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까지 잘 그리는 친구였다. 한 학년에 한 반만 있던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별로 친해질 기회가 없던 우리는 중학교 3학년이 돼서야 같은 반 친구로 다시 만났다. 한 학년에 전부 120명도 채 되지 않는 고향 면내에 있는 작은 중학교에 다녔던 우리.
당시 M의 모습을 그리자면 칼 단발에 앞머리는 당시 유행처럼 풍성하게 올려서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반면 나는 여학생 99%가 따라 하던 앞머리엔 관심도 없이 곱슬머리를 제멋대로 흩트리고 다니는 목소리 큰 아이였다. 아빠가 드라이와 빗을 사다 주셨지만 뜨거운 열이 나오는 드라이어보다 시원한 선풍기 바람으로 머리 말리는 걸 좋아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쉬는 시간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투명 테이프로 속눈썹을 만들고, 손톱을 정리하고, 맥주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면서까지 같은 학교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의 모습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생각은 당시 M도 나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쉬는 시간이면 노트에 그림을 그리곤 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노트에 말도 안 되는 막장 소설을 써내려갔고, (말도 안 되는) 그 소설을 자신 있게 내보여서 같은 반 친구들이 돌려 읽곤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찬사. “넌 멋진 소설가가 될 거야” 그 격려에 힘입어 당시 내 어깨엔 뽕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마치 풍선에 바람 빠지듯 스르르- 축 처질 때가 있었다. 바로 M을 마주할 때였다. 그 애의 외모나 인기, 그림 실력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아이가 쓴 글이 부러웠다. 한눈에 봐도 ‘나 문학소녀예요’라고 보이는 M은 글을 쓰는 표현이 나와는 너무도 달랐다. 어려운 단어도 술술 막힘없이 쓰고, 문장도 매끄러웠다. 게다가 학교 대표로 나간 백일장에선 늘 미끄러지는 나와 달리, M은 종종 상을 타왔다. 당시 M은 외국영화와 팝송에 심취했고, 서태지에 열광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외국 배우와 외국 가수 이름을 거론하곤 했다. 또 친구들이 서태지나 장동건, 손지창을 이상형으로 꼽을 때, M은 그 누구도 아닌 “난 지적인 남자가 좋아”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지만, 난 M이 대답하던 그때 교실 풍경과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부터였다. M이 부러워서, M을 이기고 싶다는 생각에, 나와는 맞지 않는 글을 썼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단어만 골라 쓰고, 문장도 이리저리 꼬이게 썼다. 그 결과 백일장 입선은 점점 더 멀어졌고, 글을 쓰는 것도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글을 잘 쓰거나 말거나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것들을 글로 써내려 가는 게 즐거움이었는데.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가수 노래를 따라 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던 나였는데. 막장 소설도 시도 잘 써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예부 대신 연극부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가을, 또다시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게 됐다. 이번에도 뭐 떨어지겠지.. 하는 생각에 엄마에게 푸념을 했다. M은 백일장 나가서 상도 잘 타는데, 나는 떨어지기만 하고. 뭐 이렇게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런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던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이 말을 그때까지 나에게 해준 선생님은 없었다. “이 문장은 이러니까 고치자. 이 단어 대신 이렇게 쓰자” 라는 얘기만 들었지, 엄마처럼 일러준 분은 없었다.
그때 나간 백일장에서 등나무 벤치를 책상 삼아 앉아 글을 썼다. 1차로 연습장에 쓴 글을 다듬으면서 또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은 지우고, 내가 쓸 수 있는 쉬운 문장으로 고쳐 썼다. 전에는 글을 쓰는 내내 ‘입선이 될까? 제발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너무 커서 가슴이 답답했는데, 그날 나는 그동안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나게 써 내려갔다. 그리고 원고지에 다 옮기고 난 뒤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글쓰는 이 일을 평생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얼굴과 목덜미를 스치던 선선한 바람결 덕분에 가슴까지 벅차올랐다. 그리고 그 백일장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
스터디 동기 다섯 명 중에 세 명이 당선되고, 그들 모두 제작사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 모두가 부러운 나머지 그동안 스터디에서 그들이 쓴 대본을 읽어보고, 그들이 쓴 대사와 지문을 소리 내어 읽어봤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그럴수록 글이 한 줄도 써지지 않는다. 평생 글은 쓰면서 살고 싶은데, 글이 써지지 않는 이 엇박자는 뭐지. 그 사이 난데없이 왼 손가락까지 마비됐다.
또다시 글 쓰는 게 재미없다.
열다섯 나에게 해준 엄마의 조언처럼, 뭔가 나를 일으켜줄 무언가가 필요한 요즘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건 내 의지라는 걸.
우선 오늘 사 온 책이라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