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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Oct 07. 2019

2019 부산국제영화제 후기

쏘리 위 미스드 유, 켄 로치
보는데 심신이 너무 지치는 영화였다. 노화나 가난이 언제든지 평범한 중산층(아마도 타겟 관객이 '평범한 중산층'인 듯)을 전락시킬 수 있다는 공포를 불어넣는 영화 같았다. 그래야만 이 현실이 바뀔 수 있다고 켄 로치는 믿는 걸까? 혹은 이렇게까지 해야만 관객들이 영화를 남의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는 걸까?
최근에 본 <리지>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런 영화들이 대중적으로 접근 가능한 픽션 형태로 나온다는 건, 영국의 특징인 걸까? 어떻게 봐도 돈이 될 영화들은 아닌데.

폭군 이바나
이게 대체 무슨 영화인지 잘 모르겠다. 완전히 사적인 영화 같은데, 동시에 로마니아-세르비아 관계에 대한 이상한 암시들이 자꾸만 나와서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앙카 팝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은 좀 짓궃은 느낌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완전 이상한 사람으로 나오던데. 정말 친한 친구였던 모양.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피곤이 쌓여서 그런지 소를 찾는 장면 즈음부터 푹 잠들었다가 시장에 내려와 동냥을 할 때부터 다시 깼다. 사바세계에서만 잠이 깬다니 나도 천상 속세인인 모양. 89년 영화인데, 내가 92년생이니 내가 살던 시기와는 동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면이 있었다. 서랍에 여러 한약재를 넣어둔 한의원이라든가, 길거리에서 현란한 말솜씨로 바지를 파는 상인이라든가, 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이지만(물론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일상적이었다. 시대의 변화라는 게 정말 낙숫물처럼 천천히 젖어드는 것 같다. 90년대에 대해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야 유년시절을 보내서 잘 기억나는 게 없지만 참 특이한 시기였던 것 같다. 최소 2000년대 초반까진 그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 같고. 2010년대에는 거의 영향이 없이 레트로로만 소환된 것 같고. 2020년대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연구대상으로나 바라볼 시대가 되려나? 잘 모르겠다.
영화 얘기가 없는 것은 영화에 대해 쓸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건 3시간 짜리 영화의 2시간 짜리 버전인 것 같은데, 남은 1시간을 챙겨봐도 영화가 이해가 될지 잘 모르겠다. 아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원 차일드 네이션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가 99%라던데 확실히 신선한 이야기다. 소재만 잘 잡아도 다큐멘터리는 반 타작은 하는 경향이 있는데, 카메라를 들자마자 줄줄 쏟아져나오는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화수분 같았다.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다지 즐거운 일들은 아니라 악몽의 화수분이라고 해야겠지만. 중국 공산당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모든 일이 체념과 무기력증에 힘입어 잊히고 있었다는 게 소름끼친다. 예전에 [침묵의 시선]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인 것 같다. 특히 그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짓눌린 듯한 애매한 웃음들이라니. 5만~6만에 달하는 불임 수술, 낙태 수술(7개월 이상의 태아를 낙태했다는 건...이게 낙태인가 싶다.)을 한 뒤 죄를 갚기 위해 불임치료에 매진했다는 의사가 감사의 의미로 받은 깃발들을 모아놓은 방을 보여줄 때 뜻모를 눈물이 나올 뻔했는데, 이 장면이 바로 뒤의 프로파간다 영웅 의사가 꾸깃꾸깃 모아놓은 훈장과 사진들을 보여주는 장면과 대비되어 마음이 아팠다. 후자는 처음에는 낙태가 죄라고 생각해서 벗어나고 싶었음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뒤에서는 공산당의 프로파간다를 문자 그대로 읊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이 다큐가 공개되고 나서 무언가 잘못 얘기하면 떨어질 불이익을 걱정해서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분열증적으로 수용된 세뇌나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굳이 젊은 시절 낙태가 죄라고 생각해 이 임무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던 얘기를 꺼낸 것이나, 그 자랑스러운 훈장이나 감사패들을 벽에 걸어놓는 것도 아닌 어디 상자 같은 곳에 구깃구깃 접어넣은 것도 내심 이런 분열증적 심리를 드러내는 것 아닐까.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면서 8~9개월 된 아기들을 낙태하고, 꺼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아이를 안고 그 어머니가 도망간 이야기를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하는 부분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바로 옆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인구전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러한 전쟁이나 학살의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집단적 트라우마를 깊게 남기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규모로만 치면 중국의 이러한 집단학살극이야말로 세계상 유래를 찾기 힘들 텐데, 이런 일을 벌이고도 그 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35년 동안 이어진 정책이니 만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어마어마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상황도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물론 국가적으로 낙태, 불임 수술을 시행하기도 했고, 또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사상전향자들 리스트를 받아놓은 뒤 학살한 보도연맹사건도 있지 않았는가. 피해자가 최대 120만까지 추산되는 집단학살 사건인데, 이에 대해서도 엄청난 침묵이 존재했고, 존재한다. 물론 '위안부' 사건도 하마터면 침묵 속에 파묻힐 뻔한 사건이고. 세상에 이렇게 집단적 망각 속에 파묻힌 일들이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를 떠올리면 이런 다큐멘터리 하나하나가 역시 귀중한 자료라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제의 창조>를 봐도 나오지만, 임신 및 출산이야말로 여성억압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즐거운 우리 집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회복된 장손자가 6개월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이 무언가 이상하다. 할아버지는 충격에 빠져 실어증에 걸렸고, 사촌동생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성차별이 극심한 이 가문에서 주인공은 동생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어디선가 자꾸만 동생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전형적인 고딕풍(?) 공포물로 보일 수 있지만, 반전이 나오고부터 흥미로웠다. 단적으로 말해서 주인공의 정체가 가짜였는데, 그리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소소하게 충격을 주는 괜찮은 반전이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땅문서를 버리지 않고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음, 그런데 베트남 상속법이 어찌되는진 모르겠지만 땅문서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땅문서라는 게 유효한가? 여러 의문이 들었다.

#존덴버
결말이 극단적이면서도 너무 손쉽지 않나 싶었다. 굳이 죽였어야 했나?
그래도 만듦새가 깔끔했다.
그런데 왜 더 헌트도 그렇고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도 그렇고 존 덴버도 그렇고 '마녀사냥' 이야기 주인공은 왜 항상 남자로 설정되는 걸까? 그나마 존 덴버에서는 그 이야기의 원본이 여성이라는 걸 암시적으로나마 드러내는데, 나머지 둘은 뭐. 특히나 억울하게 성범죄자로 몰린다는 이야기 구조 자체가 참 뭐라 말을 못하겠다. 남자들은 왜 자기를 마녀사냥의 피해자로 감정이입할까. 와인스타인도 자기를 언더독에 감정이입 하지를 않나.
남자들의 자아도취라는 건 아주 뿌리깊은 병인 것 같다.

말레이시아를 위하여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모범적 선례인 것처럼 국뽕을 들이키던 사람들은 아마 말레이시아에서도 꾸준히 대규모 집회가 열리던 걸 몰랐겠지? 한국인의 아시아라는 게 대개 동북아시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주변에 북한 중국 일본 뿐인데 개중에 제일 민주적인 나라라는 게 무슨 큰 자랑거리일까.
좌우간 보면서 기분이 복잡해졌는데, 일단 아이러니한 태도로 찍는다는 부국제 소개글은 완전 엉터리고 감독은 완전히 나이브한 태도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막판의 그 감동적인 배경음악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특히나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들이 권력을 잡으면 무슨 짓을 하는지 이미 경험한 한국인 입장에선 더 그렇다. 정치혐오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정치인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시민들이 만들어낸 개혁의 동력을 늙은이들 기성정치가 꿀꺽 먹어버리는 사태는 뭐라 덧붙일 말이 없는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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