 일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학문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우리 집안 형편상 대학원 공부를 할 만큼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 수의사로서 경험을 쌓는 것 나의 관심사이며 목표였다.
안일한 생각이긴 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방학 때 틈틈이 영어회화 공부를 할 때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유학도, 공무원이나 회사 취업할 것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따로 영어 시험 점수를 위한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외국에 살아본 적도 없고, 살고 싶다는 생각도 딱히 해 본 적이 없기에, 영어공부가 무슨 필요인가 생각했었다. 수의학 전공서적들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영어 독해 실력만 갖추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크나큰 착오였다는 것을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닫게 된다.
본과 3, 4학년으로 올라가서 임상 과목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임상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내가 공부하고 마치던 시기가 수의학 발전의 태동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전후로 많은 수의사들의 노력이 한국 수의학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임상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실제 현장에 나가서 동물을 치료하기엔 임상 수의학에 부족함이 많아 보였다. 그것을 홀로 극복해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이대로 임상을 진출하기엔 질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수의 병리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이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영어 공부를 소홀히 했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때문에 고생도 많지만 수의학 발전에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는 연구자로 있다는 것에 대한 보람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
미국은 단연 수의학의 선진국이다. 한국 수의과 대학에서 배우는 많은 수의학 전공 서적들은 대부분 미국 수의사들이 집필한 책들이다. 많은 분야가 그렇듯 미국에서의 수의학은 동물에 대한 많은 관심과 잘 갖춰진 시스템, 한국에 비해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학문적인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더 인상 깊은 점은 한국 소동물 임상 수의학의 현저한 발전과 뛰어난 수준이다. 도심에서 주로 우리가 접하는 동물병원, 개와 고양이를 치료하는 학문을 통상 소동물 임상이라 부르는데, 그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뿐임에도 속도와 양, 질적 측면에서의 엄청난 향상이 체감된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동기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그들만 봐도 동물병원에서 동물을 치료하는 수준이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아직 한국엔 수의 전문의 제도가 설립되어 있진 않지만, 수의사들의 개별적, 자발적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는 진단, 병리, 외과, 내과, 특수동물, 치과, 안과, 피부과, 물리치료, 한방치료, 대체 치료 등 소동물 임상 전반에 발전을 가져왔다.
소동물에 국한하지 않는 여타의 동물과 다양한 수의학 분야에 대한 종합적인 학문적 성과와 수준은 아무래도 미국이 뛰어나지만,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도시 인구가 동물병원을 이용하기에 한국의 임상 수준은 점점 빠르고 정확하게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 한국은 유동성이 높아 본인에 맞는 좋은 병원을 찾아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비록 지역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국에 있는 좋은 수의사와 동물병원을 선별해서 찾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결국 같은 편이라고, 수의사들 편만 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실력 없고 열정도 없고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 형편없는 수의사들도 많은 것은 부끄럽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당신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자라면, 그런 수의사들을 절대 만나지 않길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병원을 방문할 때는 보호자들의 노력 또한 필요하다. 수의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도 위험하지만, 무조건적인 신뢰도 무척이나 위험하다. 내가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좋은 수의사와 동물병원을 만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임상 수의사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아직까지는 크게 해본 적은 없지만, 임상을 하고 있는 동기, 선후배들이 부러운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힘들고 고된 직업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끼며 동물을 사랑하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임상은 수의학의 꽃'이라 했는데, 그 꽃에 미천하나마 작은 향기를 보탤 수 있다면 어릴 적 이별한 많은 개들과 동물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