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이병현 Dec 03. 2019

하스미 시게히코에 대해


01.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평론이 그의 불문학이라는 학문적 베이스와는 전혀 무관한 시네필리아적인 것([하스미 시게히코 - 비평의 주술사, 열도를 포박하다], 임재철, {씨네21}, 2001.03.09.,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65)이라거나 엄밀한 논리성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등의 말은 참으로 하스미에 대한 근본적 오독에 기반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허문영의 서평([야만적 유희자의 초상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의 맨살』], 허문영, {문학동네} 통권 86호, 2016.03.14.)처럼 하스미 시게히코의 방법론이 불가사의한 것이라며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헤테로토피아의 분류학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하스미의 글을 실상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것으로 태그하고 한쪽으로 밀어두는 너무나 손쉬운 요약에 다름아니다. 하스미는 확실히 하나의 철학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대담하고 확고한 수사학자다.
 
02.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는 그가 하나의 명료한 이론적 정체성을 세우는 것은 회피하려 했으며 반대로 자꾸만 사상적 모호성 내지 비일관성을 추구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이영훈. (2008). 롤랑 바르트의 수사학적 모험. 프랑스문화예술연구, 23(), 373-392.). 그런데 언뜻 지독한 악평으로 들리는 이 평가는 철학자로서는 약점일지 몰라도 결코 영화이론가로서는 약점이 될 수 없는 말이다. 일찍이 에이젠슈타인이 그랬고 바쟁이 그랬듯이, 오히려 하나의 뚜렷한 이론을 세우지 않고 중구난방 말의 미로를 펼치는 것은 영화이론가들에 있어서 그다지 드문 경우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것인가? 때로 나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을 읽으며 그 답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대저 평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철저한 논리만으로 이루어진 글도 아니고 지난한 정치적 협상문도 아니다. 자기 논지를 주장하고 관철시키는 것, 그게 바로 평론이다. 논리적 엄밀성의 잣대보다는 독자를 설득시키느냐 아니냐, 그로부터 그것이 잘못된 것이든 맞는 것이든 하나의 믿음을 형성하느냐 아니냐, 평론의 성과는 실로 여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고다르의 글을 보고 깨달았다는 (그리고 한국의 평자들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듯 되풀이해서 인용하는(금정연. (2016). 순 - 문학적으로 살아남기. 문학과사회, 29(3), 102-116.)) 평론가의 필수적 자질인 “픽션적인 단순한 대담화”란 그 성과를 내기 위한 기예(arte)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위에 언급한 평론의 특성이란 수사학적 논법인 엔튀메마와 그리 먼 거리에 놓여있지 않은 것 같다.
 
03.
하스미 시게히코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 활동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플로베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일본에서 롤랑 바르트, 푸코, 들뢰즈 등의 인터뷰를 발표하며 프랑스의 지적 동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지적 여정을 시작한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바르트로, 이영훈의 논문에 따르면 바르트가 쓴 [옛날의 수사학: 비망록]은 1999년 이전까지 동시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지식인들이 수사학사를 이해하는데 활용한 중요한 텍스트이며, 미국에서 출간된 수사학 백과사전과 20세기 주요 수사학자들에 대한 평전에서 바르트는 아예 수사학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롤랑 바르트에게서 직접적 영향을 받았는지는 향후 연구해봐야 할 주제겠지만, 최소한 내게 하스미 시게히코는 롤랑 바르트를 이어 활동하는 수사학자다. 이는 특히 수사학이 바르트에게 애증의 대상으로서, 한편으론 권력 행사의 도구임과 동시에 反수사학마저 포용해 글쓰기에 대한 사랑의 차원으로서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문학이론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는 부분에서 그렇다. 독자를 유혹하여 ‘읽기’를 넘어서 ‘쓰기’로 나아가게 하는 ‘효과의 기술’, 이것이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평론이 불러일으키는 효과이기도 하지 않은가?(이는 그가 속했던 뉴아카데미즘이란 조류와도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이를 전제해두고 말하자면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의 "텍스트적인 서사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적극적인 역학원" , 혹은 그러한 역학원을 만들어내는 원리란 무엇인가, 를 두고 고민해봤을 때 이는 수사학적 증명법, 즉 엔튀메마의 출발점인 통념, 개연성, 그리고 징표와 그리 먼 거리에 놓여있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보자. 뒤집어지는 하얀색, 던진다는 것, 존 포드에 대한 평론 두 편은 부제부터 황당하다. 이는 일종의 수사학이다. 존 포드 영화에는 뒤집어지는 하얀색 에이프런이라는 계열이 있다, 라는 말은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철저하게 수사적인 선언인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러한 상식과 어긋나는 이야기(존 포드는 추하다, 존 웨인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친구이자 연적을 남성으로서 질투해서 총을 쏜 것이 아니라 하얀 에이프런에의 순수한 질투와 선망 때문에 총을 쏜 것이다 등등)를 툭 던지곤 하는데 때로는 이것이 수사학에 불과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자체로 진실이다. 아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수사학을, 혹은 바르트가 주장한 의미에서 反수사학마저 끌어안는 바로 그런 수사학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물이 하스미 시게히코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수사학의 대가다. 더 중요한 지점은 이것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설득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식 글쓰기란 이런 것 같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가설을 들이밀어 놓고는, 그걸 탁월하게 설명해 설득해내고야 마는 방식. "필름적인 서사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적극적인 역학원"을 찾아내는 눈. 그것을 한참 설명할 때 "어라, 내가 본 영화의 그 장면이 정말 이랬던가?" 하다가도,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명백할 것이다"라며 단정하는 말투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이것은 무엇보다 그가 근거로 대는 것이 구체적인 영화들과 그 안의 구체적인 장면들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통념, 영화 내적 논리로서의 개연성, 그리고 각 영화들을 포괄하는 징표들. 이를 엮어내 독자를 설득하고 선동한다. 그것이 하스미의 글쓰기다. 때문에 하스미의 “反진리 담론”이란 변증법이 아닌 엔튀메마로의 진입이다.
 
04.
좋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이 수사학의 계보 안에 위치한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의 글에 유혹되어 ‘쓰기’를 하고자 하는 새로운 작가들에게 그의 글이 던져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나 자신이 직접 수사학을 적극적으로 내 글에 끌어들여 수사학의 논리를 펼치려고 할 때마다 내 글은 어째 수사학이 아닌 '수사적이다'라는 일상언어 용법 속의 그 수사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그런즉 말장난이 아닌 수사학을 구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우면서 또 시도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
고백하건대 나를 영화비평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글은 정성일의 열렬한 사랑고백이었다([정성일의 영화순정고백담 – 첫 번째 이야기], 정성일, 맥스무비, 2010.12.31., https://news.maxmovie.com/81646).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쓰기’로의 전환의 첫 순간.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지당한 일인가? 이런 의문을 품고 나도 이처럼 무언가에 광적으로 미쳐보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영화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와 접하며 영화에 대한 글을 쓸수록 늘어만 가는 것은 영화에 대한 사랑이 아닌 영화에 대한 성적 불감증 상태였다(불감증이란 토 나오는 비유를 보며 새삼 시네필리아란 용어 자체가 지닌 추함을 되새겨보자). 그보다 나는 단 한 번도 어떤 의미로는 ‘오타쿠’적인 이러한 광적인 사랑에 빠져본 적이 전연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어쩌면 내게는 영화평론을 쓸 요량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좌절에 빠지기도 했었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것은 나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올해 3월 출간된 비평 모음집 {순응과 전복} 머리말에서 김영진 평론가는 자신이 한때 가졌던 시네필적 열정이 이제는 식어버렸다며 과거에 가졌던 열정에 대해 다소 쑥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을 가지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때 부끄러워야 할 것은 들떠서 열렬히 고백했던 과거의 사랑인가, 아니면 현재의 식어버린 내 모습인가?
다소 벗어나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최근 읽은 책 {그릿}을 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여전히 영화평론에도 ‘노력’보다는 ‘재능’에 대한 선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노력가라기보다는 천재라는 단언을 더 선호할지 모른다. 그가 천재라면 그가 쓴 글은 그저 이해 불가능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의 경지라며 포기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이 가진 설득력이란 하스미의 재능과 천재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노력, 그로부터 갈고 닦은 기예, 그러한 기예로 성실하게 영화를 보고 글을 쓴 노력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상 수사학의 중요한 요소 중 또 하나는, 수사학자들이야말로 사실상 근대적 교육(연습, 시험, 기타 등등)의 시초라는 사실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하스미를 천재로 추앙하는 것이야말로 하스미가 말하는 ‘범용한’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스미의 글을 시네필적 열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의 글이야말로 어쩌면 좋은 영화평론이란 [재능x사랑=기술, 기술x사랑=성취]라는 공식을 공고히 하는 하나의 환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영역에서건, 성취의 공식은 [재능x노력=기술, 기술x노력=성취]일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2021년 제25회 부천영화제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